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3 08:32최종 업데이트 19.05.23 08:32

근래의 탑골공원. ⓒ 황정수


탑골공원의 근원이 되는 '원각사십층석탑'은 하얀 납석(臘石)으로 만들어져 '백탑(白塔)'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이 탑의 주변에는 많은 문학가들이 살았다. 이들을 일러 후대 연구자들은 '백탑시파(白塔詩派)'라 부른다.

1768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백탑 부근으로 이사를 온 후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백동수,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박제가 등이 찾아오면서 자연스레 '백탑시파'가 형성되었다.


백탑시파 문인들은 주로 탑골 주변에 거주하였다. 유득공·이덕무가 대사동에 살았고, 박제가는 남산 밑 청교동에 살았다. 이들에게 있어 '백탑'은 삶의 터전이자 그들이 추구하던 학문인 '북학'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탑동아회도'
                   

작가미상 '탑동아회도' ⓒ 황정수

 
백탑시파의 구성원들은 백탑이 있는 탑골에서 어울리기도 하고 한양 근교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술을 마시며 시를 짓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그림 중에 이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그림이 한 점 남아 있다.

이 작품은 백탑이 바라다 보이는 공터에서 여섯 사람이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 '탑동아회도(塔洞雅會圖)'라 부를 만한 것이다. 내용은 영락없는 '탑동시회(塔洞詩會)'의 모습이다.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 이 그림은 아쉽게도 작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제작 시기는 1800년대 후반으로 보이며, 그림의 기법과 솜씨는 기야(箕埜) 이방운(李昉運)이나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의 문인화 냄새가 난다. 사생 장소는 절이 바라다 보이는 고즈넉한 곳이었으며, 참가자 여섯 명은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인물의 묘사도 뛰어나고, 배경의 사찰 건물과 나무, 원경의 산세의 표현이 간략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밝은 담채를 사용하여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동' 주변을 소재로 한 흔치 않은 작품 중 꽤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것이다.

오원 장승업 제자, 안중식의 '탑원도소회지도'
 

안중식과 오세창의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조가 끝나고 치욕적인 일제강점기가 이어지자 조선의 그림은 서구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감각적인 선묘와 감성적인 채색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이 당시 탑골 공원 주변을 소재로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작품이 한 점 전하는데, 바로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이다. 안중식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제자로 중국을 다녀오는 등 견문이 넓은 당시 화단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림 속에 묘사된 '탑원(塔園)'은 당대 최고의 예인이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집의 당호이다. 탑골 근처에 있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능력 있는 역관 집안으로 아버지 오경석(吳慶錫) 때부터 유명한 수장가 집안이기도 했던 오세창의 집에는 수많은 고서화가 있었다.

그래서 탑골 근처 돈의동에 있는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고서화를 즐기거나 문화적 교류를 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특히 정초에는 여러 친구들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시서화(詩書畵)를 즐기곤 하였다.

1912년 정초에는 안중식과 오세창 등 모두 8인이 모였다. 이날은 정초를 기념하여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기 위해 모인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설날이 되기 전 집집마다 세주를 담가, 설날 아침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조선시대 여러 종류의 세주 가운데 특히 '도소주(屠蘇酒)'가 유명하였다.

정월 초하루인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시면 1년 동안 사악한 기운이 없어지고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술은 도라지, 산초(山椒), 방풍(防風), 백출(白朮), 육계피(肉桂皮), 진피(陳皮) 등을 넣어 빚는다. '도소(屠蘇)'라는 말은 '소(蘇)'라고 하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안중식의 '탑원도소회지도’ ⓒ 간송미술관

 
참으로 아름답고 격조 있는 그림이다. 조그만 화첩 그림이지만 구성이 잘 짜여 있고, 수묵의 번짐이나 채색의 솜씨가 무르익어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우측 멀리 보이는 탑이 '원각사십층석탑'이다. 달빛 아래 아스라이 보이는 하얀 탑신이 정초 달밤의 정취를 더욱 고조시킨다.

정자 앞으로 호수 같은 물이 있는 것은 실제의 풍경은 아니다. 오세창의 집이 돈의동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지금의 낙원동에 흐르던 냇물을 과장하여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정자 안에는 여덟 친구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한잔하며 달빛을 즐기고 있다. 취흥에 겨운 한 사람은 일어나 달을 바라보고 있다.

왼쪽 중간쯤에 안중식이 쓴 화제가 있다. '탑원에서 도소회를 여는 그림(塔園屠蘇會之圖)'이라 제목을 쓴 예서 글씨가 참으로 단정하다. 이어 '1912년 정초에 집주인인 위창 오세창을 위하여 심전 안중식이 그리다.(壬子元日之夜爲園主人葦滄仁兄正 心田 安中植)'라 쓰여 있다. 글씨 또한 그림 못지않게 뛰어나 그림의 한 부분처럼 보인다. 안중식 서화의 경지가 완숙에 이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나다 야와리의 '파고다 공원의 조선인'
 

이나다 야와리 '파고다 공원의 조선인’ ⓒ 황정수

 
일제강점기에도 탑골은 장안의 명소였는데, 1897년경부터 영국인 J.M.브라운이 설계한 공원으로 꾸며져 '파고다공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경성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이 되면서 공원의 관리권이 총독부로 넘어가자, 총독부에서는 매년 유지비를 투입하여 정자·의자·화단·연못·회유도로·전등·수도·온실 등의 시설을 하고, 벚나무와 여러 상록수를 심었다고 한다. 1902년에는 파고다공원 서쪽 부지 일부에 군악대 건물이 세워져 군악대가 옮겨와 이곳에서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온 일본인 화가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현실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즐겨 하였는데, 한국의 풍속이나 유적을 그린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1936년에는 교토 출신의 이나다 야와리(稻田八笑)라는 화가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출발하여 한국을 거쳐 만주·봉천과 대련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할 때까지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때 여행하며 본 풍경과 풍물을 그림으로 남긴다. 그는 이때의 기억을 '미다만만(美多滿滿)'이란 제목으로 3권의 화첩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나다 야와리는 경성에 와서도 곳곳의 명승 유적을 그렸는데, 그 중에 탑골공원을 그린 것이 현재까지 전한다. 제목은 '파고다 공원의 조선인'이라 하였다. 한 뼘 정도의 작은 종이에 그린 이 그림은 팔각형 정자 옆의 원각사탑과 그 곳에서 쉬고 있는 조선인의 모습을 간략히 그린 소묘이다.

팔각정의 지붕과 탑의 윗부분을 과감히 생략한 대담한 구도를 사용하여 그 속에서 노니는 조선인의 모습이 두드러지도록 구성하였다. 옅은 담채가 마치 수채화 같은 맑은 화면을 보여준다. 곰방대를 들고 한복을 입고 있는 여덟 명의 조선인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사람들 사이에 군복 입고 총을 멘 일본 군인의 모습에서 일제강점기의 시대상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탑골은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현대에까지도 서울 시민과 함께 하는 시민들의 공원이다. 백탑시파의 예술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의 불운한 역사가 깃들어 있고, 삼일만세의 함성이 맺혀있는 곳이다. 한국 전역의 어떤 공원보다도 더욱 민족 깊숙이 자리 잡은 공원이다.

이런 친밀한 공원이 서울 중심부에 오롯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탑골 공원이 언제까지나 시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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