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에서 문광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영화 <기생충>에서 문광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윌엔터테인먼트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이후 국내에서도 <기생충>이 흥행하며 숨겨져 있던 배우들의 이야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극 중 박 사장(이선균)의 집사이자 이야기 반전을 위한 주요 캐릭터였던 문광(이정은) 역시 그중 하나였다. 영화에서 문광은 자수성가 한 박 사장 네 식구보다 훨씬 전부터 저택을 지켜온 터줏대감 같은 존재.

'이제 좀 속이 시원하겠다'라는 질문에 이정은은 "사실 제 인터뷰보다 박명훈씨(문광의 남편, 근세 역을 맡았다)가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게 돼서 즐겁다"라며 "촬영이 끝난 뒤 근세에 대한 애틋함이 더 올라오더라. 가족이 그런 것 같다"라는 배려의 말로 운을 뗐다. 

봉준호 감독의 추억

1991년 연극 <한 여름밤의 꿈> 이후 근 30년 가까이 경력을 쌓아오고 있는 이정은은 그 내공뿐 아니라 동료 배우와 작업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봉준호 감독과는 <마더>(2009) 때부터 연이 닿았고, 봉 감독의 전작 <옥자>에선 유전자 변형 돼지 옥자의 목소리를 연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광 역을 앞두고 봉준호 감독은 이정은 특유의 목소리를 꺾는 독특한 억양을 강조해 줄 것을 주문했다는 후문이다.

"<마더> 때 최세연 의상디자이너께 오디션을 보라는 말을 들었다. 제가 봉 감독님 영화에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전부터 <플란다스의 개> 단편 <지리멸렬>의 팬이었거든.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연극에 집중하느라) 영화 등 다른 매체 연기를 피하던 때였다. 이 정도 했으니 영화 오디션을 볼까 싶어 갔는데 된 거지. 너무 작업이 재밌더라. 이후 제 연극 <빨래> 때 봉 감독님과 원빈씨가 같이 오셨더라. 감독님이 기립 박수를 치고 계시더라(웃음). 그리고 서로 개인적 연락은 없었다. 

이후 몇 년 만에 연락주셔서 <옥자>라는 영화를 준비하는데 옥자를 할 수 있겠냐더라. '아, 주인공이네요?' 내가 이랬다. 미국을 여행하는 한 여자 이야기라고만 알았지, 여자 돼진 줄은 몰랐던 거지(웃음). <옥자> 시사 이후 뒤풀이에서 내년 스케줄을 비워달라는 얘길 제 옆에 앉은 분에게 하셨더라. 매니저가 아닌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감독님이었거든. 절 다른 사람으로 오해하셨나 생각하고 잊고 지냈는데 최세연님 통해 연락이 왔다. 시간 비워야 한다고, 그래서 급히 조정해서 참여하게 됐다."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단 한 장의 콘티가 도착했다. 지하실 비밀 문을 괴이한 동작으로 밀고 있는 문광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크크크, 재밌고 괴이한 걸 같이 해봅시다." 이게 봉준호 감독이 이정은에게 참여를 독려하며 한 최초의 말이었다. "사회생활하면서 양극화 현상을 봐오잖나. 상대적 박탈감도 느끼고. 그 어렵고 철학적인 문제를 소동극으로 만드셨더라"라며 "되게 흥미로워서 여러 번을 읽었다. 보면서 둔기로 한 대 맞는 느낌이 들었다"고 촬영 직전 당시를 회상했다. 

문광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감독이 언급한 '괴이함'이 문광이라는 이름 자체에 녹아 있다고 이정은은 해석했다. 영화에서도 기택(송강호) 가족에 의해 저택에서 쫓겨난 문광이 비오는 날 상처 입은 모습으로 괴이한 기운을 풍기며 등장한다. "최대한 겸손하고 예의 있는 모습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공포감이 든다는 걸 영화를 보고서 알았다"며 그는 "사실 제가 귀염상이라 감독님에게 무서운 분위기가 살까요 물었는데 분장이 있다고 하시더라"고 가장 중요했던 촬영 순간을 재치 있게 전했다.
 
 영화 <기생충> 속 문광의 모습.

영화 <기생충> 속 문광의 모습. ⓒ CJ ENM

  
 영화 <기생충> 속 문광의 모습.

영화 <기생충> 속 문광의 모습. ⓒ CJ ENM

 
이정은의 진가 

그렇게 이정은은 극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액션, 그리고 북한 여성 앵커 성대모사 등을 소화했다. 한 배우에게 이렇게 다양한 기술과 포인트 연기가 요구된 건 그만큼 그의 내공이 탄탄했기에 가능한 것. 앞서 김윤석 감독의 <미성년>에서 그는 한 어촌 마을에서 주인공을 상대로 삥을 뜯는 정체불명의 주민으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나 싶었는데 그는 "그런 점도 있겠지만, 북한말은 유튜브 등을 보며 연습했다"라고 말했다. 

"감독님이 제가 리춘희 앵커와 닮았다고 말씀하셨다. 시국이 변할 때마다 그 분의 방송 영상을 제게 보내주셨다(웃음). 틈나는 대로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을 빼고 찌우는 만큼 언어나 방언 또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박명훈씨와는 이미 2005년 <라이러>라는 작품으로 만난 적이 있다. 영화에서 근세도 괴이하게 나오지만 문광 입장에선 가정이 망한 걸 두고 남편 탓을 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개인의) 무능력 때문에 망하기도 하지만 제도나 사회구조가 그걸 조장하기도 하잖나. 

살면서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기생하며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문광은 그저 남궁현자(박 사장의 저택을 지은 인물)를 존경하며 남편과 잘 살 궁리를 하며 지내는 것이지. 명훈씨를 감독님이 매우 좋아하셨다. 제게도 '키가 작은 장동건'이라고 계속 주입하셨다. 그러니 정말 잘 생겨보이더라(웃음). 실제로 되게 선이 착한 사람이다. 현장에서 벽에 묶여서 우는 근세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많이 생각난다."


올해로 50. 서른 편이 넘는 영화에서 그는 단역, 조연을 해왔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미 연극무대에선 잔뼈가 굵다. 무대 조연출로 경험을 쌓으며 2002년 경엔 자신의 돈을 투자해 연극 연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마트 판매원 등 생업 전선에 뛰어 들기도 했다. 도중에 건강이 잠시 안 좋아지기도 했다. 2000년 이후 몇 년 동안 작품 활동이 끊긴 이유다.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 그리고 생활이 어려웠을 때 1년 반 마트 일을 한 적이 있다. 또 연기 수업도 했었다. 근데 이런 게 성에 안 차더라. 뭔가 갈증이 나는데 원인은 모르겠어서 노동하는 걸로 그걸 잊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마트를 찾아온 선배들이 '연기 안 하고 뭐하냐'고 (하더라). 그러다 2004년 무렵 다시 무대에 선 것이다. 제가 야채를 팔고 있었는데 그때 사장님께 죄송하다. 야채를 팔다가 그대로 도망갔거든. 마치 제 인생이 장사꾼이 될 것만 같았다. 사장님께서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했었다. 제가 되게 잘 팔긴 했다. 마치 머신처럼 일했거든."

작지만 강렬한 캐릭터로도 호평받는 요즘을 두고 이정은은 "좋은 시대를 만난 것 같다"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여성 배우 입장에선 물론 더 다양한 역할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는 "조연이라도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돕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캐릭터가 나오면서 저 역시 혜택을 입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문광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명훈씨를 감독님이 매우 좋아하셨다. 제게도 '키가 작은 장동건'이라고 계속 주입하셨다. 그러니 정말 잘 생겨보이더라(웃음)." ⓒ 윌엔터테인먼트

 
"그런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면 저도 필모가 다양하게 쌓일 수 있겠지. 근데 이건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되는 건 아니다. 제가 그런 역할에 목숨 걸어도 될 게 아니고. 바로 옆집 이웃만 봐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잖나. 배우로선 그 다양성을 포착하는 힘을 잘 키우면 된다. 나머진 창작자의 몫이지. 어떤 역할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런 건 없다. 제겐 그저 어떤 이야기 안에서 어떤 인물을 만들어 나갈 것이냐가 중요하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딱 다가와야 하거든. 그것이 담겨 있다면 문광 역할 뿐만 아니라 개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엔 경험에서 우러나기 쉬운 캐릭터가 많았다면 이젠 상상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광도 그랬고. 그럼 우린 어떤 노선을 택해야 하나. 과장인가 현실성인가. 친한 동생인 이희준은 촬영 전 직접 현장으로 간다더라. 저도 그런 스타일이다. <미성년> 때 준비하는 과정에서 방파제로 일단 달려갔다. 이런 갈증이 있으면 뭐 하나는 건지게 되더라. 경험해보지 못한 역할이면 벽에 머리라도 박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해결될 때도 있더라. 많이 듣고 충분히 시도해보라고 후배들에게 말하곤 한다. 제게도 역시 연기는 한 해 한 해 갈수록 어렵거든."


"연기하라는 사람이 있었으면 오히려 안 했을 것." 이정은은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연극 연출도, 마트 아르바이트도 모두 그의 선택이었다. 돌고 돌아 그는 다시 배우의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 이 뚝심의 비결은 바로 스스로 원하는 것을 파고 들다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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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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