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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오후 7시 청담역에 위치한 페미니즘 카페이자 사회적협동조합 '두잉(DOING)'에서 북토크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가 열렸습니다.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들녘 출판사가 함께 만들고 있는 청년 백과전서 '룰디스'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 기자 말

한때 문학이 세상을 이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문학은 도래할 세상을 예언하는 언어였고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닿고자 했던 사유였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의 객관적 지위는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다. 문자는 수많은 텍스트 중 하나에 불과하며 문학은 대중적이지도 선도적이지도 않은 다양한 미디어의 하나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문학의 지위를 변화시킨 큰 요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의 문학계 스스로가 낙후되길 초래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문단 시스템과 '문학'이라는 성채는 시대가 불러낸 예언의 목소리들을 장르 문학, 여성 문학과 같은 부차적 범주로 국한하며 문학계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다. 과거 문학 권력 논쟁, 신경숙 표절 사태 그리고 오늘날 문단 내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은 스스로 위기를 자초해왔으나 여전히 문단과 메이저 출판사의 권력은 강고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변방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문단 내 성폭력 폭로와 최영미 시인의 미투 이후, 문학을 말하는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을 말하는 문학이 주목받는다. 최근 출판된 오혜진의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이 그러하며 얼마 전 열린 한국여성문학학회 학술대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런 흐름에 어딘가에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도 있을 것이다
 
바꿈 청년도서 <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
 바꿈 청년도서 <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
ⓒ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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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위험한 사람들"

5월 22일 열린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북 토크에는 객석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여성의 언어, 여성의 서사에 대한 사회적 갈증을 반영하는 듯했다. 꼼꼼하게 발언을 준비해온 저자들만큼 객석에서의 질문과 발언도 풍부하고 진지했다.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저자들은 제목에 대하여 그리고 읽기와 쓰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여성이 다는 건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담론에서 다뤄지지 않은 여성들의 일상과 정서를 언어로 만드는 일이며 그래서 종종 "교과서에서는 다뤄지지 않는 문학"의 지평을 개척하게 된다. "글을 읽고 쓰게 되면서 여자들은 모두 위험해진다." 문학에 미친 여자가 많은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다. 

나아가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주장하듯 읽는 것은 읽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혁명적 과정을 거치는 일이며 읽은 사람들은 다시 읽고 또 읽은 대로 실천하며 글쓰기로 나아간다. 사실 읽기도 쓰기도 사유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란 점에서 모두 굉장히 능동적 행위다. 특히 오늘날 SNS를 통해 글쓰기는 일상적인 행위가 됐다. 그래서 읽는 여성은 언제나 쓰는 여성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읽는 자, 쓰는 자 모두가 위험한 존재다. "우리는 모두 위험한 사람들"이다.

"개인에게 뭐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바꿈 청년도서 <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
 바꿈 청년도서 <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
ⓒ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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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19세기 영국 고전문학을 다룬 저자 김태형씨는 자신이 좋아했던 소재에서 출발해 당대의 한국 사회로 돌아와 끝을 맺었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의 내용을 친절하게 펼쳐내면서 150년 전 지구 반대편의 현실로부터 지금 여기의 탈코르셋 운동으로 도약한다. 

그 도약의 근거는 당연히 현실과 19세기 영국 소설 사이의 '공통점'이다. 누구나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면서 그사이 어딘가에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그 균형점이 낭만적 사랑을 성취한 것이든 사랑 없이 남성의 경제력 때문에 결혼한 것이든, 다들 저마다 사회적 조건과의 협상과 타협을 통해 선택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그려지는 여성이 결혼을 택하는 건 미진한 결론일지 모른다. 하지만 19세기 영국 당대의 맥락을 이해한다면 개인을 쉽게 비난할 순 없다. 탈코르셋 역시 마찬가지다. 탈코르셋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개인을 비난하는 방식은 실제 문제가 되는 가부장제 구조를 시야에서 지워버리게 된다. 그래서 "한 줄 요약하면 개인에게 뭐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미치지 않았구나, 세상이 미친 거였구나"

그렇다면 한국의 근대는 여성들에게 어떠했을까? 저자 민혜영씨는여성 작가의 소설에서 나오는 '미친 여자'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미친 여자가 곳곳에서 등장하는 건 근대적 모순의 필연적 결과"라고 말한다. 공식 담론은 평등을 말하지만 현실은 공·사 영역의 분리 하에서 차별이 존재한다. 이런 모순을 대면하고 "주체가 되려는 여성은 시스템에 의해 튕겨 나가 미친 여자"가 된다. 

객석에선 여성으로서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 너무나 많다. 공감을 크게 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결혼과 육아 이후 여성학 대학원을 들어가고 글을 쓰게 된 민혜영씨는 "남성을 기본값으로 한 세계"에선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을 다닐 수 없었고, 미쳐버릴 것 같았음에도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라는 말을 들으며 고통을 온전히 개인적으로만 감당해야 했다. 이런 개인사의 맥락에서 '미친 여자'에게 관심을 두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겠다. 

그는 페미니즘이 자신에게 "내가 미치지 않았구나, 세상이 미친 거였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위로와 깨달음을 주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책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같이 얘기하면서 구조를 자각하는 관계와 공간이 있다면, 그런 대안적 공동체가 있다면 여자들은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이 북 토크 자리에 모인 많은 이들의 심정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꿈 청년도서 <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 저자
 바꿈 청년도서 <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 저자
ⓒ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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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

근대 문학의 초기에서부터 여성 작가들은 '미친 여성'을 그려왔다. 말하는 여성, 글 쓰는 여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신문과 잡지가 만들어져 당대 조선의 담론을 이끌어가던 1920~1930년대는 근대 문학(장)의 형성기였고 동시에 '여성적 문학'과 여성 작가의 형성기였다. 

저자 강남규씨는 당시 '여성적 문학'이라는 담론을 만든 것은 남성 작가들이었다고 강조한다. 신문과 잡지에 투고된 글들을 심사하는 것이 남성이었고, 이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남성적 글쓰기'를 하는 여성들을 '여성 작가'로 인정하면서 '여성적 글쓰기'가 묻어나는 글들은 깎아내렸다. 당시 신문에는 여성 작가에 대한 남성 작가들의 모욕이 즐비했고, 여성 작가의 글을 비평하는 자리에 글조차 읽지 않고 참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 여성 작가와 대비되어 '여류 문사'라는 비하적 범주도 만들어진다. 문학적 성취보다는 스캔들로 팔리는 여성들, 센티멘탈리즘이라는 '여성적' 특성으로 글을 쓰는 경우는 여류 문사로 불리었다. 

오늘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저자의 여성 서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가운데, 문학 출판사들은 '여성 문학'과 '여성적 글쓰기'를 홍보하고 있다. 강남규씨는 이 '여성 문학'이라는 범주가 여전히 '남성 문학'이라는 보편 범주라는 걸 전제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나아가 문단과 문학 출판사의 구조에서 성폭력을 겪어온 여성들의 존재를 상기한다면 상업적으로 '여성 문학'을 홍보하는 건 기만적인 일이다.

"과거와 현재의 로맨스는 다르다"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이 읽은 문학 중 하나는 로맨스 장르다. 저자 손진원씨는 "로맨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장르"이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하는 장르"라고 설명했다. 여성 저자와 독자가 많다는 건 여성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렇다면 왜 로맨스 소설의 주 소비층은 여성일까? 남성 중에도 로맨스 장르를 찾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성들이 더 많이 소비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까닭은 "아마 여성이 가장 정치 투쟁을 많이 하는 영역이 연애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섹슈얼리티나 사랑의 서사를 여성들의 관점에서 그려낸다"는 것도 로맨스의 매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낭만적 사랑과 정상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로맨스 소설은 가능할까? 오히려 페미니즘과 배치되는 것은 아닐까? 실제 모든 로맨스 소설의 관습적 문법은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다. 즉 정상 가족의 구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한계를 로맨스 작가도 독자도 알고 있기에 오늘날 여러 실험적 작품들이 등장하며 장르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가령 최근엔 남자 주인공을 '조신남'으로 그리기도 하며 마초적인 인물이나 장면이 나올 땐 비판적인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이젠 더 이상 과거 로맨스의 남자주인공을 바라지 않는다. 젠더 감수성이 있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다.
 
바꿈 청년도서 <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 북토크
 바꿈 청년도서 <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 북토크
ⓒ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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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입을 열기 시작한 여자들이 낡은 것들을 집어삼키며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시절에 이 네 명의 저자들은 첫 저서를 내고 처음으로 북 토크 자리에 섰다. 이제 이들은 새로운 언어들이 범람하는 당대에, 당대의 가장 첨예한 '위험분자'에 속하게 됐다. 위험한 존재가 됐음을 선포한 이상 더는 물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 위험을 감지한, 수많은 읽고 쓰는 사람들이 마치 '작당 모의'를 하듯 북 토크에 함께 모였다. 

저자들의 발언 중간중간에 자연스럽게 객석에서도 발언이 나왔다. 특히 민혜영씨와 함께 북 토크 참가자 모두가 머리를 맞대며 '미친 여자'의 문학적 계보를 헤아리던 순간은 감동적인 한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위험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과거의 여성 작가를 기억하고 또 미친 여자가 등장했던 소설들을 공유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민혜영씨가바라던 '대안 공동체'의 단면이 아니었을까? 같이 모여 서로의 언어를 나눌 때 위험한 여자들은 진정으로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싸움은 계속된다. 100년 전 식민지 시기에 '읽고 쓰는 여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문단과 사회 전역에 몰아친 페미니즘의 성난 파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말들이 계속 일어나 세상을 위협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바꿈홈페이지, 미디어오늘에 중복게재됩니다.


태그:#바꿈세상을바꾸는꿈, #청년네트워크, #청년도서 , #글쓰는여자는위험하다,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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