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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씨
 김명수 씨
ⓒ 김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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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돌보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
아직 못다 이룬 꿈 '고향에 가보는 것' 


88세의 나이에도 오로지 꿈 때문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가 있다. 재가노인 요양보호사인 김명수씨는 본인 또한 노인이면서 또 다른 노인 가정을 방문해 소·대변 처리부터 목욕, 은행 업무, 쇼핑 등 크고 작은 일을 도우며, 노인의 손과 발이 돼주고 있다. 

"놀아서 뭐해요. 집에 있어봤자 TV밖에 볼 게 없는데 요양보호사로 일하면 보람도 있고 돈도 벌 수 있어 훨씬 좋아요."

김씨는 88세의 나이에도 품에 안은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산다.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유했던 어린 시절

김씨는 이북사람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풍족하게 자랐다. 당시 집이 세 채나 있었고, 땅도 많았다. 해주사범학교를 다녔던 그는 "부모님이 교사가 되길 바랐지만 공부보다 운동을 잘했다"며 "황해도에서 배구 대표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루 종일 뛰어도 숨이 가쁘지 않아 마라톤 선수도 꿈꿨다"고 덧붙였다. 

 "남한으로 가야 잘 살 수 있어"

꿈을 펼치기도 전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19세의 나이에 참전했고, 전남 영광까지 내려왔다. 서남지구전투경찰대에서 근무하면서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했다.

김씨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전쟁이 나면 남한으로 가라고, 남한에 가야 잘 살 수 있다고 누누이 말했다"며 "전쟁이 일어나자 무조건 남한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이어 "친형 또한 6.25전쟁 전에 월남했기 때문에 걱정 없이 남한을 찾았다"면서 "하지만 내가 내려왔을 때 형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고 전했다.

"나보다 두 살 많았던 형이 먼저 월남했어요. 남한에 와서 수소문해 형을 찾았는데, 이미 돌아가셨더라고요. 형이 당시 서북청년회(월남한 청년들이 공산주의로부터 고향을 되찾고자 결성된 반공단체)에 가입돼 있었는데, 웅진전투에서 전사했어요. 형 친구들로부터 사망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죠. 내게 아무도 없다고 생각이 들어 막막했거든요."

 유일하게 나를 믿어줬던 아내

김씨는 3년간 서남지구전투경찰대에서 근무하다, 신탄진파출소장, 서울특별시 경찰국 강력반장 등으로 일했다. 그렇게 경찰생활만 30년을 했다. 공직에 있었지만 월급이 워낙 적었을 때라 보리밥도 먹기 어려웠다. 부모의 말과는 달리, 남한 역시 살기가 어려웠다. 배고픔이란 걸 모르고 자란 그에게는 더욱 힘든 삶이었다. 

김씨는 1981년 정년퇴임 후 북한연구소에서 8년간 근무했고, 총무부장으로 퇴직했다. 이후에도 그는 주유소와 돈사 등에서 쉴새없이 일하며 돈을 모았다. 

한편 그가 충남 당진에 온 지 어느덧 10년이 됐다. 충남 공주 출신의 아내를 대전에서 만나 1년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냉전 시대, 이북 출신이라 아무도 김씨를 믿어주지 않았을 때, 오직 아내만이 김씨를 안아줬다. 그는 "이불 한 채 살 돈도 없었다"며 "대전의 한 골방에서 둘이 살았는데 아궁이에 불을 떼면 쥐가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해심이 많고 똑똑했던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당진전통시장에서 장을 보다 교통사고를 당해 뇌출혈로 3년간 투병했지만 결국 혈관성 치매를 7년 앓다 갔다. 

치매 앓던 아내, 3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게 된 것도 아내 때문이다. 아내를 직접 돌보겠다는 생각으로 지난 2013년 요양보호사 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했다. 그는 "내가 간호했기 때문에 아내가 조금이라도 더 산 것"이라며 "젊은 시절 나 때문에 고생한 아내에 비하면 내가 아내를 돌보면서 겪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햇수로 아내가 떠난 지 3년이 됐는데 아직도 아내를 잊지 못하고 있다"면서 "아내 생각만하면 지금도 슬프다"고 전했다.

"치매는 굉장히 무서운 병이에요. 아내는 집 밖으로 나가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어요. 실종신고도 몇 번이나 했었는지….  나중엔 저를 몰라보더라고요. 나보고 '당신 누구냐, 왜 우리 집에 있냐, 나가라'고 쫓아내는데 얼마나 서럽던지요. 아내가 나를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

한편 아직 못다 이룬 김씨의 꿈은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씨가 건강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는 "빨리 통일이 돼 내 고향 황해도 해주로 가고 싶다"며 "내 가족이 살던 집에 다시 가고 싶어 건강도 챙기고 돈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제가 잘 살고 있는 이유는 몸과 정신이 건강하기 때문이에요. 88세인데도 여전히 소리도 잘 들리고 책도 읽을 수 있어요.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저축할 수 있어 행복하죠. 또한 이제는 사회에, 좀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내가 힘이 될 수 있어 기뻐요. 제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건강 관리에 힘쓸 예정입니다."

 >>김명수 씨는 
·1932년 황해도 해주 출신
·대전, 서울 등에서 경찰생활 30년 
·북한연구소 전 총무부장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당진시대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당진, #요양보호사, #김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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