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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공장소에서 누군가가 크게 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참는 편이지만 지나치다 싶을 때면 가서 시끄럽다고 알려 준다. 가끔 화도 낸다. 그런 식으로 나를 화나게 하는 이는 대중없다. 때로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전화를 받으려고 달려 나가는 누군가가, 때로는 지하철에서 이어폰 없이 음악을 듣는 누군가가, 때로는 공원에서 술에 취해 큰 소리로 욕을 퍼붓는 누군가가 나를 열 받게 한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 그 '누군가'의 출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런 발상은 좀 이상하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그러니까 전화가 오면 도서관 열람실에서도 전력 질주할 그런 인간을 대체 어떻게 특정할 수 있을까?

"아이는 안 됩니다" "청소년은 안 됩니다" "중국인은 안 됩니다"라는 말은 "시끄러운 사람은 안 됩니다"라는 말과 같지 않다. '아이' '청소년' '중국인'은 단순하고 평면적인 집단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한 집단을 정의하고 예측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에 기초할 뿐이다. 실상 내 경험에 따르면 공공장소에서 가장 무례한 이는 대체로 성인들이다(아기는 자주 울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무례'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출입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영화관에서 소곤소곤 대화하는 연인을, 카페에서 둥그렇게 둘러앉아 모임을 진행하는 중년의 어르신들을, 식당에서 한낮부터 술에 취한 채 합창을 하는 조기축구회를 막고 싶다. 그러나 노어덜트존이 가능할까? 영화관에 노연인존을, 카페에 노중년어르신존을, 식당에 노조기축구회존을 상상할 수 있을까? 상상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런 대응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노키즈존 외에도 노틴에이저존, 노실버존, 노장애인존 등 다양한 노00존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여기서 00은 취사선택된 존재다. 출입을 막을 수 있고 무시할 수 있고 혐오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회적 약자를 선택해서 배제하고도, 오히려 어쩔 수 없었다는 듯 호소하는 게 이 사회의 인권감수성 수준이다. 다시 말하지만 배제는 배제해도 괜찮은 이들에게만 일어난다.

어느 공간이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가 가진 사회적 권력을 반영한다(나는 30대 남성으로 무려 '홀로 야간 산행'을 할 수 있다). 공간을 제한하는 것은 유구한 차별의 방식이다. 한국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노00존이 많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은 계단 때문에 가게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달장애인은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주민들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 트랜스젠더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렵고, 이주노동자는 도시 외곽이나 시골의 기숙사에만 주로 머물러 있다. 여성은 늦은 밤 어두운 골목길에서 주위를 살피며 종종걸음을 쳐야 하고, 지난해 제주도에 온 난민들은 출도를 제한당했다. 차별이 분리를 만들고, 분리가 다시 차별을 강화한다.

누군가에 대한 무지와 편견은 혐오와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혐오와 두려움이 클수록 내 앞에 있는 그 누군가를 치워 버리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를 손쉽게 지우기 위해 혐오와 두려움을 키우고 부추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사를 하려면 노키즈존은 어쩔 수 없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 그런 말이 나오나"와 같은 말들이 그렇다. 노키즈존은 불가항력적이지 않다. '피해'의 경험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장벽이 사라질수록 그 누군가뿐만 아니라 나도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힘껏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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