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삼의사 국민장을 보도하는 1946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삼의사 국민장을 보도하는 1946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한국 현대사에서 최후의 국민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이라면, 최초의 국민장은 이른바 삼의사 장례식이다. 많은 책과 논문에 '최초의 국민장은 백범 김구 장례식'이라고 적혀 있지만, 1946년 7월 7일 자 <동아일보> 등에 보도된 것처럼 실제로는 백정기·이봉창·윤봉길 세 의사의 장례식이 최초의 국민장이다.

그해 7월 6일 거행된 이 국민장은 미군정청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발의로 서울 효창공원에서 거행된 거족적 장례식이다. 5만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조기 게양이나 휴업 또는 부조금 갹출 등으로 애도를 표시했다. 남한 정치세력들도 이날만큼은 좌우의 입장 차를 버리고 거족적 행사에 동참했다. 위 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삼(三)열사의 국민장은 서울의 성지 효창원에서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오세창·이시영·여운형 제씨(諸氏)와 한국민주당·조선공산당·한국독립당·민전·대한독립촉성국민회·전평·부총·애국부인회·여자국민당 등 각 정당·단체 대표자와 각 정회, 각 학교의 대표자들 5만여 명이 참예하여 하오 1시부터 엄숙히 거행되었다."
 
백정기·이봉창·윤봉길에 대한 당시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느끼게 해주는 보도다. 이들의 국민장 바로 다음이 김구 국민장(1949년)인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들은 김구에 버금가는 인지도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위 신문에서도 "수만 시민의 봉배와 눈물 어린 감회 속에" 삼의사 국민장이 거행됐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삼의사 중에 유독 백정기만큼은 오늘날 우리 머릿속에서 견고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장까지 치러진 인물이 지금 우리 머릿속에서는 흐릿한 존재로 남아 있다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백정기는 왜 아나키스트가 되었나
 
 1934년 2월 10일자 <자유연합신문>에 실린 백정기의 사진.
 1934년 2월 10일자 <자유연합신문>에 실린 백정기의 사진.
ⓒ 자유연합신문

관련사진보기

백정기는 동학혁명 2년 뒤인 1896년 1월 19일 출생해, 1934년 6월 5일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향년 38세였다. 구마모토시는 부산 남쪽 규슈섬의 중부에 있다. 나가사키 동쪽이다.

백정기는 23세 때인 1919년 8월부터 일본인 및 일본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 활동에 참여했다. 3.1운동이 있었던 그해에는 서울·인천 등의 군사시설 파괴를 시도하다가 실패해, 2년 뒤 일제 경찰에 붙들렸다. 다행히 이때는 가짜 이름과 주소를 둘러댄 뒤 방면됐다. 28세 때인 1924년에는 일본에 침투해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를 시도하다가 발각돼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 묘역.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 묘역.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백정기는 아나키스트였다. 1925년에는 상하이에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다.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이 아닌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아나키즘(anarchism)은 지배자 혹은 권력의 부재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에서 유래했다. 그런 것을 부정한다 해서, 사회질서나 조직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압제하는 시스템을 부정할 뿐이다. 근대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1865)이 국가를 대체할 상호부조조합을 상정한 것처럼, 이들은 평등과 자유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조직의 필요성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아나키스트들이 항일독립운동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지금 MBC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 <이몽>의 주인공 김원봉도 아나키스트였고,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명제로 유명한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도 아나키스트였고, 한국 최고의 명문가라는 의미에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렸지만 명예와 재산을 죄다 포기하고 일가족 59명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난 이회영도 아나키스트였다. 영화 <박열>의 주인공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들도 민족독립 못지않게 그 이후의 상황을 고민했다.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뒤에도 민중이 국가권력의 착취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는 게 독립운동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독립운동가들의 프로필을 보다 보면 "무슨 무슨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다"는 문구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 정도로 아나키스트 진영의 독립운동은 활발했다. 군대를 통한 독립운동이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인과 일본 시설에 대한 개별적 공격에 주력한 그들의 활약이 돋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립투사들이 아나키즘에 매료되기 쉬웠던 것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착취 시스템인 일제 식민통치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이런 정치권력은 없었다"는 탄사가 나올 정도의 악독한 지배체제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 중 상당수가 아나키즘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패'한 육삼정 의거가 의미 있는 이유
 
 삼의사 묘역에 있는 백정기 묘소
 삼의사 묘역에 있는 백정기 묘소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백정기 역시 민중에 대한 착취 시스템을 혐오했다. 일본에 대한 증오뿐 아니라 착취 체제에 대한 혐오 때문에도 항일운동에 나섰다는 점은, 그가 독립운동과 함께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을 병행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그의 활동을 이렇게 소개한다. 아래의 '남화'는 남중국이다.
 
"1925년 상하이에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하이에서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南華)청년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 만의 대(大)노동 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써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 공장의 직공 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난징·상하이 등지의 한·중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푸젠성 췐저우에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을 몰아낸 뒤 노동자와 농민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백정기는 1932년에는 BTP로 불리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제에 대한 파괴 공작을 추진했다. 그 이듬해인 1932년, 원심창·이강훈과 함께 벌인 일이 유명한 육삼정 의거다.

백정기와 원심창·이강훈은 1933년 3월 17일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중·일 양국의 정계·군부 요인들과 함께 상하이의 일본 요정인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벌인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행사장에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이들은 연회장 습격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 뒤 현장에 가서 준비를 완료했다. 하지만 습격 직전에 역습을 받아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 때문에 백정기는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에 1934년 6월 5일 폐병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육삼정 의거 같은 독립운동은 결과 못지않게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도 매우 중요하다. 일본인이나 일본 시설에 대한 공격이 미수로 끝날지라도, 그런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과정에서 애초의 목적이 성사되는 경우가 많다.

1932년 이봉창의 히로히토 일왕(천황) 암살도 미수로 그치고 말았지만,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육삼정 의거의 경우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 거점 중 하나인 상하이에서 한국 독립투사들이 대담하게 벌인 의거라는 점에서 국제사회를 긴장시킬 만한 일이었다.

백정기가 한·중·일 삼국을 무대로 일으킨 의거들은 '한민족이 살아 있으며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했다. 1946년에 우리 국민들이 이봉창·윤봉길과 함께 그를 일반 장례식도 아니고 국민장으로 모신 것은 그의 독립투쟁이 갖는 커다란 의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순국 뒤에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작용한 측면도 있지만, 그의 독립투쟁이 갖는 의의에 대한 전 국민의 공감대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국민장을 통해 민족적 추앙을 받았던 그가 그 후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갔다. 1차적 원인은, 아나키스트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동지들이 해방 뒤에 정치적 기반을 잡지 못한 게 최대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주의 계열은 남한에서 기반을 잡고 공산주의 계열은 북한에서 기반을 잡은 데 반해, 아나키스트들은 그 어디서도 기반을 잡지 못했다.

같은 아나키스트인 신채호·이회영 등이 해방 뒤에도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유산이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신채호의 경우에는 역사학이 일천하던 시절에 역사 저술물들을 남겼고, 이회영은 이시영 부통령 등을 비롯한 유력한 혈육들을 남겼다. 그래서 이들은 아나키스트 계열인데도 상당한 조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백정기는 자신을 기억해줄 존재들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독립투쟁도 서서히 잊혀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다 그럴 것이다. 박열처럼 뒤늦게나마 영화로라도 재조명되지 않는다면, 남북 어디서도 기반을 잡지 못한 아나키스트들이 제대로 된 조명을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남북에서 각각의 정권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입지가 불리해졌다는 점 외에, 백정기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이승만 때문이다. 삼의사 묘역이 있는 효창공원에 효창운동장이 들어서 있는 사실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의 횡포, 역사에서 잊힌 백정기
 
 효창운동장.
 효창운동장.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효창운동장 건설 공사가 시작된 것은 이승만 정권 때인 1956년이다. 서울운동장에 이은 제2의 종합운동장을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벌어진 일이다.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에서는 서울 상도동에 종합운동장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런데도 효창공원 옆에 종합운동장이 세워진 것은 정권의 의지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라이벌인 김구의 묘역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곳을 독립투사 묘역이 아닌 종합운동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백정기를 비롯한 여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추모에도 악영향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6월 3일 자 <경향신문>에서도 그런 우려가 표출됐다.
 
"우리가 효창공원에 운동장을 건설하는 데 대해서 새삼스러이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것은 수도 서울에 몇 개 되지 않은 공원의 하나가 없어지므로 시민의 휴식처를 상실하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지만, 그보다도 애국선열들의 묘소의 존엄성이 유린되는 것을 애달파 하는 데 그 커다란 사유가 있다."
 
100만 인파가 모인 1949년 김구 국민장이 대통령 이승만의 가슴 한켠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국민장으로 모셔진 삼의사와 더불어 김구의 묘역이 있는 그곳에 이승만은 운동장을 건설하려 했다. 위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은 서울시를 앞세워 묘지 이전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효창공원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을 이승만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백정기와 함께 삼의사로 추앙된 이봉창·윤봉길은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의 단원이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김구는 국제적 인물로 우뚝 솟으며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그래서 김구에 대한 존경심이 살아 있는 한, 이봉창·윤봉길은 쉽게 잊히기 힘들다. 이봉창·윤봉길의 독립투쟁이 갖는 독자적 의의도 물론 대단하지만, 김구와의 관련성 때문에라도 이 두 분에 대한 국민적 존경심은 아랑곳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효창공원에 대한 이승만의 핍박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에 비해 백정기는 외로웠다. 효창공원을 핍박하고 거기 묻힌 분들을 폄훼하는 이승만 정권의 횡포로부터 백정기를 구해줄 세력이 별로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백정기의 독립투쟁을 일반 국민들에게 계속해서 알려주고 추모 분위기를 유지해줄 세력이 별로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쉽게 잊힐 수 밖에 없었다. 1946년에 대규모 국민장과 함께 민족의 가슴에 안장된 그가 얼마 안 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데는 그런 점들이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형무소에서 외롭게 죽어간 독립투사를 위해 뒤늦게나마 국민장을 치러줘 놓고도, 정치적 소수파라는 이유로 추모 분위기를 끝까지 지켜주지 않은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