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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는 냉장 보관하면 안 된다고 들었다.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로 알고 여태 잘 따르고 있었다. 파인애플처럼 과즙이 많은 과일이라면 차게 먹는 게 제격이지만, 바나나는 차갑지 않아도 맛있으니까.

그러나 여름이 문제다. 아직 익지 않은 바나나는 괜찮지만, 서서히 검은 반점이 퍼지고 후숙이 되기 시작하면 맛이 정점에 이르기도 전에 불청객을 단체로 만나야 한다. 다름 아닌 날파리 떼. 볼 때마다 신비롭기 그지없다. 한 마리도 없던 것이 수십 마리가 되는 건 순식간이다. 

날파리가 무서워서 후숙이 된 바나나는 부지런히 냉동실에 넣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냉동 바나나가 아닌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냉동실에 바나나가 있는데도 나는 또 새 바나나를 집에 들이고, 날파리가 무서워 바나나는 계속 냉동실로 들어갔다. 바나나 수집상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건가.

며칠 전, 잘 익은 바나나를 냉장실에 넣었다. 날파리는 두렵고 냉동실은 이미 바나나 집합소니까. 소심한 나는 별 걱정을 다했다. 하루 만에 상해서 못 먹고 버리는 건 아닐까, 버리기도 힘들게 녹아내리는 건 아닐까. 한 송이를 다 먹는데 며칠이 걸렸고 어쩌다 보니 냉장 바나나를 관찰하게 됐다.

바나나는 멀쩡했다. 다 먹기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고 여전히 달콤하기만 했다. 혹시 영양소가 파괴되었을 수도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맹점이 있는지도 모르니 남에게 섣불리 추천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앞으로도 이 방법을 이용할 생각이다. 당장 먹지 못할 바나나는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 보관할 것.

그러고 보니 바나나는 절대 냉장 보관하지 말란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이유가 뭐였는지도 당최 모르겠으니 허무한 노릇이다. 어디 바나나뿐이랴. 별 거 아닌 편견도 한 번 각인이 되면 깨기가 힘들다. 하물며 사방팔방에서 확성기를 들고 강조하는 말들은 어느 새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머릿속에 자리잡기 일쑤다.

동물성 단백질이 반드시 필요하다,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만 한다, 비타민을 챙겨 먹어야 한다, 다이어트의 핵심은 고단백 저탄수화물이다 등등의 말들도 그렇다. 많은 현대인들이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을까. 과연 이것은 모두 과학적으로 밝혀진 이야기일까.

그 이론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의사가 있다. 본인의 연구는 물론, 지금까지의 과학이 밝혀낸 근거를 토대로 우리 몸에 좋은 것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녹말이다.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의 원제는 'THE STARCH(녹말) SOLUTION(솔루션)'이다.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 책표지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 책표지
ⓒ 사이몬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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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존 맥두걸 박사는 18세 때 뇌졸중에 걸려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한다. 풍족히 먹을 수 없었던 부모님의 사랑 덕분에 매우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을 먹었고 안타깝지만 그것이 독이 되었던 것. 그러나 저자가 만난 의사들은 임시 처방만 내릴 뿐, 만성질환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갖게 된 저자의 궁금증은 의사가 된 뒤에도 한동안 풀리지 않았지만,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책임 의사로 근무하며 답을 찾게 된다. 그가 주목한 사실은 이렇다. 농장의 이민 1세대들은 만성질환에 시달리지 않는데 반해 2세대, 3세대로 갈수록, 다시 말해 미국식 식단을 받아들여 고기와 유제품 섭취가 늘어날수록 각종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저자는 인류가 수만년 동안 녹말 음식을 주로 섭취했고 그에 맞게 진화했음을 주장한다. 우리의 침, 치아, 내장기관 등이 모두 녹말을 소화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고대에도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은 동물성 식품을 과다하게 섭취했고 이들 역시 동맥경화와 비만, 치아질환 등을 앓았다고 한다.

녹말 중심의 식사가 건강하다는 것을 알아낸 사람은 저자가 처음이 아니며 이미 수많은 논문들이 그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진작 고기와 유제품이 질병을 만들고 과일과 채소, 감자, 옥수수, 통곡물 등이 건강을 유지시킨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다만, 밝혀진 그것이 거대산업에 밀려 확산되지 못했을 뿐.

많은 현대인들은 다이어트를 원한다. 그래서 허기를 참고, 음식 섭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저자는 얼마나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녹말은 배불리 먹어도 살이 찌거나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 녹말은 단백질이나 지방과 달라 애초에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낀다.

또한, 단백질을 과잉 섭취하면 이를 배출하기 위해 간과 신장에 무리가 가고, 뼈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지방 역시 초과 섭취되면 간과 심장에 저장되고 콜레스테롤 역시 피부와 힘줄, 동맥에 쌓여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녹말은 초과 섭취하더라도 지방으로 전환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이다.

단, 여기서 말하는 녹말은 가공을 최소화한 자연상태의 음식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빵, 파스타, 라면 등의 정제탄수화물이 아닌 현미, 감자, 고구마 등의 밭작물을 말한다. 저자는 수많은 가공을 거치고 화학적 재료들을 첨가한 공장제품과 자연 그대로의 녹말 음식을 같은 탄수화물로 봐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한다.

그는 식물성 음식으로도 충분한 칼슘과 단백질, 철분을 모두 섭취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동물성 식품의 필요성에 세뇌되는 것을 우려한다. 고기, 생선, 계란,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이 영양학적으로 좋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동물성 식품에는 독성물질, 즉 과도한 단백질, 지방, 콜레스테롤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미농무부 및 세계보건기구(WHO)도 1일 단백질 요구량은 40-60g을 추천하고 저자는 이것은 식물로도 충분히 섭취 가능한 양이라고 말한다. 미 심장협회 또한 단백질 섭취를 위해 굳이 동물성 식품을 먹을 필요는 없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 산업의 홍보와 유아기에 시작된 교육, 그렇게 강화된 습관과 감성 때문에 사람들은 단백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고 책은 설명한다. 저자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음식 단 한가지를 꼽으라면 유제품이라고 말한다.
"왜 인간만이 다른 동물의 젖을 먹는가 말이다. 영양학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생리학적으로도 진화론적으로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p128)

유제품의 높은 지방 함유량이 대단히 위험하며 단백질과 유당 또한 각종 암, 알레르기, 자가면역성 질환의 주범이고 관절염, 천식, 다발성경화증 등을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유제품 자체로서도 좋지 않지만 공장식 축산의 오염 실태는 위험을 가중시킨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저탄수화물 고단백 식사가 정답이라고 익히 들어온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명확한 근거를 들어 이를 반박하고 녹말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그의 주장에 나는 어느 정도 설득되었다. 단, 그가 권하는 녹말 음식은 결코 공장 식품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한 권의 책으로 기존의 관념이 바뀔지 아닐지는 개개인의 독자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탄수화물 섭취를 늘리라니, 누군가에는 영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책의 주장에 대한 신뢰 여부는 각자의 몫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는 필요한 듯하다. 까딱하면 내 평생 냉동 바나나만 차곡차곡 모을 뻔 했으니 말이다.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 - 녹말음식은 어떻게 살을 빼고 병을 고치나, 개정증보판

존 A. 맥두걸 (지은이), 강신원 (옮긴이), 사이몬북스(2017)


태그:#어느 채식의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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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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