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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의에서는 '2019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연속기고를 시작합니다. 대전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추억담을 독자들과 나누고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대전 동구 세천.
 대전 동구 세천.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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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야 떠오르는 게 많은 곳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들어가 이십 대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니 그럴 수밖에. 인생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은 그때나 오십대인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내가 죽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참으로 고단한 시절이었다(이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다). 대전시 여기저기 공사현장을 떠돌고(이런 사람들 나중에 이렇게 말하게 된다. '저거, 내가 지었어!') 인력시장, 이삿짐 센터 등을 전전했었으니까. 그나마 노동 강도가 덜했던 게 카페 주방장(억울하게도 그땐 바리스타라는 근사한 이름이 없었다)이었는데 대신 곰팡이가 잔뜩 핀 지하골방에서 자야했다. 그 외에는 산동네로 퇴근하여 얼른 소주를 들이붓는 게 날마다 되풀이 되는 모습이었다.

고생담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곳들의 공통점은 바짝 메마른 곳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나는 바다출신이라 메마른 곳에서는 영혼 단위에서 갈증을 느낀다. 마치 낚아놓은 붕어가 흙바닥에서 파닥거리듯 매순간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떠오르는 것은 많지만 대전에서의 딱 하나를 꼽아보라면 세천(細川)이다. 판암동 지나 옥천 가는 길 중간에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동네. 물안개가 피어나는 수원지 마을, 포도와 벚나무가 참으로 예쁘게도 서 있던 그 동네가 확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눈에 확 들어온 동네

나는 산동네 생활을 정리하고 월 3만 원 방을 얻어들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수원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습기를 마시고, 수면을 바라보며, 멀리 두고 온 고향 바다를 떠올리곤 했다. 내친김에 식장산 정상까지 다녀온 것도 숱했고 주인집 할머니 심부름으로 개를 끌고 가 개 도살장에서 잡아오기도 했다.

오래된 내 단편 <가던 새 본다>는 그 시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인할머니와 나는 각자 막걸리에 취한 채 감방에서 통방하듯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취해도 쉬 잠이 들지 않아서 더욱 그러했다. 그럴 때면 해방되던 해 일본에서 나오던 배에서 미국 폭격기에 놀라 우왕좌왕하던 사람들 발에 큰 딸이 밟혀죽었던 이야기나, 꽹과리 하나 들고 집을 나가 산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된 남편이 늘 등장을 했다.

대한민국 근대의 특징이 모두 들어간 삶을 살았던 할머니는 그 한(恨)이 바깥으로 기어 나온 탓에 몇 개의 인성이 차례대로 드러나는 것 같기만 했는데, 하긴 그 전에 그녀는 지극히 가난한 집의 딸이었고, 그 때문에 부자집의 아랫것이었고, 집을 찾아 도망을 친 가출녀였고, 풍물을 잘 치던 사내의 어린아내였던 것이다. 현재를 점령하고 있는 오래된 과거, 삶을 통제하고 있는 죽음을 나는 그녀에게서 보곤 했다(그녀는 사물놀이로 유명한 이의 큰엄마이기도 했다. 남사당패 패주 장자상속이 깨지는 바람에 남편은 낙담을 하였고 결국 죽음까지 이어졌다는 게 당시 들었던 내용이다). 

그런 경우 아니라도 할머니와 나는 죽이 잘 맞아서 수시로 술잔을 앞에 두었고 그녀의 친구들이 몰려왔을 때는 끌려가서 생판 얼굴도 모르는, 입 냄새가 심했던 늙은 여인네와 어중간한 자세로 부르스를 추기도 했다. 할머니가, 아, 한판 돌려줘, 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대전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순전히 세천마을과 막걸리, 그녀의 넋두리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디를 기억하는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이의 캐릭터 덕이다. 어떤 노래를 기억하는 것도 그 곡과 연관된 사람에 대한 추억 때문인 것처럼. 그러니 사실, 경치만으로는 이유가 약하다. 세상 아름다운 곳이 워낙 많은데다 그것은 그저 사진 속으로나 들어가 배경이나 되면 맞춤이니까. 우리의 기억은 성격특징과 인정물태, 공유되는 정서 덕에 생겨나는 산물이다.

비로소 좋아지다

한때 '양공주' 방이었다는 그곳에서 나는 꼬박 3년을 살았다. 하루 종일 햇볕 한줌 들어오지 않는 그 방에서 처음으로 tv와 냉장고를 가지게 되었고 (tv는 공장 생활로 번 돈으로 샀고 냉장고는 또다른 옆방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부대할머니에게서 1만원에 샀는데 tv가 나오던 날과 냉장고의 시원한 물을 마셨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남아있다) 데뷔 단편소설을 썼으며, 연애를 했고 포장마차를 하면서 지금의 내 나이쯤 되면 어떻게 되어있을까를 생각해보았으며 그리고 할머니와 술을 더 마셨다. 백자 담배(청자와 같은 200원으로 그곳에서 사는 동안 그 담배만 피웠다) 한 값에 막걸리 한 되만 있으면 막막한 미래도 가지런히 가라앉곤 했다.

3년 뒤 그곳을 떠날 때, (거기를 떠나면서 대전도 떠난 것인데) 수원지 관리인이(그는 준공무원 정도 됐다) 나를 찾아와 같이 술을 마셨다. 그는 술판 막판에 조심스럽게 그동안 정보과 형사에게 나에 관해 주기적으로 보고를 했다고 실토했다. 나는 좀 기가 막혔는데, 하기사 시절이 워낙 그런데다, 선배 동료 후배들이 수시로 찾아와 시국관련 회의를 하였고 조금 취했다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가서 싸우자, 일으키자, 승리하자, 노래를 불러댔으니 그럴만도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전 대청호에 운동권 수배자들이 숨어들었다가 훌륭하게 피신을 한 일이 있어 그곳 댐 관리자가 끌려들어가 엄청 깨졌었는데, 그런 일 때문에 당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미안해했다. 나는 별 도리 없이 사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를 껴안고 떠나온 나는 서산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딸아이가 첫돌 되기 조금 전, 일부러 찾아가서 만났는데, 그사이 할머니는 막걸리를 끊고 소주로 옮겨 탄 상태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막걸리는 단칼에 끊는 것도 놀랍고 그렇게 싫어하던 소주를 붙들고 계신 것도 놀랄 일이었다. 그녀는 물기 가득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내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몇 년 뒤 한 번 더 간 적이 있다. 유용주 시인과 나는 대전에 볼 일이 있었고 마침 몇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세천으로 갔고 유원지를 들러보고 나오다가 그 집을 지나갔는데, 담벼락에 햇살만 가득하고 인기척은 없어, 망연자실 서 있다가 그냥 왔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 아닌지, 확인하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나는 그때 알았다. 이제 이곳을 오지 않을 것을. 못할 것을. 그리고 이 집과 할머니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한창훈
- 소설가,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현)
- 소설집 <가던 새 본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청춘가를 불러요> <나는 여기가 좋 다> <그 남자의 연애사>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장편소설 <홍합>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열 여섯의 섬> <꽃의 나라> <순정> <네가 이별을 떠날 때>
- 대산창작기금, 한겨레문학상, 요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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