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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실수하고 내일은 그만큼 지혜를 쌓으며 살아가는 중년의 좌충우돌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글 쓰는 친구 A와 현대문학의 흐름이란 수업을 들으러 서대문구에 있는 학습관을 다녔다. 오후 수업이라 서대문역에서 만나 근처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학습관으로 슬슬 걸어 올라가며 한 주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눴다.

마르고 민얼굴에 치장 없이 단정한 A는 그래서인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앳된 얼굴이다. 그런데 이날따라 환하게 웃는 그의 표정에 왠지 모를 그림자가 있다. 눈치를 보고 있는데 그가 말을 뗐다.

A는 얼마 전 시사 잡지의 의뢰를 받아 탈북 여성들을 대상으로 우리나라로 귀환하는 과정을 인터뷰했다. 나도 최근 관련된 다큐를 본 터라 그 가슴 아픈 실상을 알고 있었다. 나는 A가 그 여성들의 고난을 듣고 우울한 줄 알고 입에 거품을 물며 그들을 이용하고 농락한 사람들을 욕했다. A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런데 A를 충격에 빠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민얼굴에도 빛나던 친구

8시간의 긴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저녁이 되었고 인터뷰를 한 그의 남편이 같이 식사하자며 그 자리에 나온 거다. 남편은 부인과 A를 번갈아 보더니 누가 탈북 여성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A는 한참 후에야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질근 묶은 머리에 헐렁한 티셔츠, 낡은 점퍼를 입은 A와 달리 화사하게 치장한 그녀는 예뻤다.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탈북한 여성보다 남한에 사는 여자가 더 이쁘고 세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일 수 있지만, 돌아오는 길 지하철 유리창에 스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달라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하철 유리창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명이 위에서 아래로 침침하게 떨어지니 얼굴에 있는 굴곡마다 그림자가 뚝뚝 떨어져서 세상 못난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벽을 지날 때마다 유리창에 비치는 얼굴은 안 그래도 피곤한데 기분까지 망쳐놓은 주범이다. 동대문 쇼핑몰에 있는 거울 같은, 소위 '매직거울'이라 부르는 거울을 붙여 놓으면 안 되나.

나는 A와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라 익숙해서 그런지 한 번도 그의 모습을 초라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외려 연예인도 아닌데 집 앞 슈퍼에 갈 때조차 무심한 듯 신경 쓴 '데일리 룩'을 챙기느라 피곤한 나보다 자유로워 보여서 내심 부럽기도 했다.

나는 꾸밈노동이 익숙하고 편안한 전형적인 '오페'(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스트)다. (반 발짝 앞으로 나갈 때마다 집안에 소란이 일지만, 가랑비에 젖는 건 옷뿐이 아니기에 계속 소란을 일으키는 중이다) 화려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꾸미지 않고 다니는 게 꺼려진다. 안 그래도 올라오는 기미에 늘어가는 주름에 자신감이 산으로 가는 중인데 적당한 치장은 나를 지지해주는 느낌이 든다.

A는 내게 쇼핑을 제안했다. 이런 건 나의 전문. 내가 글 쓰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의상 코디나 스타일리스트를 했을 거 같다. 먼저 화장품 가게에 들러 기초부터 색조까지 모조리 샀다. 그리고 옷을 사러 갔다. 그는 자꾸 재활용 통에 있을 법한 옷들을 골랐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화사한 색깔 옷을 골랐다.
 
 40대에 반짝이 스커트가 어때서!
 40대에 반짝이 스커트가 어때서!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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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이고, 이런 걸 어떻게 입어요" 한다. 그런 소리 말고 스타일을 바꾸고 싶으면 이런 걸 입으라고 강제구매를 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윗옷을 사면 같이 입을 아래옷을 사야 하고 또 그것에 맞는 신발이 필요하다. 수년 동안 쇼핑을 하지 않아 사야 하는 게 많다.

하긴 쇼핑을 자주 해도 장롱에는 쓰레기만 가득하다. 분명 옷이라고 샀는데 장롱에 들어가 며칠이 지나는 순간 쓰레기가 된다. 그러니 항시 입을 옷이 없다. 이래저래 한 보따리를 사서 우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A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진짜 패션 테러리스트는 따로 있다. 25년 전 동거를 했던 친구 B인데 뭐든 창조적이다. 그때 가끔 집에서 밥을 해 먹었는데 B는 된장찌개에 미역을 넣었다. 된장국에 잘게 썬 미역이 조금 들어있는 미소된장국 말고 보글보글 된장찌개에 말이다.

비주얼만큼 맛도 형편없는데 버리기 아깝다고 다 먹으라고 한다. 나는 입맛이 없다며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결국 혼자 다 먹어치운다. 식비를 반반씩 냈건만 친구는 오동통 살이 오르고 나는 삐쩍 말랐다.

얼마 전 B를 포함 대학 친구 4명이 탱고공연을 보러 갔다. 다들 일을 하는 친구들이라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카페에 앉아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주말인데도 출근한 B가 마지막으로 나타났는데, 우린 얼음이 되었다.

무릎 위 10센티까지 올라온 원피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바지를 입었다. 속바지는 이름 그대로 속에 있어야 할 짧은 반바지인데 정체성을 잃었다. 문제는 속바지뿐이 아니다. 색이 다 바래 얼룩덜룩한 원피스.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쟤 뭐냐?" 참고로 B는 땅과 건물을 상속받아 우리 중 가장 재벌이다.

우린 약속이나 한 듯이 친구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르르 일어섰다. 그리고 카페 바로 옆 아웃렛 매장으로 B를 밀어 넣었다. 이월상품 80% 할인이었다. 삼만 원이면 멀쩡한 옷들이 많았다. 적당한 옷을 골라 입혀 보았다.

B는 자꾸 자기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원피스 지퍼를 내려준다는 핑계로 탈의실에 따라 들어가 "B야, 너는 우리만 보니까 괜찮지, 우린 안 괜찮아. 그래서 그래." 그제야 B는 "아~~~" 하며 웃는다. B에게 평범한 패션 감각을 주지 않았다면 눈치라도 좀 주시지 하느님도 너무하신다.

친구들과 여행갈 때 이벤트 옷을 챙기는 이유
 
 내가 글 쓰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의상 코디나 스타일리스트를 했을 거 같다.
 내가 글 쓰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의상 코디나 스타일리스트를 했을 거 같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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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을 좋아하는 나는 친구들과 여행 갈 일이 생기면 꼭 이벤트 옷을 준비한다. 여행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지만 평소 입을 엄두도 내지 않던 스타일의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재미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친구들 반응은 대체로 일단 동공이 확장된다. 그리고는 웃음을 터트린다. '이런 걸 어떻게 입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입고 거울을 본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나를 또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는 일이다. '옷 하나로 뭐 그렇게까지' 싶지만 내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나를 깨우고 만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런 모습을 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기록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상황에 맞는 옷은 있지만, 나이에 맞는 옷이 뭔지 모르겠다. 유럽 여행을 가면 덩치가 큰 할머니들도 민소매 꽃무늬 원피스를 입거나 청바지에 샌들을 신는 모습을 흔하게 본다. 자연스럽고 너무 보기 좋다. 나잇값을 못 한다느니 주책이라느니 그런 시선은 없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80이 되도 여전히 나는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싶고 하이웨이스트 청바지가 입고 싶을 테니 말이다.

며칠 후, 나는 친구와 진주에 갈 예정이다. 내 목적은 새롭게 쓰고 있는 작품 구상(이라고 쓰고 농땡이라고 읽는다)이고, 내 친구는 강연이 잡혀 있다. 나는 맘속으로 그 친구에게 입힐 빨간 드레스를 생각하고 있다.

지적이고 점잖은 그의 동공이 확대되며 말하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하다. "어머 이게 뭐야, 깔깔깔, 이거 나한테 어울려?" 나는 대답한다. "응 암만, 어울리고 말고." 누구나 귀여운 옷을 입으면 귀여워지고 점잖은 옷을 입으면 점잖아진다. 그 빨간 드레스가 그에게 숨겨져 있던 어떤 얼굴을 가져다줄지 벌써 기대가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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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