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1일 종영한 MBC <무한도전>

지난 2018년 3월 종영한 MBC <무한도전>. ⓒ MBC

  
<무한도전>이 인기 가도를 달릴 당시, 나는 약간 별난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재미있다는 <무한도전>을 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TV를 본래 썩 즐기지 않지만, <무한도전> 시청을 아예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무한도전>을 보자는 남편 제안으로 같이 보기는 했다. 재미가 없었다.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 남자 대여섯 명 나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게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게다 출연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들, 서로 험담하건 비난하거나, 서로를 속여먹는데 쾌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프로였다.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무한도전>을 보지 않았다. 물론 그 어떤 예능 방송도.

어쩌다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보려 하지 않아도, 맨 남성들만 죽 나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는 프로를 마주치게 되는데, 이런 부류가 예능(藝能)이란다. 예술적 능력인 예능이 어쩌다가 누가 더 비인격적이고 자극적인 말로 분위기를 제압하는가를 과시하는 무례로 전락한 것인가?
 
어이없는 예능엔 눈길도 주지 않던 내가, 예능을 꼭 봐야 할 일이 생겼다. 예능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을 모니터링하고, 그에 따른 분석으로 개선책을 내보자는 '고양파주민우회'의 제안 때문이었다. 청소년에게 유해한 텍스트가 어디 예능뿐 이겠는가만, 취지에 공감해 참여했다. 모니터링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예능 프로를 봐야 했다.
 
예능을 보는 새로운 방법

우선 시청률을 기본으로 청소년이 많이 시청하는 예능 프로를 선정했다. 모니터링 지표를 만들기 위해 우선 각자에게 배당된 예능 프로를 시청한 후, 토론해 보기로 했다. 내게 배당된 프로는 <라디오스타>였다. 그 지루하고 남루한 얘기를 60여 분 동안 꼼짝없이 봐야 했다. 인내의 시간이었다.

고양파주민우회는 본격적인 모니터링에 앞서 대중문화평론가인 황효진씨를 초대해 강의를 진행했다. 황효진씨는 <여자들은 먼저 미래로 간다>를 공저로 펴냈고, K-POP 콘텐츠 등 대중문화를 비평해왔다.

대중문화 비평가라고 타고난 DNA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TV 애청자였던 황효진 대중문화 비평가는 예능도 무척 좋아했다. 위 언급한 <무한도전>의 애청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공기처럼 흡입하던 예능 프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기점은 2015년이었다. 당시 큰 물의를 빚었던 장동민 등의 여성 비하 발언 이후, 자신의 대중문화 비평 관점을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난 19일 방영된 SBS <런닝맨>의 한 장면. 방송 9주년을 맞아 국내 팬미팅 개최를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지난 19일 방영된 SBS <런닝맨>의 한 장면. 방송 9주년을 맞아 국내 팬미팅 개최를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 SBS

 
'웃음'이란 본능적일까? 웃겨 '쿡'하고 웃음을 터뜨렸는데, 좀 이따 생각해보면 내 웃음이 누추해지곤 하는 때가 종종 있지 않던가? 웃겨서 웃긴 웃었는데 누군가의 외모 등을 비하하거나, 누군가의 약점이나 장애를 희화화하거나, 누군가의 성별이나 성적 지향을 혐오한 것이어서 웃고 난 뒷맛이 영 찜찜하던 경험 말이다.

황효진 대중문화 비평가는 자신의 이 '툭 튀어나오고 마는 웃음'을 점검해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내면화된 웃음 코드를 하루아침에 일소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일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일인가? 그녀는 웃을 때마다, '나는 잘 웃고 있는가'를 고민했다. 철저히 타자화된 웃음. 순간 웃고 휘발시켰지만, 대상화된 누군가에겐 분명 차별로 가득한 비하와 조롱과 혐오였을 웃음의 폭력을.

그렇다면 범람하는 불량 예능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처럼 TV랑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TV를 끊기란 쉽지 않을 터. 보되, 내 웃음을 점검할만한 장치를 마련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 각자 성 평등하고 다문화적인 렌즈를 장착해 보자.

그리 어렵지 않다. 황효진 대중문화 비평가가 제안하는 '예능을 보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나는 어떤 부분에서 무심코 웃고 있나, 외모 비하, 성차별, 인신공격, 범죄 희화화 등은 없나, 여성의 자리는 충분히 마련돼 있나, 예능 안에서 여성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품위 있는 웃음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웃음 규범은 가능하다

시청자가 매의 눈으로 발견해내는 부정의한 웃음의 지점은 보다 나은 예능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은 노력이 공유되면, 양질의 프로는 더욱 고양될 테고, 저급한 프로는 훨씬 개선될 것이다. 시청자의 성숙한 '미디어 리터러시'는 웃음의 기준을 바꿀 수 있다.

예능은 특히 청소년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다. 어려서부터 길드는 문화의 내면화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사람이 반드시 나빠서가 아니라 그럴 때 웃어도 된다는, 혹은 웃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은 때로 그 웃음에 동의하지 않아도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려보내게 하지 않던가?

다른 상징계와 마찬가지로 웃음에 대한 상징계 또한 사회화에 따른 결과다. 그렇기에 웃음의 기준을 다시 세운다면 잘 웃을 수 있다.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공동체의 질책을 받듯이 나쁜 웃음에 대한 따끔한 지적 또한 새로운 '웃음 규범'을 세울 수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을 차별, 조롱, 비하, 혐오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송은이-김신영-안영미-신봉선, '판벌려'야 사진찍혀! 코미디언 송은이, 김신영, 안영미, 신봉선이 4일 오후 서울 상암동 JTBC사옥에서 열린  JTBC2 신규 예능프로그램 <판벌려-이번 판은 한복판> 제작발표회에서 뉴스에 나오기 위해서는 막장을 보여줘야 된다며 옥신각신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판벌려-이번 판은 한복판>은 아이돌계 최초로 '장인 시스템'을 도입, 분야별 장인들에게 직접 원 포인트 레슨을 받은 후 '셀럽파이브'의 센터를 차지할 한 명을 뽑는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프로그램이다. 4일 화요일 오후 8

시 첫 방송.

코미디언 송은이, 김신영, 안영미, 신봉선이 출연하는 JTBC2 예능 <판벌려-이번 판은 한복판> 제작발표회 당시 모습. ⓒ 이정민

 
여성 예능인들에 대한 시청자의 관점도 되새김질해보자. 남성 예능인들이 거의 모든 예능 프로를 장악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나? 결혼이나 해야, 돌봄을 주제로 하는 프로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지 않던가? 게다, 여성 예능인에 대해서만 상대적으로 가혹하게 설정된 높은 윤리적 기준은 그들을 더욱 변방으로 내몰았다. 

잘 들어보면, 남성 예능인이 준범죄에 해당하거나 매우 비윤리적인 행동을 언급할 때조차 그럴 수도 있는 에피소드가 되어 공감되거나 격려받지만, 여성 예능인에겐 바로 퇴출의 이유가 되지 않던가? 시청자의 젠더 편향적 관점은 여성 예능인에게 좀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퇴출은 그리 간단한 말이 아니다. 생계가 끊기는 무시무시한 일이다.

별로 실효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제안을 던지고 싶다. '저급한 예능을 보이콧하자'고. 성인지적 다문화적 관점에 근거해 볼 가치가 없는 예능 프로라 판명될 시, 단지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낙후시킬 수 있지 않을까? 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잘 볼 권리'를 취하는 역설. 보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보는 않는 것은 권리고 따라서 개인적인 투쟁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예정
예믕프로의 문제점 성인지적 시청관점 성평등한 시청관점 미디어 리터러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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