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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가 절실할 땐 꼭 주변에 주유소가 없다
 주유가 절실할 땐 꼭 주변에 주유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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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다 보면 가장 피가 마르는 순간이 있다. 바로 기름 잔여량에 빨간 불이 들어왔는데 근처에 주유소가 없을 때다. '이러다 차 멈추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에 입이 바짝 타들어간다.

방송작가로 일하며 최근 맡았던 프로그램 하차하면서 정서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했다. 기름을 '인류애'로 대치하면 된다. 솔직한 사유를 듣고 합당한 기간을 두면서 계약만료 통보를 받았더라면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납득할 만한 사유도 없이 딱 일주일을 남겨두고 통보를 받으면서 소위 말하는 '멘탈이 털린다'는 경험을 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내가 가진 인류애 잔여량에도 경고등이 들어왔다. 

나 혼자 시작한 인류애 프로젝트
 
'한강매직'의 순간
 "한강매직"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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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무기력하게 있던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이 여행을 가자고 꼬드겼다. 마음이 동해서 짐을 꾸렸고, 그렇게 간 안동에서 60대 언니들이 분홍, 노랑 옷을 입고 병아리처럼 웃는 모습을 보았다. 신기하게 마음이 조금 좋아졌다. 메마르던 마음에 마중물을 댄 기분이었다.

'사람이 좋아지는 순간'을 작정하고 프로젝트처럼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인원도 나 혼자, 예산도 제로인 인류애 복원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이 프로젝트는 관찰력이 관건이다. 길에서, 카페에서 만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도 이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집에서 꽤 먼 곳인 연남동에서 일정이 잡혔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다. 마지막으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당산-합정 구간을 지나는데 스마트폰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다. 마치 빙하를 발견한 펭귄들처럼. 덩달아 고개를 들었더니 사위가 환하다.

눈 앞에 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살짝 곁눈질해보니 다들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 구간은 늘 이렇게 슬며시 미소 짓게 된다. 한강보다 한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좋아서다. 일상에 지쳐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들도 이 순간만큼은 무장해제된다. 이 광경을 보며 인류애 눈금이 한 칸 차올랐다. 

헬스장의 아르바이트생과 간식 친구가 되었다 
 
간식 앞에서 우리는 친구
 간식 앞에서 우리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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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건강 관리도 할 겸 헬스장에 꾸준히 나가고 있다. 내가 가는 시간에는 해사한 여자 아르바이트 학생이 늘 반갑게 인사를 해준다. 평소처럼 수건과 사물함 열쇠를 받아드는데, 학생이 "회원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하면서 불쑥 블루베리맛 아몬드를 내민다.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그분이 보는 앞에서 아몬드를 먹었다. 낯을 가리는 나로서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짜내어 "와 정말 맛있네요!"하고 답했다. 그러자 그이가 환하게 웃는다. 그렇게 마무리되나 했는데 그 학생이 며칠 뒤에는 "회원님, 잠시만요" 하더니 저쪽에 숨겨두었던 외국 과자를 내민다. "그때 맛있게 드셔서... 이것도 제가 좋아하는 과자인데 드셔 보세요!" 운동을 하기 전인데도 몸에 온기가 돈다.

기억하고 있다가 일주일쯤 뒤에 마카다미아 초콜릿을 건넸다. 그랬더니 며칠 뒤에 고추냉이 맛 아몬드를 큰 봉지째로 안긴다. 요즘 나는 어떤 맛있는 간식으로 복수(?)를 할까 즐겁게 고민하고 있다.

십수년의 나이차를 넘어 간식 동지가 생긴 기분이다. 헬스장에 다니는데 살이 되려 찌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인류애 눈금이 또 한 칸 차올랐으니 이만하면 남는 장사다. 

사소하지만 커다란 프로젝트

나의 '인류애 회복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 중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성공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사람에게 다친 마음을 사람으로 풀다니, 이 얼마나 사람다운 행위인지.

오늘도 나는 아주 사소한 타인의 행위에서 위안을 얻는다. 쓰레기를 줍는다던가, 뒷사람을 위해 유리문을 잡아준다던가 하는 것들. 덩달아 내 행동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하다못해 길 위에서 스치는 사람들에게도 한결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게 되었고, 편의점에 가서 인사라도 한 마디 더 건네본다. 아직도 세상은 배울 일이 너무 많다. 

부디 나처럼 사람에게 마음을 다쳤던 분들이 이 글을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방 안에 들어앉아 '다 망해라' 같은 말을 늘어놓고 싶은, 그런 분들. 가진 모든 기운을 끌어모아 세수를 하자. 그리고 바깥에 나가자.

일단 나가는 것이 이 프로젝트 1단계다. 그리고 나서는 세심하게 보고, 주의깊게 듣기만 하면 된다. 온 힘을 다해 사람들의 귀여운 면을 찾아보자. 그러다 보면 또 집까지 갈 힘이 생긴다.

프로젝트의 작은 결과물들이 쌓이면 친구를 만날 힘이, 새로 관계를 시작할 힘이 생긴다. 기억하자. 사람에게 상처받을 일이 차고 넘치지만, 결국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brunch.co.kr/@relaxed)에도 실립니다.


태그:#상처, #치유, #한강,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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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밤이 있는 한 낭만은 영원하다고 믿는 라디오 작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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