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뀐 배우들이 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 배우들의 결정적 영화를 살펴보면서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영화 <트루먼 쇼> 포스터

영화 <트루먼 쇼> 포스터 ⓒ 해리슨앤컴퍼니

 
1990년대, 짐 캐리의 얼굴에서 우울을 읽는 사람은 없었다. 스탠드업 코미디로 시작해 오랜 무명생활을 겪은 그는 <에이스 벤츄라>(1994)의 성공 이후 <마스크>(1994), <덤앤더머>(1994), <에이스 벤츄라2>(1995)를 연이어 흥행시키며 스타 배우로 올라섰고, <케이블 가이>(1996)에서는 이천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아 지구상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배우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과장된 코믹 연기는 그에게 성공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지만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족쇄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짐 캐리의 출연이 곧 그 영화의 장르와 성격을 규정지어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2~3년 사이에 과잉 소비된 그의 이미지에 대중들이 점차 피로감을 느낄 즈음 <트루먼 쇼>가 개봉했다. 당시 방송가에서 새로운 장르로 떠오르던 리얼리티 쇼를 소재로 한 영화는 여러모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특히 전에 본 적 없는 진지한 연기를 보여준 짐 캐리의 변신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전 세계인들이 애청하는 '트루먼 쇼'는 트루먼(짐 캐리)이라는 인물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24시간 내내 실시간으로 그의 삶을 비추는 리얼리티 쇼다. 제작진은 이 쇼의 강점이 모두 '진짜'라는데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 쇼의 주인공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씨 헤이븐 아일랜드'는 하나의 거대한 세트인데다가 그의 가족, 가장 절친한 친구, 앞집에 사는 이웃, 직장 동료, 그리고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까지 그가 만나는 모두는 이 쇼를 위해 고용된 배우들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접근했을 때,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극단의 상황 설정만 인정한다면 이 영화의 단단한 플롯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몰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매스미디어의 함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트루먼은 간호사인 아내, 메릴(로라 리니)과 함께 평범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정한 남편이자 유쾌한 이웃이며 진실된 친구인 그에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바로 첫사랑 실비아를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지만 실비아는 이 모든 게 '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함께 '피지'로 갑작스럽게 떠나버린다. 그녀의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 않은 그는 잡지 속 모델들의 얼굴에서 실비아를 찾는다. 그리고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오리고 재조합해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의 얼굴을 만들어 낸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일은 그에게 작은 일탈이 되어주는 동시에 시비아가 있는 '피지'로 떠나고 싶다는 갈망을 심어준다.

트루먼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씨 헤이븐 아일랜드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탐험가가 되어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겠다는 어렸을 적 꿈은 그가 자라는 동안 끊임없이 꺾이고 무너진다. 결정적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은 트라우마가 그의 두 발을 육지에 완전히 묶어 버리는데 이 모든 것은 그를 '세트장'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트루먼 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의 설정(그는 트루먼이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매번 그 시도를 실패로 만들어 버린다.)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여느 날과 다름없는 아침. 집을 나서는 트루먼 앞으로 '천랑성'(별자리)이라고 적힌 조명기구가 떨어지고, 이를 시작으로 트루먼의 일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된다. 죽은 줄로 알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고, 라디오에서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스포츠 중계하듯이 중계한다.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 트루먼은 평소에 별 생각 없이 마주했던, 자신의 일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다시 보게 되고, 자신의 의심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이제 트루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펼치는데, 대본에 의해 움직이는 배우들과 대본이 없는 트루먼간의 대결 아닌 대결이 쏠쏠한 재미를 준다. 또한 주목해야할 것은 '트루먼 쇼'의 시청자들이 트루먼이 벗어나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은 간과한 채 그의 목숨을 건 투쟁을 가슴 졸이며 지켜본다는 점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트루먼 쇼'는 220개 국가에서 17억 인구가 애청하는 tv프로그램이다. 그 중에는 이 프로그램의 윤리성을 공격하며 트루먼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트루먼을 연예인, 스타로 인식하고 수동적으로 쇼를 시청한다. 집, 가구, 옷, 자동차, 먹는 음식, 전자 제품, 등 쇼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광고 상품이며, 쇼가 벌어들이는 수익은 한 국가의 총 생산액에 맞먹을 정도다. 시청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트루먼 쇼'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고,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그 경계는 사라진다. 

'트루먼 쇼'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람은 없다. 이로써 시청자들은 그 어떤 윤리적 고민 없이 마음 놓고 훔쳐보기에 몰입 할 수 있다. 게다가 배우들은 결정적인 순간, 그러니까 제품 광고를 해야 하거나 감정을 고조시키는 순간에 말 그대로 누군가 써준 대사를 읊는데 시청자들은 그 대사가 '진짜'라고 믿어버린다. 크리스토프는 '트루먼 쇼'가 가진 힘, 그리고 트루먼이 30년이라는 시간동안 이 쇼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유를 이 쇼가 가진 '현실성'에 두지만 그의 말에는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의 정당성은 모두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크리스토프는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씨 헤이븐 아일랜드를 추잡한 현실세계와 다른, 완전한 세상으로 규정하고, 그 곳에 살고 있는 트루먼을 선택받은 인간이라 말한다. 트루먼이 느끼는 사랑과 고뇌가 진짜라 말하면서도 현실, 진짜 세상과 구분 짓는 것이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잠든 트루먼의 얼굴이 대형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크리스토프는 마치 제 자식을 쓰다듬듯 화면을 어루만진다. 그에게 트루먼은 자신이 만든 완전한 세상(이로써 그는 '신'과 다름없다.)을 완벽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트루먼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폭풍우를 뚫고 '씨 헤이븐 아일랜드'와 현실의 경계에 도달한 트루먼은 자신의 인생이 모두 가짜였다는 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용감하게 출구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죽음보다 두려운 공포를 극복한 트루먼의 감동 휴먼 드라마를 지켜본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그의 선택에 환호를 보낸다. 만일이 넘도록 방송을 멈춘 적이 없던 '트루먼 쇼'는 이렇게 끝이 나고, 시청자들은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tv 가이드'를 뒤지며 다른 볼거리를 찾는다. (한 남자의 생사를 건 도전이 시청자들에겐 한낱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 해리슨앤컴퍼니

 
이 영화가 나오고 지난 20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콘셉트의 '리얼리티 쇼'들이 쏟아졌으며 기술의 발전과 함께 SNS가 등장하면서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버렸다. 팔로워가 많은 '인플루언서'가 가진 영향력은 그가 올린 게시물이 가져 온 경제적 이익으로 증명되고, 사생활의 경계가 모호해진 사람들은 너도 나도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온라인에서의 삶이 오프라인에서의 삶을 잠식해버린 오늘, 어쩌면 우리는 자진해서 트루먼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짐 캐리는 이 영화로 1999년 골든 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중이 기대하는 익살스러운 모습과 예상치 못했던 진지한 모습을 영화의 성격에 맞게, 절묘하게 보여준 그의 연기에 관객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이후 <맨 온 더 문>(1999)이나 <이터널 선샤인>(2004)과 같은 영화에서 전과는 또 다른 연기를 펼쳐 보이며 '배우는 역시 배우구나.'하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몇 년간 활동이 뜸하긴 했으나 곧 육십 살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앞으로 더 많은 영화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 줄 수 있는 배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추신.
대중매체와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이는 코미디 <트루먼 쇼>의 대본을 쓴 앤드류 니콜은 <트루먼 쇼> 전후로도 미래 사회에 있을 수 있는 윤리적 고민들을 드라마로 풀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전작 <가타카>(1997,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았다.)에서 미래 사회에 일어날 수 있는 '차별'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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