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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책에나 있는 얘기고, 현장에선 안 통해."

공학을 전공했고, 엔지니어라는 타이틀로 현장을 어슬렁거린 것이 벌써 20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책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 적용해 보겠다고 애를 썼고, 평생을 현장에서 보내신 선배들은 이런 나를 조용히 타일러서 돌려보내려고 하셨다.

학교에서 배우고 수업을 들을 때는 어떤 문제가 주어져도 답을 낼 수 있었는데, 막상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교과서의 예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근사하게 답을 써서 가져가도,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고려하지 못했던 다른 어려움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협상'_노무현과 문재인, 무엇으로 마음을 움직이는가. 조기숙 지음.
  "대통령의 협상"_노무현과 문재인, 무엇으로 마음을 움직이는가. 조기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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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통해 소개할 책 <대통령의 협상>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시절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교수가, 협상전문가인 하버드 대학교 피셔 교수의 협상법에 기반하여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협상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의 내 자세는, 나를 타일러서 물러나게 하시던 현장의 선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에서 언급된 예제는 실제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면서 말이다. 과연 우리는 '협상'이 통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우선 저자가 알려주는 협상의 원칙을 한 번 읽어보자.
 
"협상에서 지켜야 할 네 가지 원칙" 중 발췌 (pp.52~77)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라.
협상을 하다 보면 갈등이 불거지는 게 당연하다. 사실 잠재적 갈등이 있는 관계에서 협상이 시작되는 게 보통이므로 갈등 없는 협상은 없다. 우리는 회의 시간에 자신이 제안한 안을 비판 또는 반대하거나, 이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협상이 감정적으로 흐르게 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은 협상에도 해당하는 명언이다. 협상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협상의 목적, 즉 이익에 초점을 맞춰라.
이익 중심의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 협상에서 얻고자 하는 이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공통의 이익을 찾기 위해서는 나의 이익 못지않게 상대가 어떤 이익을 추구하는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잘 모르는 상대에 대해서도 다 안다고 여기고, 관심법을 통해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정한다. 하지만 협상에서는 어떤 것도 분명하지 않다. 우선 탐색과 질문, 관찰과 대화를 통해 상대의 이익을 알아내야 한다. 그런 다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종 협상안에는 상대의 이익도 포함해야 한다.

상호 이익이 되는 옵션을 개발하라
옵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협상의 당사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최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 즉, 양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롭고 창의적인 대안을 제한 없이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어떤 기준을 마련할 것인가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만들어낸 옵션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중에서 기준에 의해 우선순위를 정하라고 피셔는 말했다. 

최선의 대안, '바트나BATNA'를 통해 협상력을 키워라.
협상에서 타협이 항상 최선은 아니다. 반드시 뭔가 협상안을 타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협상을 하다가도 필요하면 협상장을 걸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타협을 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을 피셔는 '바트나BATNA'라고 부른다. '협상안이 깨지더라도 내가 택할 수 있는 여러 개의 대안 중 최고의 대안'이라는 의미다. 협상의 결과가 사실상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회사에서 보내주는 합숙 교육의 테마 중 하나가 '협상 잘하는 법'이었고, 그때 처음으로 '바트나(BATNA: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라는 용어를 접했다. 제대로 된 '협상'은 고사하고 사안에 대한 협의마저도 익숙하지 않았던 시기라서 꽤나 흥미롭게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후로는 그 수업에서 배운 것을 실전에서 써먹은 경우는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언젠가는 현실에서 써봐야지' 하는 기대를 가졌는데, 과연 가능할까? 우선 다음의 몇 가지 장면을 살펴보자.

장면 하나 : 여기가 무슨 민주주의 사회인 줄 알아?
몇 년 전이었다. 회사의 업무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상대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얘기한다. 요약하자면, 과제는 해당 과제 책임자의 의사 결정으로 추진되는데, 전혀 외부인인 우리가 의사결정에 개입하여 관리를 하겠다는 거였다. 이는 개별 조직의 역할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업무 영역을 침범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여기가 무슨 민주주의 사회인 줄 알아?"라며 소리를 친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위에서 시킨 일이라 거부할 수 없다는 논리를 더하면서 말이다. 이런 상황은 현실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상위자의 지시사항을 거부할 수 없는 조직에서, 협상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장면 둘 : 난 그냥 네가 싫어.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조직에 새로 부임한 부서장은 개발 과제에 종속되어 운영되던 조직을, 제품이 사용되는 실제 환경을 고려한 새로운 형태의 콘셉트 발굴을 통해 주도하는 식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이런 때, '변화를 주도해야 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고, 단순하게 취지에 동의했던 '초짜 박사'인 나는 의욕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도 기존의 체제는 강력하게 저항했고,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수도 없이 부딪혀야 했다. 꾸역꾸역 일을 해내기는 했지만,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모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때, 다른 부서의 고참 그룹장이 대놓고 얘기한다, '네 말이 아무리 옳아도 네가 하면 무조건 싫다'라고. 그때 나는, 그 그룹장에게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라'라고 얘기했어야 했나?

장면 셋 : 우리 언젠가 '안티-브레인스토밍' 책이나 하나 쓰자!
팀원들과 함께 조직의 구성원들을 불러 모아 '아이디어 발상회'를 여러 차례 진행해야 할 때가 있었다. 한 번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사전 검토를 거쳐, 가장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브레인스토밍'을 적용해 본 적이 있었는데, 30분도 되지 않아 난장판이 되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누군가가 던진 아이디어를 비판하기 바빴고, 그 일이 왜 안되는지를 설명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결국, 회의는 더 뜨거워지기 전에 끝이 보였고, 남은 팀원들과 회의를 정리하며 브레인스토밍의 개념을 전복시킨 '안티-브레인스토밍' 예찬론을 펼쳤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회의는 불가능하다면서 말이다.

자, 어떤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 보았을 상황이 아닌가? 게다가, 요즘 개점휴업 상태인 국회를 보면,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은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뭐든 다 싫다'라고 우기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인다.

그들이 '바트나 BATNA'나 '피셔 교수의 협상론'을 몰라서 저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과연 어떤 식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까? '협상' 이전에 제대로 된 대화와 타협은 가능한 것일까?
 
"이렇게 한국인이 협상에 약한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문화가 필요하다. 상대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인정하는 상호 존중의 문화 말이다. 언어는 문화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이 '다르다' 대신 '틀리다'를 사용하는데, 이는 나와 다른 생각은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고는 '모 아니면 도'라는 흑백논리에서 비롯된다." - p.182

"아, 요즘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정신없어 죽겠어."

2006년쯤 되었나 보다. 오랜만에 시골집에 내려갔더니, 담배를 태우시던 아빠가 한숨을 쉬며 한 마디 하신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면서 세상에 대한 수많은 요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던 때였다.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바뀔 것이라 기대했던 것들은 지지부진했고, 2008년 금융위기를 앞두고 경제는 악화의 징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원했던 변화의 미래는 불투명한데 생활마저 팍팍해지는 현실이었으니, 여기저기서 원성이 빗발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그런 나라가 '이상하다'라고 느끼셨던 거다. 그런데, 요즘의 대한민국을 보면서도 그런 불만을 표출하는 분들을 종종 발견한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지금 잘못가는 것인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들이 서있는 위치에 따라 이해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끄럽다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뜻을 모아 정리하는' 것이다.

더 나쁜 현실은, 흑과 백의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나눈 채 그 안에 모든 의견들을 가두는 '조용한 세상'이라고 믿는다. 지금의 나는, 아빠의 한숨에 소리 없이 동조하던 2006년의 나와는 분명히 다르다. 다만, 2019년의 우리라면 '소란스러움'을 '생산적인 대화와 타협'으로 바꿔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지금껏 20년 가까이 현장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치지 못했다. 하지만, 도망치지 못한 덕분에 나는, 실제 현장의 문제가 어떻게 하면 풀릴 수 있는지를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책에 쓰인 예제를 들고 나오기만 해서는 현장에서 비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지만, 예제를 바탕으로 현장의 수많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것 (경청)은 모든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예제의 상황과 어떻게 다르고 어떤 면에서 유사한지를 논의 (대화) 하고, 결과적으로는 실제 현장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선택 (타협) 하는 것이 해결의 과정이었다. 이렇게 나는 20년을 이곳에서 버텼고, 어쩌면 '나름대로의 협상'을 통해 성장했다.
 
"장기적 협상과 일회성 협상은 결과가 확연히 다르다. 인생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따라서 꼼수 협상보다는 원칙 중심의 협상이 인생의 성공에 도움이 된다." - p.41

이쯤에서 저자에게 사과를 해야겠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교과서만으로는 현장의 문제를 풀 수 없다'라며 투덜거렸지만, 우리는 '교과서 안 예제'를 기반으로 현실의 협상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민주주의가 단지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뜻을 담아내는 '품이 넓은 그릇'임을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모두가 존중받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후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재산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것이 협상의 시작이다.

책정보 : <대통령의 협상_노무현과 문재인, 무엇으로 마음을 움직이는가> 조기숙 지음, 위즈덤하우스

대통령의 협상 - 노무현과 문재인, 무엇으로 마음을 움직이는가

조기숙 (지은이), 위즈덤하우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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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