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논픽션>의 포스터

영화 <논픽션>의 포스터 ⓒ (주)트리플픽쳐스


영화 <논픽션>의 화두는 해묵은 논쟁일지 모른다.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는 기로에서 종이책의 위기를 고한 지는 이미 오래이지 않은가? 나는 물론 종이책 추종자다. 신문도 여전히 종이신문을 펼치고 훑어야만 제대로 본 것 같은 아날로그 형 인간이다. 지하철에서 신문을 펼쳐보다 즉각, 원시인을 본 듯 바라보는 시선을 여러 차례 받은 바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논픽션'이 적절한 제목일까 싶었다. 원제를 찾아보니 'double vies(이중생활)'인데, 이 타이틀이 더 적절할 듯.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의 논쟁도 논쟁이거니와, 영화 속 인물들의 삶도 디지털의 쓰나미를 밀어내지는 못한 채, 내면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설정이라 그렇다.

셀레나(줄리엣 비노쉬)와 알랭(기욤 까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 소설가 레오나르(빈센트 맥케인)와 발레리(노라 함자위)의 지인들이 등장해 무진장한 말의 향연이 펼쳐진다. 상당히 지적인 대화인데, 듣고 보면 더 이상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종이책, 전자책?
 
편집자인 알랭은 종이책과 전자책의 기로에서 전자책으로 갈래를 잡으라는 디지털 마케터 로르(크리스타 테렛)의 촉구에 아직 망설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자책의 성장세가 주춤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전자책이 종이책에 비해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의 판매를 큰 폭으로 앞지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뜨는 것은 오히려 오디오 북이라니, 이 반동적 현상은 무엇을 반영하는 걸까?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출판 생태계는 프랑스보다 훨씬 열악하다.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동네 작은 서점이 활로를 개척하며 나름 도서 시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인터넷의 거센 파고를 넘기 힘들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집으로 배달되는 서비스를 마다하기 어렵고, 중고시장의 과열은 정말 너무하지 않나 싶다. 어떻게 출판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책을 사들여 중고로 되파는지 모르겠다. 새 책인 중고서적을 구입하며 굉장히 알뜰한 양하는 지인들을 보면 한숨이 나오곤 한다.
 
디지털의 발달은 만인이 저자가 되는 시대를 이끌었다. 누구나 SNS에 글을 쓰게 되면서 글이 넘쳐나고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인터넷이 글쓰기와 읽기에 기여했다, 아니다로 논쟁을 벌인다. 누구나 쓸 수 있게 됐으니 민주주의에 기여했다고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떤 이는 인터넷의 민주주의는 허구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정말 인터넷이 민주주의에 기여한 걸까? 그렇다면 심화되는 정보의 비대칭과 수많은 가짜 뉴스의 범람, 그리고 점점 허약해지는 디지털 문해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게다가 <논픽션>의 디지털화에 대한 논쟁은 모두가 디지털에 흡수된다는 전제하에 전개되는데, 나는 이 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디지털 세계의 급속한 발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결코 적지 않은 '디지털 난민'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논쟁은 이들의 존재를 아예 논외로 하고 있다.
 
 영화 <논픽션> 스틸컷

영화 <논픽션>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보았듯이, 디지털 난민은 철저히 소외당한다. 즉 인터넷이 빛의 속도로 발달한다고 해서 그 세계에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애써보지만, 디지털 세상의 속도에 뒤처져 자신을 보호할 방도를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그렇다면 소수자를 배제시키는 디지털 민주주의가 과연 민주주의에 기여하고 있는 것일까?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거나 키웠던 부모라면, 아이들의 디지털 몰입에 심각하게 고민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책을 읽히고 싶은데 도무지 책이랑 가까워지지 않는 아이. 디지털 기기에 접신하는 순간, 아이들의 영혼은 탈탈 털리고 만다. 아이들이 현란하고 자극적이고 이미지 중심적인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지면, 책은 즉각 화석이 돼버린다.
 
청소년의 디지털 폐해는 책뿐 아니라 영화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0대는 영화 볼 시간이 없기도 하겠지만, 20대조차 영화 점유율이 낮다고 한다. 왜? 청소년이 휴대폰을 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최대 시간이 고작 15분. 그러니 2시간 이상 몰입해야 하는 영화를 보느라 영화관에 진득하니 앉아 견딜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과 접속한 세대는 15분마다 '화면 깨우기'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세대에게 책 읽기는 이미 능력이다. 그런데 정말 청소년만 그럴까? 지하철에서 휴대폰하고만 눈 맞추느라 고개 숙인 당신, 어른 아닌가요?
 
작가는 무엇이든 써도 되는 것일까?
 
 영화 <논픽션> 스틸컷

영화 <논픽션>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논픽션> 속 또 하나의 논쟁은 '픽션의 소재성'에 있다. 소설가 레오나르는 자전적 소설을 쓰는 작가다. 좋게 얘기해서 '자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과 주변인의 사생활을 터는 것이다. 사귀었던 여성들과의 연애사를 너무나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머지, 그를 아는 지인이라면 누구라도, 소설 속 여성이 아무개일 거라 추측할 수 있을 정도다.

서점 북토크에 초대된 레오나르가, 소설가는 누구나 자전적일 수밖에 없다는 자기변호를 하자, 상대 여성도 그렇게 생각하냐며, 소재를 제공했으니 소설 속에 등장한 그 여인에게 돈을 지불하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는다. 소설가의 소재가 온전히 소설가의 것만으로 활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를 던지는 지점이다.
 
연극 <단편소설집>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소설의 소재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을 다루고 있다. 창작과 교수인 루스 스타이너(전국향)는 리사 모리슨(김소진)의 소설을 지도한다. 모녀 관계처럼 친밀해지다 보니, 제자 리사는 스승 루스의 사생활을 알게 되고, 리사는 자신의 소설 소재로 스승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유혹을 밀어내지 못한다. 결국 리사는 루스의 이야기로 소설을 발표하고 성공을 거둔다. 자신의 소설 쓰기의 '출발점'을 제공했던 스승의 아픈 얘기를 꼭 써야만 했을까? 제자의 소설 소재로 전락한 것을 안 루스는 "너는 내 인생을 훔쳤어"라며 분노한다.
 
연극을 보고 나온 내 딸이 "엄마, 리사 너무 못됐지 않았어? 나라면 용서 못해"라는 말에, 나는 선뜻 "맞아, 그러면 안 되지"라고 잘라 말하지 못했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에 복무할 뿐'이니, 무엇이든 쓸 수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지만, 경험을 떠난 상상력에만 힘입어 쓸 수 있다고도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까발려진 당사자가 나라면,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쿨하게 반응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레오나르는 알랭을 편집자로 만나 소설을 펴내왔다. 하지만 레오나르의 이번 소설 '마침표'에 알랭은 마음이 가지 않는다. 언제나 주변 여성과의 관계를 활용해 글을 쓰는 레오나르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다. 보다 솔직히는 뻔한 레오나르의 책이 팔릴 것 같지 않아서이다. 레오나르의 친구이자 애인인 셀레나는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으로 분해 성적인 관계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을 보고 몹시 낙담한다. 소설가는 무엇이든 쓸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벌거벗겨진 채 등장하는 자신을 읽고, 마음이 다치는 당사자의 피해 또한 불가피하다.
 
이중생활
   
 영화 <논픽션> 스틸컷

영화 <논픽션>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알랭은 디지털 마케터와 셀레나는 레오나르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한다. 알랭과 셀레나는 서로의 뭔가 다른 기운을 눈치채고 있지만 암묵한다. 서로를 볼 때 더 이상 가슴이 두근대지 않는 권태가 찾아온 부부에게 달리 방법이 없음을 인정한 것일까? 이들은 부부관계를 파국으로 끌고 가지 않는 선에서 이탈했던 서로의 지점을 제자리로 돌린다.
 
배우자를 속인 이중생활에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20년 내내 같은 욕망을 유지할 수는 없어. 부부는 욕망만으로 살지 않아"라는 셀레나의 말은 어쩌면 오래된 부부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들은 욕망을 따른 자신들을 지나치게 다그치지 않는다. 너무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 지점에서 회귀하면서, 연인에서 친구로의 역할 변환에 합의한다. 다만 돌아서면, 다시 되돌아가지 않기까지. 우리에게 이런 부부관계가 가능할까?
 
그럼에도 종이책인 이유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틈바구니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또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은 있는지, 그 능력은 어떻게 배양되는 것인지, 논쟁은 다시 원점이다. 디지털과 다른 종이책의 효용은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종이책은 한 사람의 긴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할 수 있는 인내심과 말 걸어오는 저자의 질문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소설이라면, 인물 속으로 이입되는 놀라운 빙의의 순간과 소설이 펼치는 세계 속으로 던져지는 시간여행자로서의 시공간적 초월성을 접하게 된다. 이게 어찌 종이책만의 전유물이냐고 반박한다면 대답은 궁색하다. 다만, 내 일천한 경험으로는 디지털 세상에서 이와 같은 기쁨을 만끽해본 적이 없다는 것뿐.
 
종이책은 손에 쥐는 무게감과 책장을 넘기는 종이의 질감으로, 책의 감각과 마주하기를 요구한다. 종이책은 디지털 기기처럼 여일한 기계적 느낌이 아니라, 각기 다른 두께와 종이의 질감을 느끼게 된다. 디지털 기기 속 수많은 글자들은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하며 휘발되어 버리지만, 책의 글자들은 책장을 넘겨도 책 속에 남아있다. 마음에 '덜컥' 들어선 문장들에 밑줄 그으면서, 사로잡힌 페이지에선 책장을 넘기기조차 아까워하면서, 독자에게 종이책은 생물로 존재한다. 이런 종이책이 사라지리라고 나는 믿기 어렵다. 종이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같은 마음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게시 예정
논픽션 줄리엣 비노쉬 연극 단편소설집 종이책의 위기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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