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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로 편성한 인민군 탱크부대 사열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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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11. 미 공군 B-29 전투기들이 인민군 진지에 무차별로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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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소년이 체험한 6․25 한국전쟁
2019년 6월 25일은 6․25 한국전쟁 69돌 기념일이다. 3년 남짓한 전쟁기간 중 사상자는 피아 550여만 명이라고 한다. 부모 자식 형제 간 생가지 찢기듯 헤어진 이산가족은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가히 그 전쟁의 참혹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전후 세대도 짐작이 갈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던 그해 나는 여섯 살 소년으로 비교적 기억이 뚜렷하다. 내 고향은 경북 구미로 바로 다부동전투 배후지였다. 그해 7월 하순쯤인데 어느 날 갑자기 구미 북향인 아포 쪽에서 쿵쿵 대포소리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면서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우리 집 앞길을 메웠다.
그때 대한민국 정부는 전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서울시민뿐 아니라 기타 지역 사람들도 인민군이 점령한 뒤에야 피란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우리 가족들은 소달구지에 가재도구를 싣고, 또 어른들은 옷가지나 기타 살림도구를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지고 피란을 떠났다. 뙤약볕 속에 걸어서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낙동강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인민군들이 길을 가로 막고서는 더 이상 남하를 막았다.
"남조선 인민들, 돌아 가라우!"
그 말에 피란민들은 모두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때 구미 광평 들판을 지나는데 미 공군 전투기들의 공습이 있었다. 그래서 가까운 사과밭으로 뛰어든 뒤 어른(남정네)들은 사과나무에 매미처럼 달라붙었고, 여자들이나 어린 아이들은 사과 그루터기 사이 콩밭에 머리를 처박고 몸을 숨겼다.
그때 맹랑한 소년이었던 나는 그 공습의 무서움도 모른 채 미 공군 제트기가 쏟는 폭탄이 마치 불꽃놀이처럼 신기하여 고개를 쳐 들었다.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뒤통수를 쥐어박히는 꾸중을 들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삼삼하다.
NARA에서 만난 한국전쟁 이미지들
2004년 2월, 나는 여러 누리꾼의 도움으로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 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갔다. 거기 5층 사진 자료실에서 'Korean War'(한국전쟁)라는 앨범을 대출 받아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그 시절의 참상들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동포자원봉사자에게 도움을 받아 그의 스캐너를 빌려 1차로 500여 점의 사진을 수집해 왔고, 이후 세 차례 더 미국에 가서 총 2000여 점의 한국전쟁 자료를 입수해왔다. 이를 통해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3>, <한국전쟁 · Ⅱ>, <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의 사진집 및 포토에세이집을 펴낸 바 있다.
왜 이런 끔찍한 6․25 한국전쟁이 한반도에 일어났으며, 왜 남북의 우리 겨레들은 동족을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살육을 해야만 했던가. 6․25 한국전쟁 69주년을 맞이하는 이즈음에는 냉정히 그 전쟁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생각해 보고, 아울러 그런 전쟁이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고교시절 최아무개 선생은 별명이 '깡패'로 학생들의 폭군이었다. 최 선생은 수업시간이면 길다란 대걸레 막대기를 들고 들어와 교단을 내리치면서 공포감을 조성했다. 그런 뒤 온갖 트집으로 학생들을 불러낸 뒤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힘에 부치면 학생들을 복수로 불러낸 뒤 서로 뺨을 치게 했다.
교단 앞으로 불려나온 친구들은 처음에는 상대 친구를 슬쩍 슬쩍 쳤다. 그러면 그 최 선생은 손목의 시계를 푼 뒤 "뭐, 이 새끼들 장난하고 있어! 야, 이렇게 치란 말이야"하고는 한 학생의 뺨을 갈겼다.
그러면 두 학생은 그제부터 서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상대 학생의 뺨을 쳤다. 마침내 한 학생이 쓰러지거나 코피라도 쏟아야 최 선생의 체벌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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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25.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들길에 나뒹굴고 있는 피란 시신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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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9. 29.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 암매장된 현장을 파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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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 돼야
나는 6․25 한국전쟁이 생각나면 그 최 선생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시간 교단 앞으로 불려간 학생은 북의 인민군이고, 남의 국군으로 연상된다. 국군과 인민군은 그 최 선생의 폭압에 서로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갈기는 것처럼 서로 상대방을 살상했다. 최 선생은 두 학생이 코피가 터지면 싸움질을 중단시켰다.
최 선생은 수업을 하다가 또 성질이 나면 학생을 불러내 서로 뺨을 치게 했다.강대국은 한반도에서 무기가 잘 팔리지 않으면 또 분쟁거리를 만들었다. 마치 최 선생이 심심하면 학생들을 불러내어 서로 뺨을 치게 하는 것처럼.
6․25 한국전쟁 69돌을 맞으면서 우리 남과 북의 학생들은 이제라도 그 최 선생에게 "당신이 뭔데 그런 고약한 싸움을 조장하여 서로 치게 하느냐?"고 항의도 하고, 이제는 제발 그런 야비한 짓으로 무기장사하며 돈벌이 하지 말라고 따지는 백성이 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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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9. 27. 진주하는 군인에 따라 각기 다른 깃발을 들고 환영하는 흰옷입은 불쌍한 백성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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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우리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최 선생과 같은 이들에게 환호의 깃발을 휘두르며 찬가를 부르고 있다. 나는 고교 졸업 후 대학 캠퍼스에서 그 최 선생이 교사에서 교수로 신분이 바뀐 것을 목격했다. 나는 너무나 황당하여 눈을 껌벅이고 다시 바라봤는데 분명 최 교수였고, 그는 나를 향해 겸연쩍게 싱긋 웃었다. 그게 분단 한반도의 지난날 자화상이었다.
아마 최 선생이 그새 저 세상에 갔다면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묻혀 있거나, 곧 묻히게 될 것이다. 그것도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우린 그런 야만의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는지. 6․25 한국전쟁 69돌을 맞아 지난 전쟁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여전히 남의 나라 국기를 흔드는 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뺨을 맞고 코피를 흘려야 제 정신으로 돌아올까. 최 교수의 시니컬한 웃음이 "한국인은 그저 매 맞고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나를 슬프고 우울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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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10. 진주, 학살 현장으로 시신들을 굴비 엮듯이 뉘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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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구미가 사랑하는 작가 - 구미출신 작가 박도를 만나다!
일시 : 2019. 6. 28.(금) 오후 7시 30분
장소 : 구미 삼일문고 대강연장 (구미시 금오시장로 6. 054-453-0031)
참가비 : 무료
후원 : 구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