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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놀이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별다른 장난감이 없이도 매일같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 자기만의 놀이를 만들어가는 내 아이를 관찰하면서부터였다. 아이는 집 안에서 신발 끈, 털실 뭉치, 천, 이불, 비닐봉지, 각종 상자, 주방기구 등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거나 이런저런 상상 놀이를 하고 놀았다. 놀이터에 나가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가며 상상 놀이, 역할놀이를 하며 뛰어놀았다.

아이들에겐 놀이가 밥
 
집에 있는 시간이라고 놀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아이는 그야말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놀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라고 놀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아이는 그야말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놀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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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이는 아침 먹고 두 시간, 점심 먹고 두 시간, 저녁 먹고 두 시간을 밖에 나가 놀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라고 놀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아이는 그야말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놀았다. 선천성 질환으로 인해 일찍부터 거쳐야만 했던 세 번의 수술 직후에도 아이는 놀이터 모래밭에 가서 삽으로 흙을 파고 친구와 침대 위를 뛰었다. 아이들에겐 놀이가 밥이고 일이며 치유의 수단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그런 아이가 너무나도 신기해 관련 책도 여럿 찾아 읽었다. 편해문의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수전 린(Susan Linn)의 <상상놀이를위한 변론>(The Case for Make Believe), 로렌스 J. 코헨(Lawrence J. Cohen)의 <장난스런 육아>(Playful Parenting) 등은 나의 지침서였다. 엄마로서 나는 누구보다도 아이의 놀이, 놀이 욕구에 대해 이해하고 놀이 자체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1:12 보육현장에선 불가능했던 '자유놀이'

하지만 내 아이 하나와는 얼마든지 가능했던 일들이 어린이집 보조교사로서는 좀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이들을 모두 내 시야에 담을 수 없기에 아이들의 놀이는 나의 본심과 상관없이 제지되거나 방해를 받았다. 그 사이 아이들의 마음은 이해받거나 존중받지 못했다. 

정교사와 내가 교실 공간을 반으로 나눠서 아이들을 보지만 실제로 아이들을 정확히 '반으로 나눠' 본다는 게 말처럼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공간과 시간의 효율을 이유로 교구장과 탁자 등으로 '영역별 놀이 센터'를 구획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정해진 놀이만을 하게끔 유도해야 하는 날이 많다. 놀다 보면 이 놀잇감을 저쪽으로 옮겨 놀고 싶기도 하고 흐름에 따라 장소를 옮겨가며 놀기도 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데도, '교사'로서 보육 현장에 들어가 있으니 아이들의 그런 자연스러운 놀이를 보장해주기가 어려웠다. 

특히 인력 부족으로 옆 반의 좀 더 어린 아이들과 반을 합쳐 24명의 아이를 두 명의 교사가 봐야 하는 날이면 아이들의 자유 놀이는 더는 '자유'롭지도, '놀이'답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구획된 놀이 센터 안에서 그 안에 주어진 놀잇거리만을 가지고 놀아야 했고, 어떤 놀잇거리는 교실이 너무 어질러진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했다. 대신 아이들은 5분, 10분짜리 모래시계를 놓고 시간을 재어 가며 각 놀이 센터를 '순회'했다. 아이들 각자의 흥미에 따라 선택한 놀잇거리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놀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나지만 1:12의 교사 대 아동 비율로는 그 믿음을 지킬 수 없었다.
인력과 공간부터 공통 조건으로 주어져야

경험상 1 : 8 정도의 비율만 되어도 아이들에게 훨씬 많은 자유 놀이가 가능했다. 옆 반과 합쳐 24명의 아이를 볼 때, 교사가 둘 있을 때와 셋 있을 때 사이에 차이가 컸다. 만 4세, 5세 아이들은 서너 명씩뭉쳐 놀기 때문에 한 번에 두 그룹 정도의 아이들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끼리 다툼이 생기거나 소외되고 다치는 아이들이 생길 때 '의식적 훈육'(아이를 존중하는 돌봄)법을 이용해 중재하고 개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어린이집 교사 대 아동 비율은 만 4~5세 기준으로 1:20. 이런 비율로는 결코 아이들의 '진짜' 놀이를 보장할 수 없다.

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놀이 공간 확보다. 실외 놀이/모래터, 작은 텃밭, 그리고 실내 놀이 전용 공간, 미술 전용 공간 같은 것들이 갖춰져 있어서 때에 따라 활용할 수 있어야 다양한 자유 놀이가 가능하다. 몇 년 전 이곳 가정 보육 기관에서 잠시 시간제로 일했을 때 가장 좋았던 점이 집 앞마당/정원 공간을 아이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그곳 아이들은 오전 자유 놀이 세 시간을 꽉 채워 바깥에서 놀았다. 

하지만 한국의 어린이집 중엔 충분한 놀이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데가 많다. 현재 영유아보육법상 보육 규정을 살펴보면 50인 미만의 아이를 보육하는 기관의 경우 놀이터 설치가 의무가 아니고 대신에 주변 아파트/공원 놀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교사 한 사람이 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근방 아파트/공원 놀이터에 나가다간 사고가 나기에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충분한 바깥 놀이는 커녕 바깥 산책 한 바퀴 하기도 어려운 현장도 존재한다. 

원의 규모가 크고 자원이 풍부해 교사와 다양한 놀이 공간이 많이 확보되는 곳과 인력과 공간이 없어 온종일 하나의 공간에서 놀이와 식사, 낮잠, 간식 모두를 해야 하는 아이들 사이의 틈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인력과 공간부터 공통으로 주어져야 한다. 지난번 글에서처럼(돌봄도 노동, 함께 돌볼 사람부터 늘려야) 낮잠을 자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독립된 실내 놀이 공간이 있고, 보조 인력으로 투입되는 교사들이 더 있으면 아이들의 자유 놀이도 더 늘어날 수 있다.

진짜 놀이 가치를 아는 교사, 부모가 필요해

인력과 공간만큼 또 중요한 것이 바로 놀이에 대한 교사와 부모의 인식이다. 놀이와 배움은 떨어져 있지 않다. 아이들은 많은 경우 놀면서 무언가를 스스로 터득한다. 하지만 모든 놀이가 반드시 어떤 형태의 배움이나 학습과 인위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런 연결은 현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관찰하고 기록하다 보면 교사 선에서 자연스럽게 가능해지는 지점들이 있다. 교사가 반 아이들을 잘 알고, 아이의 관심사와 발달 상황에 맞춰 환경을 구성하면 아이들은 그 속에서 놀면서 자연스레 어떤 '성취'에 도달하게 된다. 아이들이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환경을 구성할 필요는 있지만 특정한 목적, 특히 '학습'이라는 목표를 위해 놀이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번 개정 누리과정안을 살펴보면 놀이를 학습을 위한 수단으로 가져가는 기존의 사고를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닌가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 영역별로 학습 목표처럼 활동 내용을 제시한 대목("물체를 세어 수량을 안다"-자연탐구)이나 "교사가 계획한 활동까지 놀이를 통해 배우도록 한다"는 대목이 그렇다. 이런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면 아이들은 진짜 놀이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놀이 자체이지 놀이 '중심' 학습이나 '놀면서 배우는' 시간이 아니다. 

몇 년 전 미국인 친구가 운영하는 가정보육 기관에서 잠시 일을 도와주던 때, 그 집과 몇 집 떨어져 있지 않은 이웃에서 이 친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한 적이 있다. 비가 오는데 아이들을 밖에서 놀게 하고 있으니 아동학대가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웃에게 보육 기관은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조용히 앉혀 가르치는 곳'이지 비 오는 날 밖에 내보내 놀게 하는 곳이 아니었던 탓이다.

시간과 공간, 마음의 여유가 충분한 보육현장을 꿈꾸며

하지만 나는 바로 그곳에서 보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원에 나가 첨벙첨벙, 진흙탕 물을 튀겨가며 노는 아이들의 생생한 눈빛을. 세 시간 꽉 채워 자유 놀이를 하고 들어와서 점심을 먹고 치우고 나면 다시 실내에서 온갖 상자를 쌓고 해체해 가며 자유 놀이를 이어가던 아이들의 생기를. 그렇게 놀아본 적 없이 큰 나는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점퍼를 뒤집어쓰고 아이들의 놀이를 지켜보느라 힘들었지만, 아이들이 놀이 밥을 충분히 먹고 있단 생각에 뿌듯했던 날들이었다. 

놀이 중심으로 개편되는 누리과정이 아이들에게 진짜 놀이 밥을 줄 수 있으려면, 인력과 공간, 그리고 우리의 인식부터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아이와 부모, 교사, 그리고 이웃공동체가 공동으로 해내려 노력할 때 아이와 어른 모두 행복한 기관보육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누리과정 개편과 함께 우리의 보육 환경이 조금 더 진보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변화한 보육 현장은 아이들도 교사들도 조금 더 여유 있게 생활하면서 모든 아이가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성장할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

태그:#기관보육, #자유놀이, #누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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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활동가로 살고 싶은 사람. 아이의 선천성 희소질환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T 증후군)'을 계기로 <아이는 누가 길러요>를 썼다. 한국PROS환자단체 대표, 부천시 공공병원설립 시민추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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