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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월, 우리 가족이 일주일 동안 머문 네덜란드 인상기다. 짧은 여행이라 영혼을 깨우는 깊은 통찰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무뎌진 감각을 꼬집어 잠자는 감성 정도는 일깨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씁니다. - 기자말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뉴스가 있다. 기억도 가물한데(아마 90년대 초 쯤?), 홈리스들이 빈집에 들어가 살면서 퇴거에 불응하는 바람에 국가가 집주인들과 협상해서(중재가 아니다) 새로운 용처가 생길 때까지 노숙자들이 빈집에서 거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는 외신 기사였다.

이를 '빈집점거운동', 스쿼팅(squatting)이라고 한다.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스쿼팅을 검색하니 온통 스쿼트 운동과 관련된 것뿐이다. 사회학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스쿼팅 운동이 우리 인터넷 생태계에선 전혀 무가치하게 취급되고 있어 씁쓸했다.

당시 나는 집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만한 입장이 아니었고 그런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민감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기사가 나의 뇌리 속에 남은 것은 네덜란드 사회의 대응방식이 이 땅에서 처리하는 방식과 많은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적어도 생존권이 재산권보다 우선시 되는 사회구나'라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 사회는 국민소득 일만 불을 돌파하며 욕망의 기관차가 한창 가속도를 올릴 때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내 욕망의 레일 위에서 타인의 생존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우선멈춤 신호일 뿐, 재빨리 통과해 버려야 하는 것이 속도전의 미덕이었다. 욕망의 기관차는 소유를 엔진으로 장착할 때 출력이 가장 높은 법이다.

그 후에도 네덜란드하면, 낙태, 동성애 결혼, 마약 유통, 성매매, 안락사 등이 합법화된 사회라는 키워드로 정리되었고, 자유와 관용이 우리가 사는 별에서 가장 폭넓게 보장 되는 국가로 각인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이런 이슈들이 왜 네덜란드에서는 별다른 사회적 비용을 치르지도 않고 허용되는 것일까? 네덜란드라는 사회는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으로 관용을 베풀 만한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일까. 과연 네덜란드 사회는 성숙한 사회일까. 여행을 앞두고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물론 지나가는 자의 힐끗거리는 시선으로 제대로 알 순 없지만 그래도 매의 눈으로 째려보면 사소한 일면이라도 낚아챌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의 선입견이 아닐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며 욕망이 충돌하는 곳이고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곳인데, 과연 듣던 대로 관용이 강물처럼 넘치는 곳일까.

사회적 갈등을 진짜로 성숙하고 세련되게 조정하고 해결하는 사회일까. 이런 사실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적진에 투하하는 대원처럼 마음의 무장을 하고 스킵홀 공항을 나섰다.

란스타드(Ranstad)는 네덜란드 중서부 지역으로 암스테르담, 댄 헤그(헤이그), 로테르담, 유트레이트 등의 대도시를 연결하는 메트로폴리스를 일컫는다. 유럽에서 두 번 째로 큰 항구(로테르담)가 있고, 세 번째로 붐비는 공항(암스테르담)이 있으며 인구는 820만으로 유럽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란스타드는 철도가 주요 교통수단인데 암스테르담에서 로테르담까지는 기차 종류에 따라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암스테르담-로테르담 구간이 이용객들이 가장 많고 주요한 도시들이 이 라인을 따라 형성돼 있다. 암스테르담-하를렘-레이덴-댄 헤그-델프트-로테르담. 나름대로의 개성과 역사성이 있고, 이에 기반한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도시들이다.

네덜란드인들 사이에 "돈을 벌려면 로테르담으로 가고, 권력을 가지려면 댄 헤그로 가고, 자유를 누리려면 암스테르담으로 가라"는 속담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로테르담 사람은 돈을 벌지만, 댄 헤그 사람은 돈을 세고, 암스테르담 사람은 돈을 쓴다"라는 경구도 있다.

각각 경제ㆍ정치ㆍ문화의 중심지를 가리키는 비유다. 속담과 경구가 말해주듯 란스타드 지역에 네덜란드의 국가 자원이 전부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이 지역을 옛날엔 홀랜드라고 불렀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 지도
 네덜란드 지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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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을 경유하는 여행객들이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교외를 둘러볼 여유가 있다면 대개 풍차 마을로 유명한 잔세스칸스를 방문한다. 네덜란드의 전원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진 곳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의 시간을 로테르담으로 결정했다.

잔세스칸스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나에겐 관광객들에게 보이기 위한 관상용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울타리 없는 테마파크, 이것이 잔세스칸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다. 그렇다면 로테르담은? 그 이유는 백 가지 쯤 되지만 차츰 이야기하기로 하자.
 
잔세스칸스 풍차
▲ 잔세스칸스 풍차. 블로그 캡처 잔세스칸스 풍차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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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도 표를 끊나요? 

로테르담에 가기 위해선 도시철도(인터시티, 스프린터)를 타야 한다. 도시철도는 통근열차 개념으로 운행되고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다. 우리 가족은 오전 8시경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갔다. 중앙역은 외관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규모도 웅장했다. 가히 네덜란드의 심장이라 할 만했다.

도시철도 매표소로 찾아가니 그곳에는 유로스타 같은 국제선 창구도 같이 있다. 파리 행. 바르셀로나 행, 베를린 행, 모스크바 행. 철도에 관한 한 상상력이 막혀 있는 나로선 국제선 매표창구를 보니 생소하면서도 색다른 감회가 솟는다. 우리는 무인발매 기계에서 표를 끊으려고 했으나, 네덜란드의 철도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해 결국 창구로 갔다.

"로테르담 왕복 3장."
"일인당 32 유로."


석 장 하면 십이삼만 원, 더럽게 비싸네.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가격이나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중간에 댄 헤그에 들렀다가, 다시 로테르담 표를 끊으면 얼마냐니까. 똑같이 32유로란다. 에잉? 그럼 레이덴, 댄 헤그에 들르면 얼마냐니까, 역시 32유로. 뭐야? "원데이 패스?" 하니까 아니라고 한다.

암스테르담을 기점으로 표를 끊은 도시까지만 제한 없이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댄 헤그까지 표를 사면 로테르담은 못가지만 그전에 있는 도시들은 언제든지 타고 내릴 수 있다. 그런즉, 로테르담까지 끊으면 실질적으로 당일권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계산을 하려고 현금을 꺼내니 카드를 달란다. 네덜란드는 웬만한 결제는 거의 다 카드를 사용한다. 미술관이나 버스 티켓 등 공공기관 결제는 아예 현금을 받지 않는다.

여권을 달라기에(왜 여권이 필요한지 의문이 들었으나 따지지는 않았다) 여권을 제시하고 결제를 기다리며 옆 창구를 보니 웬 아주머니가 반려견을 데리고 표를 사는데 두 장을 끊는다. 오잉? 개도 표를 끊나? 표를 받으며 창구 판매원에게 물어보았다.

"펫(pet)도 표를 사야 하나요?"
"(당연한 거 아녀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예쓰."


나는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이며 "쌩큐!' 하면서 나왔다. 그러면 개도 똑같이 사람 앉는 좌석에 앉는 건가? 그것까진 확인하진 못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이 티켓으로 오늘 하루는 맘껏 타고 내릴 수 있다 이거지. 갑자기 본전 생각이 들었다.

로테르담에만 들르기 아까우니 다른 도시들도 들리자. 하를렘, 레이덴, 댄 헤그, 델프트. 이 중 어디를 고를까… 아, 초이스의 괴로움. 일단 가면서 마음 내키는 데서 내리자고 마음 먹었다.

태그:#PERDIX, #홀랜드 인문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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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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