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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6월 15일 오후 창원마산 3.15아트센터에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교사워크숍"을 열면서, 고호석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와 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 우무석 천주교 마산교구 가톨릭문인회장을 초청해 '부마항쟁 주역과의 대화'를 가졌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6월 15일 오후 창원마산 3.15아트센터에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교사워크숍"을 열면서, 고호석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와 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 우무석 천주교 마산교구 가톨릭문인회장을 초청해 "부마항쟁 주역과의 대화"를 가졌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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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의 주역들은 '박정희 트라우마'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공동의 기억'을 다짐했다. 6월 15일 오후 창원마산 3‧15아트센터에서 "부마민주항쟁과 민주주의 교사학교-부마항쟁 주역과의 대화"가 열려 관심을 모았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사장 송기인)이 교사워크숍을 열었고, 고호석 부마재단 상임이사와 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우무석 시인(천주교 마산교구 가톨릭문인회장)이 "교사가 묻고, 부마청년이 답하다"는 제목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경남대 학생이었던 최갑순(63) 회장은 부마항쟁 참여로 1979년 10~12월 사이 투옥되었고, 이후 경남여성회장과 성폭력가족상담소장을 지냈다.

최 회장은 경남대에 다닐 때 친구인 옥정애씨 등과 부마항쟁에 나섰다. 부마항쟁 때 마산 거리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상황을 설명한 그는 경찰에 잡혀 성추행과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마산시내에 있는 3‧15의거탑 앞에서 학생들이 모이기로 했는데, 제가 일찍 도착해서 보니 학생들이 없었다. 좀 있으니 산복도로 쪽에서 학생들이 오고 있다고 했다. 학생 몇 명이 대오를 맞이하러 가자고 해서 '몽고정' 쪽으로 갔다.

가다가 옥정애를 만났다. 대오를 정비하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머리채를 잡았고, 욕설도 했다. 경찰이었다. 그 때 옥정애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저는 바바리를 입고 있었다. 옥정애의 바지가 찢어지는 순간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여학생들이 경찰에 붙잡히자 남학생들이 빼내려고 했다. 최 회장은 "우리는 '사람 살려' 하면서 드러누워 버렸다. 뒤에 우무석 시인한테 이야기를 들으니까 남학생들이 우리를 빼내려고 했다고 하더라"고 했다.

"저는 그 과정에서 바바리가 벗겨졌다. 얼굴을 숨기려고 원피스로 가렸는데, 속옷이 다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끌려가며 피를 엄청 흘렸다."

최 회장은 "그해 10월 19일이 되니까 나중에 끌려온 사람들이 많았고, 밤이 되니까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 마산경찰서 유치장에 500명 정도는 있었다. 얼마나 많았으면 서서 오줌을 쌌다는 증언도 있었으니까"라고 기억했다.

이어 "당시 경찰도 잡혀온 시위대한테 화풀이를 했던 것 같다. 지옥이 있다면 아마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경찰은 눈만 마주치면 때리고 밟았으며, 여학생의 몸을 더듬었다. 고문도 엄청 당했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은 그 때 하혈도 했다고 했다.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줄 알았다. 남편을 만났는데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 기뻤다. 비혼모가 되기 싫어 곧바로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동장, 반장까지 나를 따라 다니는 것 같았고, 살기가 힘들었다. 부산에서 살다가 마산으로 왔다"고 했다.

"부림시장 아주머니들이 시위 학생 숨겨줘"

여성운동에 뛰어든 그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경상도 땅에서 박정희 반대를 하며 사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부마항쟁 당시 마산 부림시장 아주머니들도 시위 학생들을 숨겨주고 물을 주며 동조했다. 90%가 넘는 시민들이 박정희 반대였다고 본다. 그런데 그해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 그 때 어머니는 '이제 갑순이 살았네'라고 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저는 김재규가 고맙지 않았다. 지방에서 그것도 저 같이 유명하지 않은 사람도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박정희가 싫었는데, 박정희는 이승만 하야보다 더한 상황으로 해서 내려왔을 것인데, 김재규가 죽이는 바람에 박정희 장례가 국민들이 '우는 분위기'로 간 것이다."

  
 최갑순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최갑순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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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회장의 아픔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될 무렵에도 계속 되었다. 그는 꿈 이야기를 했다.

"박정희 딸인 박근혜가 대선 경선에서 될 무렵에, 제가 밤에 꿈을 꾸었다. 박정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대통령이 되면 니한테 복수할거야'라고 했다. 그 무렵 제가 좋아했던 사람이 박근혜를 끌어안는 장면의 사진을 보고, 육교에서 그를 만나 '내 원수인 박근혜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육교에서 밀어버리는 꿈이었다."

여성운동할 때 그는 "당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약을 먹어 가며 버텼다"고 했다. 그는 성폭력과 양성평등 강사 활동을 할 때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교육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강사 약력을 내야 했다. 부마항쟁 관련 약력은 빼달라고 하더라. 저한테서 '부마'는 감춰야 했다. 그것이 너무 힘들었다. 여성인권운동 하면서 끼니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성매매 하는 여성의 마음을 알며, 아이들 키울 때 과외도 하지 않고 선생님들한테 촌지 한번 주지 않으면서 정의롭게 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제가 잘못되면 부마가 엉망이 될 거 같아 정신과 다니며 약 먹으면서 버텼다."

최갑순 회장은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근혜 언니 들으세요'라며 기자회견을 열었던 적이 있다. 저는 그 때 울면서 호소했다. 당신은 퍼스트 레이디로 살았지, 한번도 여성으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여성 대표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느냐고 했다"며 "부마는 저를 힘들게 했지만, 그나마 저도 처절하게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고호석 "군부독재 종식 시발점"... 우무석 "집단화된 공동의 기억"

부마항쟁 때 부산대 4학년이었던 고호석 이사는 "저한테 부마항쟁 주역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다"며 "당시 후배들과 단순 가담을 하고 시위대열에 있었으나 선봉에 있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일부에서는 '폭력시위'라고 하는데, 폭력이 행사된 곳은 전부 방송국과 경찰서, 동사무소였다. 그 곳에 대한 개념이 요즘과 달랐다. 당시는 국민들을 혹세무민하던 언론, 정말 국민을 탄압하는 최일선 기관들이었다"며 "그 이외에 어떤 가게도 화염병이나 돌을 맞지 않았고, 물건 도난 사건도 나지 않았다"고 했다.

고호석 이사는 "부마는 대한민국에 군부독재가 들어서고 19년만에 처음 일어난 시민항쟁이다. 이것이 그 자체로서 군부독재를 끝내지는 못했지만 그 정신이 광주로 이어지고, 거기서 못 이룬 피해의 상처를 안고 7년 숙성 과정을 거쳐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부마항쟁은 지역 한 구석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 운동사에서 군부독재 정권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첫 시발점에 불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6월 15일 오후 창원마산 3.15아트센터에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교사워크숍"을 열면서, 고호석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와 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 우무석 천주교 마산교구 가톨릭문인회장을 초청해 '부마항쟁 주역과의 대화'를 가졌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은 6월 15일 오후 창원마산 3.15아트센터에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 교사워크숍"을 열면서, 고호석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와 최갑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 우무석 천주교 마산교구 가톨릭문인회장을 초청해 "부마항쟁 주역과의 대화"를 가졌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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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남대 학보사 기자였던 우무석 시인은 "경남대에서 시위가 있을 거라는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1979년 10월 18일 터질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멍하는 순간에 영화처럼 흘러갔던 것 같다"며 "요행히 제가 지나간 자리만큼은 경찰이 없었다. 제가 크게 주역이 된 거 같다는 생각은 현재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부마항쟁을 담은 시집 <10월의 구름들>을 펴내기도 한 그는 "부마를 집단 기억으로 남아 있다. 부산과 마산의 학생과 시민들이 가진 집단 기억을 우리나라 전체 사람들, 자라는 미래 세대에 공동의 기억으로 만드는 게 내 일이라 생각해서 시집을 냈다"고 했다.

"향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같은 행동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우무석 시인은 "사람은 시간 속에서 소멸해 가는 게 있다. 이는 젊고 늙음의 문제가 아니라 올바름의 문제다. 개인은 비겁해 질 수 있지만, 집단화된 공동 기억이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전부 다 싸울 것 같다"고 했다.

부마재단은 15~16일에 걸쳐 남재우 창원대 교수(부마민주항쟁과 지역사 교육, 기억과 기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부마항쟁-똘마니들, 역사의 주인이 되다), 최신호 강사(증언 자료를 활용한 부마항쟁 수업), 차경호 강사(영화로 배우는 국가 폭력의 역사) 등을 통해 교육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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