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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1987년 6월 그 뜨거운 항쟁의 시기에 나는 거기 함께하지 못했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나는 세브란스 병동 졍형외과에 입원해 다리의 부기가 빠지면 깁스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1987년 4월 5일 강화도에서  프랑스 지인들과 강화도 여행을 갔던  4월 5일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모습.
▲ 1987년 4월 5일 강화도에서  프랑스 지인들과 강화도 여행을 갔던 4월 5일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모습.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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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 나는 프랑스 사람들과 강화도에 갔다가 외포리에서 후진하던 승용차에 치어 다리 두 군데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 응급조치로 진통제를 투여하고 바지를 잘라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은 뒤 서울 세브란스로 이송됐다.

6월이 되자 병실에 이대 사회학과 여학생이 발목 골절이 되어 들어왔다. 집회 부상이었다.

"그러니까 공부나 할 것이지, 계집애가 누가 데모나 하랬어?"

노골적으로 비난섞인 반말로 나무라는 의사에게 병실에서는 항의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병원에서는 중환자실 '한열군이 뇌사 상태'라는 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병원 앞에서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며 연좌 농성이 계속됐다.

고려대 2학년이던 막내동생이 여동생과 이따금씩 병실에 함께 오곤 했는데 오자마자 지갑이며 동전을 다 꺼내놓고 사라졌다가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병실로 돌아오곤 했다. 병원 앞마당까지 최루탄을 쏘고 방문객의 출입마저 통제하는 암울한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IMF 이후 사회로 나왔다. 2002년 이후 호주제 폐지 운동, 쌍용차, 용산, 밀양, 제주 강정마을, 광우병 쇠고기 사태, 세월호, 백남기 농민 사건에 머릿수를 보태기 시작했다. 이소선 어머니, 박종철 열사 아버님인 박정기님,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만나면서 무임승차했던 지난날의 내 삶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2016년 여름 발목이 부러지는 바람에 2016년 말부터 시작된 촛불집회 초기에는 머릿수마저 보태지 못했다. 촛불집회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함께 촛불을 들 수 있었고, 탄핵의 기쁨을 거리에서 함께 맛볼 수 있었다.
 
1987 이한열 쓰러져 일으킨 그날의 이야기
▲ 1987 이한열 쓰러져 일으킨 그날의 이야기
ⓒ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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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이한열> '쓰러져 일으킨 그날의 이야기'는 이한열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김정희가 정리한 글이다. 영화 <1987>을 보고 이 책을 읽는다면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의 퍼즐조각이 맞아 그날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바로 그 현장에 함께했던 느낌이 들 것이다.
 
꽃이 피었다. 사람의 꽃이 피었다. 한꺼번에 한자리에서 꽃 무더기가 100만 개씩 피어났다. 촛불집회였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다섯 달에 걸쳐 연인원 1700만에 가까운 시민이 모였다. 발 디딜 틈 없이 광장은 가득 메워졌다. 2016년 말, 국정을 농단한 이들을 처벌하라고. 박근혜대통령을 탄핵하라고 시민들은 외쳤다.그리고 2017년 초, 국정농단 세력은 구속되고,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되었다. 시민들이 해냈다.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힘이었다. - 17쪽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낸 지 30년 만에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고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촛불의 승리이자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승리였다.

<1987 이한열>은 87년 6월 9일 데모대의 맨 앞에 섰던 이한열이 직격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순간부터 2004년 이한열기념관이 지어질 때까지 기억과 기록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광주의 아들 이한열은 광주민주화항쟁의 진실을 알고 투쟁에 나섰고,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아들을 잃은 후 투사가 되어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듬는다.
 
나는 이한열이가 왜 1987년 6월 9일에 거기 서 있었을까. 지금도 궁금해. 왜 그랬을까. 숙제예요 숙제. 내가 늘 그랬거든. "남자가 데모를 아예 안 하면 못쓰고 뒤에서 해라. 뒤에서." 그러면 한열이는 그렇게 하겠다. 걱정 말라 헸지. 그래 놓고 6월 9일 그날 데모대 맨 앞에 서 있었거든. - 233쪽

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후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며 아들과 한 약속을 지켰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후 박정기 아버님은 투쟁장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된다. 이한열 열사를 잃은 배은심 어머니는 5. 18 희생자와 자식을 잃은 모든 유가족의 아픔을 물려받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살았지만, 그래서 1980년 총소리도 듣고, 시신도 보고 했지만 그때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느끼는 아픔은 미처 몰랐어요. 그런데 내가 자식을 잃고 망월동 묘역에 다니며 그분들을 만나면서, 내가 그 아픔을 물려받게 된 거요.(중략) 나는 그런 분들을 만나고, 우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식구들하고 같이 싸우면서 '이한열이가 이런 걸 위해서 살려고 했구나' 하고 조금식 느껴 갔어요.-232쪽
 
아들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을 위해 싸우던 이소선 어머니, 박정기, 아버님이 그리던 아들 품으로 가셨다. 박종철이 누군지도 모른 채 태어난 아들이 박종철 인권장학금을 받았다. 박종철 열사가 바라던 참 세상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80년 피의 항쟁에, 87년 치열했던 6월에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던 나는 '거기에 너 있었는가' 누가 물을 때 또 다시 부끄러움으로 고개 숙이는 일이 없도록 머릿수를 보태며 부끄러움을 덜어낸다.

내 아들이 사는 세상이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소선 어머니가 누군지조차 몰랐던 고 김용균 어머니 김미숙씨도 아들이 목숨을 잃자 또 다른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든든한 방패가 되어 투쟁의 자리마다 함께하고 있다.

이한열 열사를 보낸 지 32주기가 된다. 그가 쓰러져 일으킨 그날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나는 이한열기념관 제 1회 도슨트 교육을 받았다. 

6월 15일 중앙고등학교 학생 스무 명과 교사 두 분이 기념관을 방문한다고 한다. 나는 그들을 맞아 도슨트로 첫 발걸음을 뗄 것이다. 최루탄에 스러진 그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1987 이한열 - 쓰러져 일으킨 그날의 이야기

김정희 (지은이), 사회평론(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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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