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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나 서대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국 최초의 종합병원인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건 신촌, 연세대 정도. 병원의 이름인 '세브란스'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민혜숙 작가의 <세브란스 병원 이야기>를 읽으며 그 궁금증을 해소했다.
 
"나는 몰랐다. 세브란스 병원에  에비슨의 동상이 서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것도 병원에 가 보지 않았다면 변명할 구실이라도 있을 것이다. (중략) 그게 제중원 건물이라는 것을 몰랐다.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매일 버스를 내려 백양로를 따라 오르내리면서도 세브란스가 그냥 병원 이름인 줄만 알았다. 그가 이 땅을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것도... (중략) 하느님이 에비슨 박사의 파트너로 보내서 그를 후원했던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고..." (3~5쪽)
 
작가의 머리말 일부다. '나는 몰랐다'는 작가의 말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놓치고 만 '세브란스'에 대한 지식의 한계를 대변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책을 펼치고 만난 머리말의 첫 문장, '나는 몰랐다'에 한동안 눈이 머물렀다. 

이러한 간절함은 "나는 연세대학에서 에비슨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언더우드에 대해, 세브란스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연세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언더우드나 에비슨, 그리고 세브란스에 대해 알고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또한 '그들이 모르고 있다면 가르쳐주지 않은 선배의 탓일까?', '학교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학교 탓일까?'라는 질문을 소설 형식으로 끌고 가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풀어간다.

올리버 알 에비슨은 알몬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시기가 다가온다. 그는 자신의 잣대에 눈금을 하나 더 새기기 위해 퍼드에 있는 사범학교에 진학기하기로 작정한다. 그 과정을 마치면 초등학교 교사자격인 제3종 교사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교사자격증이 있다고 바로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반쯤 포기 상태에 접어들 즘, 스미스 폴즈에서 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하게 된다. 1878년 1월 올리버는 스미스 폴즈에 있는 허튼 초등학교의 교사가 된다. 

우리나라 의사를 양성한 서양 의사

그는 대장장이 아버지 반스 씨의 딸 제니와 가까워진다. 그런데 제니의 가족과 가까워질수록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바로 자신의 월급으로는 제니와의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상급 교사자격증을 얻기 위해 자치령의 수도인 오타와의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한다. 3년의 과정을 마치고 스미스 폴즈로 돌아온다. 그러나 제니의 반응은 냉랭하다. 제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알몬트의 집으로 돌아온다.

어느 날, 토론토 약학교의 셔틀 위스 교장에게서 약학교의 식물학 교수가 돼달라는 전보를 받는다. 그는 제니와의 결혼과 교수가 되고 싶다는 또 다른 꿈에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제니의 이해로 교수가 되고 생활도 안정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셔틀 위스 교장의 제안으로 토론토 의과대학교에 입학한다. 1년 과정을 마친 뒤, 제니에게 청혼한다. 그리고 1885년 7월 28일, 올리버와 제니는 결혼식을 올린다.

늘 행복하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던 올리버에게 장남인 글래드 스톤이 돌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 나더니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올리버는 자신의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속절없이 하늘나라로 보낸 데 대해서 허탈감을" 맛본다. 삶과 죽음의 사이는 무척 가까웠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캐나다 감리교회 해외 선교부가 올리버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두 아이가 성홍렬에 걸려 집에 격리된다. 주변에서는 하느님의 뜻이라며 파송에 대해 고민해 볼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의 아내 제니는 말한다.

"한국 땅에서 당신이 꼭 필요한가 봐요. 당신은 거기에서 큰일을 할 거예요."

1893년 7월 16일, 일요일 오후 마침내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다. 그는 베어드 목사의 서재에서 한 동안 기숙하다가 8월 말에 제물포행 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그 배에서 미국인 전권 공사인 알렌을 만난다.

갑신정변의 회오리 속에서 알렌은 핏줄을 봉합하는 수술에 성공한다. 이후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고 소문이 소문을 불러 고종은 알렌의 소원인 병원을 만들어 준다. 그 병원이 '중생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제중원'이다.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이 병원의 영어식 명칭은 '왕실병원'이다. 이런 알렌과의 대화는 언더우드의 호의로 이어져 서울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11월 1일 자로 왕립병원인 제중원 의사로 일을 하게 된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의사를 중인 계급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미국에서 의료인을 보내주는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과목씩이라도 가르치겠다는 목표로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한다. "혹시 의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라는 질문과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에 그들의 표정은 난감해졌다.

세브란스의 기록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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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포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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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 가족은 건강 안식년을 얻어 캐나다로 돌아갔다. 에비슨은 서울 선교부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 편지에는 한국에 현대식 병원을 건립할 수 있도록 1만 달러의 모금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하여 에비슨은 "그렇습니다. 한국에는 현대식 병원이 없습니다. 반드시 제대로 된 병원이 있어야 합니다"라는 대답으로 한국에서의 병원 건립 타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루이스 에지 세브란스, 1839년생으로 클리브랜드 최초의 의사였던 데이비드 롱 박사의 손자였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장로교회의 장로로 평생토록 기부를 했다.

1900년 가을 에비슨 가족은 서울로 돌아왔다. 병원을 지으려면 부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병원 부지를 고종 임금이 제공하고 싶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그러나 일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 저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병원 건립 작업은 계속됐다.

1904년 9월 23일 오후 5시, 경성역 맞은 편에 멋진 건물이 완성됐다. 병원 건물을 바라보는 에비슨은 감격스러웠다.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의 문이 세상을 향해 열린 것이다. 아내 제니의 눈에서도 에비슨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국 땅에서 40년 이상 헌신하고 에비슨과 제니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제니의 형제도 10명이나 됐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형제들과 자식이나 친지 집을 방문하며 마지막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에비슨이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학교도 방문한다. 그런데 제니가 언더우드 집에서 갑자기 병들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한국을 떠나면서 제니 한 사람을 의지했는데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그는 절망과 고독 속에서 다시 일어나 한국에서의 42년을 글로 남기기 위해 기록한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다. 이러한 에비슨의 기록이 없었다면 세브란스와 연희 전문학교의 기록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96세의 일기로 사랑하는 아내 제니의 옆에 안장됐다. 

세브란스가 없었다면 한국 최초의 종합병원은 더 늦게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자 했던 세브란스의 마음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란다.

세브란스 병원 이야기 - 올리버 알 에비슨과 세브란스

민혜숙 (지은이), 케포이북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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