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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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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을미년(1895년)에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싸운 인사는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갑오년(1894년)에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제거하기 위해 거병한 인사는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지 않고 있다.

그럴 일은 추호도 없겠지만, 만약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청와대가 외부의 적에 의해 점령이 된다면 어찌 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외적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 국민은 거병해 적을 제압할 것이다. 이때에 대한민국 정부는 외적에 의해 희생을 당한 분에 대해서 그 공훈을 기려, 훈장을 추서해 포상 조치를 내릴 것이다.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 민비를 살해한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이후 일제는 친일 내각을 수립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조치에 맞서 유인석·이소응·허위는 의병부대를 이끌어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웠다. 을미의병에 참여해 공훈을 세운 사람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유공 훈장을 수여했다. 1962년에 유인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이소응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허위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1894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겁박하고 친일 정권을 세웠다. 일본군은 청군과 동학농민군을 제거할 목표로 조선에 군대를 출병했다. 그 첫 조치로 경복궁을 점령해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조선 군대의 무장을 해제했다. 같은 해 6월 23일에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한 나라의 존망이 달린 사태였다. 남의 나라의 궁궐을 불법적으로 무단 점령한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사태를 방관한다는 것은 나라의 멸망을 수용하는 일이었다. '경복궁 점령 사건'에 대해서는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라는 책을 통해 상세히 밝혀놨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동학의 구국투쟁으로 이어지다

동학농민혁명 지도부는 '경복궁 점령 사건'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거병했던 것. 이를 흔히 '제2차 동학농민운동' 혹은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로부터 1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거병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해서는 단 한 명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지 않았다. 너무도 잘못된 일이다.

전봉준은 <전봉준 공초>에서, 2차 거병 이유를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전봉준을 심문할 때에는 일본 영사가 참가했다.
 
전봉준 모습
 전봉준 모습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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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자 : "다시 군대를 일으킨 연유는 무엇인가?"
전봉준 : "일본이 개화라 일컬으며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민간에 알림이 없고 또 군대를 이끌고 우리 도성에 들어가 저녁에 왕궁을 격파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로 초야의 선비와 인민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비분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로운 군대(의병)을 규합하여 일본과 싸워 이 사실을 일차로 따지고자 함이었다."

심문자 : "일본군의 대궐 침범을 어느 곳, 어느 때에 들었느냐?"
전봉준 : "7월 사이에 남원 땅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동학교단의 최고지도자인 최시형은 1894년 9월 18일에 항일전에 나서고자 기포령을 내렸다. 손병희 통령이 같은 해 10월 15일께 기호동학군 5000명을 이끌고 논산에 이르렀다. 최시형도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다. 논산에서 전봉준이 이끌고 온 부대와 연합해 서울을 향해 올라갔다.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교수형 직전의 최시형 선생 동학농민혁명군 최고 지도자 최시형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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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관군을 지휘하며, 동학혁명군을 "모조리 학살하라!"(민나 고로시!)라고 지시하고 외치며, 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 회선포를 가지고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화력의 열세로 동학혁명군은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살육을 당하였다. 1894년 11월부터 1895년 3월까지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동학농민군은 최소 3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했다(박맹수,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 2011, 676쪽).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동학혁명군 30만∼40만 명이 관군, 일본군, 민보군에 의해 학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사망자가 30여 만 명이나 됐다고 기술했다.

남의 나라의 궁궐을 무단 점령하고 불법적으로 내정을 간섭한 세력을 몰아내는 것은 나라를 보위해야 하는 국민이라면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거병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올해 4월 30일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단과 '참여 내용'을 밝힌 책을 발간했다.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동학혁명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9.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 안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9.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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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인사(3644명)와 활동 내역도 소개하고 있다. 일부를 소개한다. 먼저 최시형과 전봉준이다.

"최시형(1827~1898)은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1863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가 되어 최제우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전수받고 1894년 10월 충청도 보은에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의 명교(名敎)를 내린 뒤 1898년 체포되어 처형됨."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 총대장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다 1894년 12월 2일 체포되어 1895년 3월 30일 처형됨."


다음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일본군에 의해 처형당한 항일 선열(101명)에 대한 내용 가운데 그 일부만 소개한 것이다.

"최동린은 1894년 12월 24일 13세의 나이로 석대들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되어 12월 28일 처형당함."(전라도 장흥)

"강기수는 대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전라도 무장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된 후 1894년 12월 30일 일본진영에서 총살당함."

"강대진은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전라도 영광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된 후 1894년 12월 30일 일본진영에서 총살당함."

"신경일은 1894년 장수지역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으며, 야간에 담배 밭 밑에 숨어있다 일본인에게 발각되어 장계 소재지 장터에서 화형 당함."(전라도 장수)

"채홍우는 1894년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예천지역에서 민보군 및 일본군과 싸우다가 8월 28일에 전사함."

"김달덕은 경상도 진주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2일 일본군과 접전 후 체포되어 같은 달 24일 경상도 하동 주교장에서 김성대와 함께 총살됨."

"이두원은 도집(都執)으로서 경상도 사천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음 9) 일본군에게 체포됨."

"김기창은 충청도 정산 출신 접주(接主)로서 34,000명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3일 충청도 예산에서 일본군에 토벌됨."

"김순갑은 집강(執綱) 겸 부선봉(副先鋒)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2월 10일(음 11. 14) 충청도 연산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전사함."

"강운재는 안현묵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해 10월 태안, 서산, 해미 전투, 홍주성 전투에 참여한 후 일본군에게 생포되어 작두형."

"양태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우금티의 동학농민군에게 밥을 날랐으며,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함."(충청도 공주)

"최현익은 1894년 안성 지역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귀가하였으나, 12월경 이웃주민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함."(경기 안성)

"이문보는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1월 5일 평창, 후평 등지에서 관군, 일본군과 전투 후 체포되어 처형됨."(강원도 평창·후평)

"이순서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5년 1월 8일(음 1894. 12. 13) 황해도 봉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됨."

"황찬수는 평안도 영유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전선을 절단하려다가 1894년 10월 황해도에서 일본병사에게 체포되어 처형됨."


동학혁명군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지역 등 전국에 걸쳐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처형된 경우도 있었다. 대개 총살을 당했으며, 화형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작두형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동학농민혁명 참가자에 대해 연구를 하고, 책자를 발간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경의를 표한다.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해 활동한 인사와 그로 인해 관군·일본군·민보군 등에 의해 희생된 인사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1994년 제정, 2019년 일부개정)에 의거해 독립유공자가 된다.

동학농민혁명 참가자 역시 독립유공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이 1만527명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유족분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적용 대상자)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순국선열)"이거나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애국지사)"는 독립유공자가 된다.

여기서 '국권침탈' 시기를 언제부터로 규정하고 있는가에 주목하길 바란다. 국가보훈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을 국권침탈 시기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은 국권침탈시기에 해당하는가? 해당한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로부터"라고 규정하고 있다.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나 싸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항거했다. 그리고 그 반대와 항거로 인해 순국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독립유공자가 되고도 남는다. 일본군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당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항일 선열(101명)은 독립유공자가 될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대상요건'(https://www.mpva.go.kr/mpva/support/indepnedentmerit03.do)에 따르면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분"으로, '애국지사'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한 사실이 있는 분"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 해당자가 있다면, 그 유족은 국가보훈처에 관련 서류(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 제적등본 및 가족관계증명서, 유족의 주민등록등본 등)를 제출하면 된다. 유족이 관련 서류를 작성해 직접 또는 등기우편으로 제출하게 돼 있다. 하지만, 개인 사정에 따라 유족이 서류를 갖춰 국가보훈처에 제출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국가보훈처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협업해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해 일괄적으로 관련 서류를 만들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다운 나라라면 관계기관의 공무원들이 국민을 위해 해줘야 할 일이기도 하다. 

진정한 명예회복의 길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년 제정, 일부개정 2017. 12. 19.)에 의거해 명예회복 활동이 활발해 지고 있다. 특별법 제2조(정의)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로 규정하고 있다. 참으로 잘 만든 개념 정의다.

특별법 제1조(목적)에 의하면 "이 법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國權)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돼 있다. 국권(國權)을 수호하기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를 회복할 책무가 있다. 특별법 제정 이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출범했다.

특별법에 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규정에 근거해 볼 때,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국가보훈처가 관련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 즉각적인 실천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를 회복해주길 바란다.

진정한 명예 회복은 일회성 국가기념일 행사나 몇 마디 말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경복궁을 무단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떨쳐 일어났고, 이로 인해 순국한 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해 '독립유공 훈장'을 추서하는 것이 명예회복의 시작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박용규씨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태그:#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국가보훈처, #문화체육관광부,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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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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