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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김포시 김포아트빌리지에서 열리고 있는 사할린 한인 김포 영주귀국 10주년 기념 기획전 '또 다른 섬 사할린, 풍경과 얼굴전'을 찾았다. 사할린에서 활동하는 주명수, 조성용 화가의 작품 50여 점이 전시중이다.
 
   사할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명수, 조성용 두 화가의 전시가 5월 26일까지 김포아트빌리지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 ‘또 다른 섬 사할린, 풍경과 얼굴전’  사할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명수, 조성용 두 화가의 전시가 5월 26일까지 김포아트빌리지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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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는 사할린의 감춰진 아름다운 자연과 사할린 한인들의 질곡의 역사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조성용 화가는 투명하다 못해 눈이 시린 사할린의 겨울 하늘과 연보랏빛 석양으로 물들어가는 사할린 바다, 자작나무 숲 등 늘 궁금했던 사할린의 풍경을 화폭으로 옮겨왔다.

주명수 화가는 영주귀국을 위해 사할린 섬을 떠나는 한인들의 모습을 '섬을 떠나며' 초상화 연작작품에 담았다. 20여 점의 초상화에 담긴 회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한인들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관람객이 남긴 방명록에는 '조국이 잊어버린 이들이 다시 희망하는대로 얼굴에 어린 그림자가 조금 멀어지길'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 관람객이 남긴 방명록  관람객이 남긴 방명록에는 "조국이 잊어버린 이들이 다시 희망하는대로 얼굴에 어린 그림자가 조금 멀어지길"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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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김윤덕 할아버지네요. 저 할아버지는 해마다 인터뷰하시네요. 이제 유명인사 다 되셨네요."  

전시장에 틀어놓은 영상자료에 한 뉴스채널에서 진행한 김윤덕 할아버지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뵈니 반가웠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 '인터뷰 열흘 뒤인 2018년 10월 20일 타계하셨습니다, 고 김윤덕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어, 할아버지 돌아가셨어요?"

옆에 있던 킨(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 최상구 선생에게 물었다.

"네, 김윤덕 할아버지는 작년 가을에 돌아가셨어요. 가족 모임에 나가시다 갑자기 돌아가셨대요. 폐대동맥 출혈이셨대요. 이제 연로하셔서..."

사할린 강제징용의 산증인

김윤덕 할아버지를 뵌 것은 2016년 1월, '킨의 사할린 방문단'과 함께 사할린을 방문했을 때였다. 방문단은 사할린 한인 1세를 만나기 위해 유즈노사할린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시네고르스크라는 작은 마을을 찾았다.

기온은 영하 30도를 밑돌았고 눈폭풍이 휘몰아쳐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험한 날씨였다. 낡은 봉고를 타고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도착해 만난 분이 김윤덕 할아버지다.
  
    김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 김윤덕 할아버지 유품들  김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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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석탄난로 외에는 별 다른 난방기구도 없는 허름한 판잣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사할린에 와서 만나 결혼한 아내는 201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다섯 자녀가 있지만 모두 독립했고, 막내딸이 근처에 살면서 가끔씩 들른다. 좁은 실내와 낡은 가구들, 옹색한 살림살이, 남루한 옷차림에서 할아버지의 평생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손님들이 온다고 음식까지 준비해 놓으셨다. 흰쌀밥, 김치, 생선튀김, 깻잎 장아찌, 영락없는 한국 사람의 밥상이다. 염치없게도 그 밥이 왜 그렇게 맛있었던지. 식사를 마치고 비좁은 거실에 빙 둘러 앉아 할아버지가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김 할아버지는 1923년 경북 경산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버지 앞으로 강제징용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김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대신해 징용길에 올랐다.

"일본시대에 왔지. 왜놈들이 사람들이 없으니까 우리를, 동네 군마다 하나면 하나, 둘씩 징용 보냈지. 그때 뭐 왜놈들 징용 안 가면 쮸리마 보내고.(*쮸리마는 러시아어로 '감옥'이란 뜻이다.) 그러다보니 안 가면 안돼서 내가 대표로 왔지. 내 올 적에 아버지 대신 오다 보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반대했지."

김 할아버지가 사할린에 온 것은 1943년 17살 되던 해였다. 부산과 일본을 거쳐 사할린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다시 이곳 시네고르스크 탄광으로 보내졌다. 그때부터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컴컴한 굴 속에 들어가 탄을 캐는 고단한 광부의 삶이 시작되었다.

"여기 봐, 전부 새까매. 모두 굳은살이 됐어. 생전에 다시는 그런 탄광에서 일 안 하지. 그렇게 우리 고생한 사람들이라고. 다신 안 하지. 아주 말할 것 없다."
  
   37년간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던 김 할아버지의 몸에는 고단한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손톱은 아직도 석탄물이 빠지지 않아 시커멓다.
▲ 김윤덕 할아버지  37년간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던 김 할아버지의 몸에는 고단한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손톱은 아직도 석탄물이 빠지지 않아 시커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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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간 이어진 광부의 삶은 할아버지 몸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팔꿈치에는 딱딱한 가죽을 덧댄 듯한 단단한 굳은살이 박혔고, 발파 사고로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갔다. 손톱에는 지금도 시커멓게 석탄물이 들어 있다. 마치 영원히 지어지지 않는 형벌 자국처럼.

"그때도 뭐, 먹는 식량 귀했지요. 먹는 식량이 없어 고생했지. 세상에 우리만치 고생한 사람도 없어요. 우리 여기 와가지고 배 곯은 거 생각하면… 있는 옷 다 내다 팔았죠. 신발이든지 시계든지. 전부 다 바꿔서 팔아서 먹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팔아 먹을 것도 없고. 밤에 배가 고파 아무리 누워 있어도 잠이 안 와요. 몸은 고단한데도 잠이 안 와. 그러면 물을 한 그릇 먹으면 배가 조금 부르단 말예요. 그때 잠이 살살 와요."

할아버지는 가끔씩 말을 멈추고 먼 곳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회한에 찬 할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듯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할아버지에게는 고통인 듯했다.

"일 갔다가 3시 돼서 나오니까 막 울어쌌고 난리대요. 사무실에 가서 물으니 일본이 손들어서 일본 사람들이 운다고 그래요. 그러고 난 뒤에는, 보름 지나서는 아무도 일 안 했어. 조선에 언제 가냐고 묻고 해도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우리 조선인들 먼저 보낸다고 하더니 나중에 일본 사람들만 가고 했지. 고향 갈 생각 많이 했지. 한 해 가고 두 해 가고 나중에는 왜놈들이 안 보내니까. 이젠 못간다고 그래 생각하고 살았지."

결국 할아버지는 고국행을 포기하고 사할린에 잔류하게 되었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면 러시아 사람이라고 고향에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 무국적자로 남았다. 직업, 거주지, 교육 등에서 차별이 심했지만 그래도 버티다가 1988년에서야 소련 국적을 취득하였다.
    
   김 할아버지는 사할린유즈노 사할린스크 근방 공원묘지에 아내와 함께 잠들어 있다.
▲ 김윤덕 할아버지의 묘  김 할아버지는 사할린유즈노 사할린스크 근방 공원묘지에 아내와 함께 잠들어 있다.
ⓒ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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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아버지가 고향땅을 밟은 것은 1990년 KBS <사할린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영을 계기로 성사된 고국방문을 통해서였다. 47년만이었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어머니도 만났다.

"집에 가니까 맨 울고 붙들고, 집의 할마시(아내) 붙들고 울고 불고. 우리 사할린 돌아올 적에 어머니한테 그랬지. 다음에 다시 올 땐 이렇게 많이 울지 말라고, 또 이렇게 울면 사할린으로 가버릴 거라고. 어머니가 가면 편지 하라고, 그래 내 편지할게요, 그러고 왔지."

그것이 어머니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어머니는 김 할아버지를 만나고 한 달 후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영주귀국도 마다하고 끝까지 사할린에서 살다 자식들 곁에서 돌아가셨다.

"내 혼자 가서 뭐 하나. 아이들도 다 여기 있는데…."

할아버지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인근 공원묘지에 아내와 함께 잠들어 있다.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유일한 고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

할아버지는 '김윤덕, 1956년 사망'이라고 적힌 서류를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는 1990년 한국에 갔을 때 자신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6년 사망처리된 호적등본.  김 할아버지의 사망정정신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018년 12월에서야 받아들여졌다.?지금은 가족관계등록부를 살리고 다시 사망신고를 하는 절차가 진행중이다.
▲ 김할아버지 호적등본 1956년 사망처리된 호적등본. 김 할아버지의 사망정정신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018년 12월에서야 받아들여졌다.?지금은 가족관계등록부를 살리고 다시 사망신고를 하는 절차가 진행중이다.
ⓒ 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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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난 지 10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사망으로 처리된 거지."

대구가정법원에 등록부 정정신청을 냈지만, 법원으로부터 '러시아 사할린의 김윤덕'과 사망 처리된 '김윤덕'이 동일인임을 증명하라는 보정 명령을 받았다. 김 할아버지가 사망 처리된 '김윤덕'과 동일임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생년월일 러시아 서류와 한국 호적에 적힌 게 다르지. 러시아 여권에는 1923년 3월로 제대로 되었는데 한국호적에는 1926년 7월로 되어 있어.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죽기 전 자식들에게 제삿날이라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호적을 바로 잡았을까. 1923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 남하리에서 태어난 김윤덕의 사망일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1956년인가. 2018년 10월 20일인가.

김 할아버지의 사망정정신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018년 12월에서야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가족관계등록부를 살리고, 다시 사망신고를 하는 절차가 진행중이다.
 
   사할린한인의 생활상과 귀환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주명수화가의 작품들이 김포아트빌리지에서 전시되고 있다.
▲ 주명수화가의 "섬을떠나며"초상화 연작  사할린한인의 생활상과 귀환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주명수화가의 작품들이 김포아트빌리지에서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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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사할린에 잔류하고 있는 강제징용 1세들 가운데에는 빈한한 삶을 이어가는 분들이 많다. 국내 영주귀국자들에게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완전히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주명수 화가가 그린 수많은 김윤덕의 초상화가 벽에 걸린 채 울부짓고 있는 듯하다. 전시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다.

사할린 한인 김포 영주귀국 10주년 기념 기획전시
<또 다른 섬 사할린, 풍경과 얼굴전>

김포아트빌리지 아트센터
일시. 2019.3.30-5.26
시간. 10.00-18.00 / 월요일 휴관/ 문의 031.996.7342/www.gcf.or.kr

사할린 한인의 상황과 관련 사업에 관해 KIN지구촌동포연대 홈피> 자료실> 사할린동포 더 많은 정보를 볼 수 있다. 
http://www.kin.or.kr
 
    사할린 한인 김포 영주귀국 10주년 기념 기획전 ‘또 다른 섬 사할린, 풍경과 얼굴'전이 
경기 김포시 김포아트빌리지에서 오는 26일까지 열린다.
▲ <또 다른 섬 사할린, 풍경과 얼굴>전  사할린 한인 김포 영주귀국 10주년 기념 기획전 ‘또 다른 섬 사할린, 풍경과 얼굴"전이 경기 김포시 김포아트빌리지에서 오는 26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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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할린한인들, #사할린한인영주귀국, #김윤덕, #또 다른 섬 사할린, 풍경과 얼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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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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