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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천 옥녀봉 등산로 입구. 산행 길이는 2.3km이며 정상은 160m의 작은 산이다.
 경남 사천 옥녀봉 등산로 입구. 산행 길이는 2.3km이며 정상은 160m의 작은 산이다.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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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을 지나 진주 방향으로 가까이 갈수록 도로표지판에는 정겨운 이름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옥종, 사천, 완사, 곤양, 곤명, 다솔사…' 과거 꼬박 10년을 경남 진주와 산청에 살면서 무수히 많이 듣고 여러 번 다녀갔던 곳이다. 10년의 청춘을 진주에서 보냈기에 승용차로, 기차로, 버스를 타고 진주에 갈 때면 늘 설레고 푸근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신흥마을에는 '옥녀봉'이라는 작은 산이 하나 있다. 해발 160m 동네 뒷산으로 등산이라 하기에는 겸연쩍고 그냥 가벼운 산책 정도 코스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오랜만에 산을 타서 그런지 160m 작은 산 앞에 '저질 체력'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나무를 그늘 삼아 땀 흘리며 산행하는 것이 여름산의 묘미다.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나무를 그늘 삼아 땀 흘리며 산행하는 것이 여름산의 묘미다.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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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0일, 옥녀봉 등산로 입구에 차를 세우고 일행과 함께 산책길에 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걸음이 무척 느리다. 지금까지 산에 함께 갔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앞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남들이 1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1시간 반 이상 걸리니 함께 산에 갔던 사람들에게 꽤나 미안했던 적도 많았다. 이번에 함께 간 일행은 걸음이 나보다 배나 빠르다. 결국 나는 초반부터 뒷걸음만 바라보며 부지런히 쫓아 다녔다.

어느 산을 막론하고 산행 초반부는 오르막길이다. 해발 160m 옥녀봉 산행 코스는 2.3km인데 처음부터 계속된 오르막길에 숨이 턱 막힌다. 지난 몇 달간 동네 뒷산은 물론, 산책도 제대로 한적 없다보니 체력이 금방 바닥나고 만 것이다. 
 
산행이 느린 사람들은 항상 앞사람 뒷모습만 바라보며 쫓아가야 한다.
 산행이 느린 사람들은 항상 앞사람 뒷모습만 바라보며 쫓아가야 한다.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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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떼자마자 가쁜 숨이 몰아온다. 불과 2년 전만해도 한여름 폭염 경보가 내리는 날에도 지리산 천왕봉(1915m)을 오르고, 무등산(1187m), 광양 백운산(1222m), 지리산 화엄사~노고단(1507m)을 수 차례 올랐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쉬었더니 160m 작은 봉우리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옥녀봉 정상에서 바라본 소박한 전경   

산행 초반 땀을 흠뻑 흘리며 패이스를 조절하니 이제 조금씩 체력도 회복되고 주변이 보인다. 한창 풀과 나무들이 세상모르고 훌쩍훌쩍 자라는 시기여서인지, 등산로를 에워싼 나무들은 짙푸른 녹음을 자랑하고 새파란 하늘은 더없이 아름답다.

이따금 등반길 중간 중간에 있는 의자들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휴식을 하는 것 같다.
 
옥녀봉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 덕천강과 마을, 파란하늘이 참 잘어울린다.
 옥녀봉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 덕천강과 마을, 파란하늘이 참 잘어울린다.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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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한 지 1시간쯤 지나 마지막 가파른 계단 길을 넘었다. 정자가 서 있는 옥녀봉 정상에 도달한 것. 나무에 가려 탁 트인 전경은 보이지 않지만 산 앞에는 덕천강이 유유히 흐르고 저 멀리 논과 밭, 작은 마을들이 사방팔방에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푸른 하늘에 새털구름이 수채화 붓질해놓은 듯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옥녀봉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수채화 붓질을 한 것처럼 더없이 푸르다.
 옥녀봉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수채화 붓질을 한 것처럼 더없이 푸르다.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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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쉬고 있던 다른 산행객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산에 오게 됐냐'는 물음에 그냥 "유명한 것 같아서 왔다"라고 하니 의아해 한다. 사천 옥녀봉이 유명할 리 없다는 눈치다. 이 등산객은 "혹시 통영 옥녀봉을 잘못 알고 찾아온 것 아니냐"라면서 쾌활하게 웃었다.

이어 바로 옆에 있던 산행객은 우리나라 산 중에 옥녀봉, 국사봉 이름이 가장 많다고 넌지시 일러준다. 그러고 보니 각 지역마다 봉화산(구봉산), 옥녀봉, 국사봉은 하나둘씩 있는 것 같다. 재빠르게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이들 이름을 가진 산이 전국에 널렸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옥녀봉 정상에 있는 상석
 옥녀봉 정상에 있는 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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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조금 쉰 뒤 이제 내려갈 시간. 되돌아오는 길은 한번 눈에 익은 길이라 쉴 틈 없이 성큼성큼 내려왔다. 2.3km 왕복 산행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땀을 한소끔 흘리고 점심시간에 맞춰 내려오니 이제 기다리는 것은 맛있는 점심이다. 해당 지역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여행의 가장 큰 묘미 중 하나다.

홀딱 빠져버린 육회비빔밥, 그리고 빨간 소고기뭇국

신흥마을에서 나와 완사전통시장 바로 옆에 완사에서 제법 유명한 육회비빔밥집이 있다. 식당 입구에는 공중파 유명 TV에 소개된 식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TV에 소개된 맛집 치고 제대로 된 맛집이 없다던데... 과연 이 식당은 소문대로 맛있을까.
 
등산 후 주변 식당에서 먹은 육회비빔밥. 육회비빔밥도 맛있지만 빨간 소고기 뭇국의 칼칼한 맛이 일품이다.
 등산 후 주변 식당에서 먹은 육회비빔밥. 육회비빔밥도 맛있지만 빨간 소고기 뭇국의 칼칼한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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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회비빔밥을 주문하니 비빔밥과 함께 국, 깍두기 등 간단한 반찬 너댓 가지가 나온다. 일단 육회비빔밤 모양부터 푸짐한 게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비빔밥 위에 반 주먹 정도 되는, 빨간 양념에 버무린 육회가 정갈하게 놓였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게 먹기도 전에 침이 입안에 가득 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빨간 소고기뭇국. 보통 소고기뭇국은 무를 기본으로 깔고 고기를 푸짐하게 얹은 투명한 국물이다. 하지만 경상도에서는 소고기뭇국에 고춧가루를 넣는다. 콩나물과 파를 송송 썰어 고춧가루를 넣은 빨간 소고기뭇국은 맵지도 않은 게 뱃속으로 내려갈수록 그 시원함과 칼칼한 맛이 느껴진다.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평소에 국물을 잘 먹지 않는데도 이 빨간 소고기뭇국은 육회비빔밥 못지않게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맛을 갖고 있다. 소고기뭇국을 한 그릇 쓱싹 비우고 한 그릇 더 요청했다.

육개장은 진한 국물과 고사리 등 풍부한 재료를 바탕으로 맵고 묵직한 맛을 내지만, 이 빨간 소고기뭇국은 맵지도 않고 비빔밥의 맛을 더 깊게 해준다. 마성의 맛이랄까.

빨간 소고기뭇국만으로 메뉴를 하나 만들어도 될 정도다.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진주, 산청에 살면서 빨간 소고기뭇국을 먹어본 기억이 어렴풋 떠오른다. 지리산 자락에 내린 폭설에 쌓인 눈을 치우던 날, 점심 때 뜨거운 빨간 소고기뭇국에 밥을 말아 먹던 그 맛이 먼저 떠오른다. 추억이 담겨 있어서 더욱더 맛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식당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주변 지형을 머릿속에 담아놨다. 다음에 다시 한 번 오기 위해서다. 해발 160m 아주 작은 사천 옥녀봉을 다녀왔으니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산을 등반했다. 산행리스트에 옥녀봉을 추가로 기록해 놨다. 내 평생 과연 우리나라에 있는 산을 몇 개 정도 등반할 수 있을까.    

태그:#사천, #옥녀봉, #소고기뭇국, #육회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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