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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 ②편에서 이어집니다.)

1898년 대한제국은 헐버트의 집을 매입해서 귀빈 접대와 연회를 여는 '영빈관'으로 사용했다. 1899년 6월 9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동생, 하인리히(Heinrich) 친왕이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 묵기도 했다. 헐버트의 집이 '대관정'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하인리히 친왕 방한 시기에 이미 대관정이라 불렸다. 1901년 9월 영국 공사관의 브라운 대령이 그린 '서울 지도'에는 대관정을 'Imperial Guest House'라고 표시하고 있다. 

대한제국 영빈관으로 쓰인 대관정의 용도가 확 바뀐 것은 러일전쟁 때다.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관정은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부와 사령관저로 함께 쓰이기 시작했다. 나라의 귀빈을 맞던 '영빈관'을 나라를 강탈한 외세가 차지한 것이다. 

1904년 4월 3일 한국주차군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하라구치 켄사이(原口兼濟) 육군 소장은 대관정에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했다. 그해 10월 12일 조선 주둔 병력을 2개 사단으로 늘리면서 육군 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2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일제 강점기 소공동 일대를 '하세가와쵸'(長谷川町)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하세가와가 이곳을 관저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다. 

대한제국 영빈관, 그리고 일제 조선 침략의 본산
 
경성부립도서관이 자리했던 한성병원 터(명동 2가 25번지) 지금은 흔적이 사라졌지만 한성병원은 대한제국 시대 대표적인 서양식 병원이었다. 한성병원 터에 있던 경성부립도서관은 1927년 5월 소공동으로 이전한다. 소공동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과 함께 살던 곳이라 '소공주댁'이라 불렸다. 소공동이라는 이름도 이로부터 유래했다.
▲ 경성부립도서관이 자리했던 한성병원 터(명동 2가 25번지) 지금은 흔적이 사라졌지만 한성병원은 대한제국 시대 대표적인 서양식 병원이었다. 한성병원 터에 있던 경성부립도서관은 1927년 5월 소공동으로 이전한다. 소공동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과 함께 살던 곳이라 "소공주댁"이라 불렸다. 소공동이라는 이름도 이로부터 유래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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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정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고 병합하는 '전초 기지'이자 '총사령부'로 기능했다.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1904년 8월 29일 남산 필동 군영지(필동 2가 84번지, 지금의 남산한옥마을)를 거쳐 1908년 10월 1일 용산 신병영으로 옮겨간 후에도 대관정은 일본 육군 소유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가 수행한 관헌들과 기념 촬영을 하는데(11월 28일), 그 장소 역시 대관정이다.

일본 육군 소유였던 대관정은 1923년 미쓰이(三井) 물산 소유로 넘어갔다가 1926년 경성부가 사들였다. 경성부 소유가 되면서 대관정은 경성부립도서관 이전 부지가 됐다. 명동 한성병원 터에 있던 경성부립도서관은 1927년 5월 24일 대관정 부지로 옮겨와 새롭게 문을 열었다.

대관정으로 이전한 경성부립도서관은 경성의 유지인 고죠 바이케이(古城梅溪), 타카키 토쿠야(高木德彌)로부터 3만 원을 기부받아 3층 규모의 '경성부 사회관'을 신축, 1928년 6월 23일 문을 열었다(고죠 바이케이는 경성에 찬화병원을 세워 원장을 지낸 사람으로 종두의 양성소를 통해 81명의 종두의사를 길러낸 의사다). 경성부립도서관은 신축한 경성부 사회관을 본관으로, 대관정 시절부터 있던 건물은 별관으로 활용했다. 별관에는 아동실과 신문실을 두었다.

메이지쵸(명동)에서 하세가와쵸(소공동) 대관정 터로 옮겨오면서 경성부립도서관은 1925년 문을 연 조선총독부도서관과 인접한 곳에 자리 잡게 됐다. 당시 경성에 흔치 않은 두 도서관을 굳이 가까운 곳에 자리하도록 한 이유는 뭘까? 

거류민단 사무실, 우체국, 경찰서 같은 시설이 들어서며 행정 중심지로 부상하던 소공동 일대에 도서관까지 두려고 했던 모양이다. 탑골공원에 있는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을 1926년부터 인수해서 '종로 분관'으로 편입한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관련기사 : "결혼 기념으로 도서관을..." 일제가 반긴 조선 엘리트의 제안).

해방이 될 때까지 '경성부립도서관'은 '종로 분관'과 함께 일제 강점기 경성을 대표하는 공공도서관으로 역할을 했다. 1922년 7월 1일 부임한 초대 기무라 스즈오(木村靜雄)부터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14일까지 재직한 8대 야마모토 요시히사(山本吉久)까지 8명의 관장이 경성부립도서관을 거쳐갔는데 모두 일본인이었다. 

박완서가 만난 경성부립도서관
 
경성부립도서관에 대한 추억을 작품에 남긴 박완서 1938년 현저동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박완서는 1944년 돈암동, 삼선교 시절을 거쳐 1953년에는 종로구 창신동 한옥에서 생활한다. 1961년 보문동 한옥으로 옮겨간 그녀는 1980년 잠실 아파트, 1988년 방이동 아파트에서 생활하다가 1998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2011년까지 구리시 아치울마을 노란집에서 살았다.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구리시 아치울마을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는 80년 생애 중 60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성북 문인사기획전에서 재촬영한 사진.
▲ 경성부립도서관에 대한 추억을 작품에 남긴 박완서 1938년 현저동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박완서는 1944년 돈암동, 삼선교 시절을 거쳐 1953년에는 종로구 창신동 한옥에서 생활한다. 1961년 보문동 한옥으로 옮겨간 그녀는 1980년 잠실 아파트, 1988년 방이동 아파트에서 생활하다가 1998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2011년까지 구리시 아치울마을 노란집에서 살았다.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구리시 아치울마을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는 80년 생애 중 60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성북 문인사기획전에서 재촬영한 사진.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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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경성부립도서관에 얽힌 추억을 풀어 놓은 바 있다. 

1931년 경기도 개풍군 묵송리 박적골에서 태어난 박완서는 1938년 경성부로 이사해서 1944년까지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살았다. 현저동 시절 국민학교 5학년 국어 시간에 '도서관'을 배운 그녀는 어느 일요일 친구 복순이와 도서관을 찾아 나섰다. 조선총독부도서관에 갔다가 '아이들 열람실'이 없자 총독부도서관 수위가 알려준 '다른 도서관'으로 향한다. 
 
"수위 아저씨가 가르쳐준 딴 도서관은 거기서 가까웠다. 지금의 조선호텔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부립도서관이었다. 해방 후엔 서울대 치대도 됐다가 여러 번 용도가 바뀌었지만 그때는 총독부도서관 다음으로 큰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 역시 우리 같은 촌뜨기가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게 당당하고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이었지만 아이들 열람실은 본관에서 따로 떨어진 단층의 학교 교실만 한 별관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과 경성부립도서관 모두 철거된 상태라 두 도서관 사이 거리를 정확히 계산하긴 어렵지만 30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국민학생인 박완서가 느끼기에도 충분히 가까웠을 것이다. 해방 후에 용도가 바뀌었다는 건 '경성부립도서관'을 거쳐 '남대문도서관'으로 쓰이다가 '민주공화당사'를 거쳐 '주차장'으로도 쓰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들어가는 데 아무런 수속 절차가 필요 없었고 아저씨 한 사람이 선생님처럼 앞의 책상에 앉아 있고 아저씨 뒷면 벽이 온통 책장이었는데 아무나 자유롭게 꺼내다 볼 수 있는 개가식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 같은 열람을 위한 수속 절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제집 서가의 책처럼 마음대로 꺼내다 보고 재미없으면 갖다 꽂고 딴 책을 가져오기를 아무리 자주 되풀이해도 그만이었다. 실제로 읽지는 않고 그렇게 촐싹거리기만 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저씨는 어린이들을 향해 앉아 있을 뿐 이래라저래라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온종일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본 별천지였다." 

박완서가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은 '폐가제'였던 모양이다. 당시 경성부립도서관 어린이실은 '개가제'로 운영한 모양인데, 마음대로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는 개가제 도서관이 박완서에게는 '별천지'였나 보다. 
 
"그날 처음 빌려 본 책이 <아아, 무정>이라는 제목으로 아동용으로 쉽게 간추려진 <레미제라블>이었다. 물론 일본말이었고 삽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읽는 재미에다 황홀감을 더해 주었다. 간추려졌다고는 하지만 상당한 두께의 책이어서 도서관을 닫을 시간까지 속독을 했는데도 다 읽지 못했다.

대출은 허락되지 않았다. 못 다 읽은 책을 그냥 놓고 와야 하는 심정은 내 혼을 거기다 반 넘게 남겨놓고 오는 것과 같았다. 숙부네 다락방에서 만화책을 빼앗겼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그것과는 댈 것도 아니게 허전했다. 미칠 것 같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내 동무가 읽은 건 <소공녀>였고 끝까지 다 읽었다고 했다. 우리는 몹시 흥분해서 서로가 읽은 책 얘기를 주고받았고 다음 공일에도 또 가자고 약속했다."

당시 경성부립도서관은 '관외 대출'은 허용하지 않고 '관내 열람'만 허용한 모양이다. 그녀는 '별천지'인 도서관 방문을 6학년 때까지 이어간다. 일요일마다 이어진 도서관 방문을 박완서는 "공일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 씩 읽는 건 내 어린 날의 찬란한 빛"이라고 표현했다. '도서관'을 통한 독서 경험이 박완서라는 작가의 탄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생각해보는 건 흥미롭다. 

도서관이 떠난 후 대관정터 
 
호텔 개발이 추진중인 대관정터 대관정터는 2012년 이 땅을 1721억 원에 인수한 부영건설이 27층 높이 부영호텔 건설을 추진중이다. 호텔 개발이 추진되면서 근대 문화유산인 대관정터가 그대로 사라질 거라는 우려가 커졌지만 서울시와 부영이 오랜 협상을 하면서 주변 근대 빌딩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막대한 부지 매입 비용 때문에 대관정터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대관정을 복원하진 못하지만, 근대 문화유산 복원을 위해 시와 기업이 ‘협업’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대관정터에 남아있는 유구는 호텔 2층에 전시관을 꾸며 보존할 예정이다.
▲ 호텔 개발이 추진중인 대관정터 대관정터는 2012년 이 땅을 1721억 원에 인수한 부영건설이 27층 높이 부영호텔 건설을 추진중이다. 호텔 개발이 추진되면서 근대 문화유산인 대관정터가 그대로 사라질 거라는 우려가 커졌지만 서울시와 부영이 오랜 협상을 하면서 주변 근대 빌딩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막대한 부지 매입 비용 때문에 대관정터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대관정을 복원하진 못하지만, 근대 문화유산 복원을 위해 시와 기업이 ‘협업’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대관정터에 남아있는 유구는 호텔 2층에 전시관을 꾸며 보존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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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후 경성부립도서관은 '경성부립남대문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48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 승격과 함께 '서울특별시립남대문도서관'으로 다시 이름을 바꾼다. 해방과 함께 새로운 관장이 취임하는데, 1945년 9월 17일 부임한 9대 신태현은 첫 조선인 관장이다. 12월 19일에는 경성부립도서관으로부터 분관이 분리되어 '종로도서관'으로 출범했다. 

1927년부터 37년 동안 소공동에 있던 '남대문도서관'은 1964년 12월 31일 지금의 위치인 남산(용산구 후암동 30-84)에 도서관 건물을 신축해서 이전하고, 이때부터 '남산도서관'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1965년 1월 27일 개관한 남산도서관은 1600석의 열람석과 시청각자료실, 특별연구실, 전시실, 음악실을 갖춘 당시로서는 국내 최대 도서관이었다.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남산도서관은 건축가이자 한양대 총장을 지낸 남계 이해성이 설계했다. 

<경향신문>은 남산도서관 개관 시점인 1965년 1월 9일자 기사에서 "1500명을 수용하는 '매머드' 도서관에 20만 권의 책을 저장할 수 있는 서고가 마련되어 있지만 장서는 약 7만 권으로 겉만 화려해 결국 학생들의 공부방 구실 밖에 못하게 된 것이다"라는 기사를 냈다.

당시 남산도서관이 보유한 7만 권 중 3만 권은 일본어로 된 일서였다. 1922년 개관해서 4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의 대표 도서관이 보유한 장서가 겨우 4만 권. 도서관 건물만 짓고 장서와 사람, 운영에 신경 쓰지 않는 관행은 이때부터 '싹'을 보인 것일까.


역사가 길다 보니 남산도서관은 도서관 서비스 변천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사서에게 책을 일일이 신청해서 대출하는 '폐가제'에서 이용자가 자유롭게 서가에서 책을 골라볼 수 있는 '개가제'로 전환된 건 1979년 7월 12일부터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때 공공도서관은 '입관료'를 내야만 이용할 수 있는 '유료 시설'이었다. 남산도서관이 지금처럼 '무료 시설'로 전환된 건 1992년 3월 16일 도서관진흥법 시행령 조례가 시행되면서부터다.

남산도서관의 모든 책이 '관외 대출'이 가능해진 건 1995년 10월 1일부터다. 서비스 도입 시기를 보면 남산도서관이 변화를 '선도'한 곳이라 보기는 어려운데, 1926년 이후 경성부와 서울을 대표해온 위상에 비춰 볼 때 이 점은 아쉽다. 

한편 남대문도서관이 자리했던 소공동 건물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박정희 시대 집권당 민주공화당이 중앙당사로 사용한다(관련기사 : '남성 열람실 논란', 우리가 알아야 할 숨은 과거). 민주공화당이 남산에 새 당사를 구해 이전한 후에는 효성물산이 소유했다가 1983년 8월 삼환기업에게 매각했다. 이후 오랫동안 '주차장'으로 쓰인 경성부립도서관 터는 호텔 부지로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이곳에 담겨 있는 역사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문화재'로 보존하자는 의견도 일었다. 경성부립도서관이 37년 동안 자리했던 대관정 터에 대해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는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경성부립도서관이 처음 자리한 명동 2가 25번지와 두 번째 머문 소공동 112-9번지 일대에는 어디에도 도서관이 있었다는 표석이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이제 그 시절 도서관의 흔적을 '빛바랜 사진'을 통해서만 겨우 확인할 수 있다.

도서관은 왜 '산'으로 갔을까 
 
남산에서 바라본 남산도서관 개관 이후 남산도서관 입장을 위해 새벽부터 이용자가 길게 줄을 선 기사와 사진은 신문에 종종 실렸다. 도서관에 대한 요구와 열망을 드러낸 장사진이었지, 남산도서관의 입지가 문제 없음을 증명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공공도서관이 부족하자 서울에는 사설 독서실이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 1966년 서울에 남산도서관과 종로도서관 두 곳의 공공도서관이 있을 때 사설독서실은 89개로 급증했다.
▲ 남산에서 바라본 남산도서관 개관 이후 남산도서관 입장을 위해 새벽부터 이용자가 길게 줄을 선 기사와 사진은 신문에 종종 실렸다. 도서관에 대한 요구와 열망을 드러낸 장사진이었지, 남산도서관의 입지가 문제 없음을 증명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공공도서관이 부족하자 서울에는 사설 독서실이 크게 늘어나기도 했다. 1966년 서울에 남산도서관과 종로도서관 두 곳의 공공도서관이 있을 때 사설독서실은 89개로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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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도서관이 새로 자리한 위치도 묘했다. 남산도서관 뒤편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이 지나던 곳으로 성벽 바깥 부분에 해당한다. 일제는 1925년 한양도성 남산 성벽을 770미터 넘게 허물고 '조선신궁'을 지었다.

조선신궁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남산도서관 뒤편에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큰 신궁이 자리했다는 건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이 자리에 조선신궁을 지음으로써 남산을 정치·군사뿐 아니라 종교적 중심 공간으로 격상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신궁 자리, 지금의 남산도서관 뒤편에 81척 높이의 초대형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가 철거됐다.  

명동과 소공동에 있다가 남산으로 옮기며 도서관 규모는 커졌지만 접근성은 나빠졌다. 서울시가 1963년 강남을 포함, 대대적인 확장을 하면서 남산은 '서울의 지리적 중심'이 되지만, 그 이전까지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가 아니었다. 도서관 입지도 명동과 소공동이 훨씬 나은데, 접근성만 놓고 보면 일제 시대보다 악화된 셈이다. 

접근성 문제는 남산도서관 개관 전부터 언론을 통해 지적되기 시작했다. 1963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는 "도심지의 남대문도서관이 폐쇄된다면 수많은 열람자들이 남산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불편을 피하지 못할 것 같다"는 기사를 냈다. 

도서관은 왜 '산'으로 갔을까. 경찰서나 소방서 같은 공공시설이 산에 있으면 안 되듯 많은 시민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도서관도 산에 있어서는 안 될 공간이다. 1960년대 이후 남산도서관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하더라도 남산도서관은 '산'으로 간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도서관 이전의 나쁜 사례라 할만하다. 

당시에는 건축법상 공원 부지에 시립도서관을 짓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서울에 산재한 공원에 땅값 부담 없이 건축비만으로 도서관 건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남산 외에도 접근성이 좋은 공원 부지가 있었음에도 남대문도서관은 남산으로 이전했고, 공공도서관 추가 건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종로도서관과 남산도서관이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온 도서관임을 감안할 때 해방 후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서울시는 단 하나의 시립도서관도 새로 짓지 않았다. 해방 후 26년만에 서울시가 처음 건립한 시립도서관은 1971년 3월 31일 개관한 '동대문도서관'이다. 

남산도서관 이후에도 도서관은 가파른 산 자락에 종종 지어졌다. 혹자는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 살림살이가 제법 나아진 후에도 도서관은 접근성이 나쁜 곳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도서관 이름에 산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산행'을 해야 갈 수 있거나 산이 아닐 뿐 외진 곳에 지어진 제2, 제3의 남산도서관이 적지 않았다.

도서관이 시민뿐 아니라 장애인과 노약자를 포함한 누구나 이용 가능한 문화시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입지 자체가 '폭력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불편한 접근성 때문인지 남산도서관은 1970년 문을 연 어린이 열람실과 주부 열람실을 불과 2년만에 폐쇄했다. 공공도서관에 흔히 있는 어린이 자료실이 지금도 없는 건 남산도서관의 접근성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책이 좋다 해도 유모차를 밀거나 아이를 데리고 산 중턱까지 오르내릴 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한때 남산은 도서관의 '메카'였다? 
 
2022년 개관 100주년을 맞는 남산도서관 남산도서관 입구에는 다산 정약용과 퇴계 이황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 좌대 뒷면에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라는 동상 건립 주체가 새겨져 있다. 1960년대 후반 맹활약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이 총재를 맡고 서울신문사가 사업을 주관해서 전국 각지에 32종 352개의 동상을 세웠다. 이준, 안중근, 사명대사, 김구, 이시영, 김유신, 김용환, 유관순, 정약용, 이황, 방정환 등 남산에만 15기에 달하는 동상을 세웠다.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가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애국선열 동상 세우기를 통해 보완하고 싶었던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 2022년 개관 100주년을 맞는 남산도서관 남산도서관 입구에는 다산 정약용과 퇴계 이황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 좌대 뒷면에는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라는 동상 건립 주체가 새겨져 있다. 1960년대 후반 맹활약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이 총재를 맡고 서울신문사가 사업을 주관해서 전국 각지에 32종 352개의 동상을 세웠다. 이준, 안중근, 사명대사, 김구, 이시영, 김유신, 김용환, 유관순, 정약용, 이황, 방정환 등 남산에만 15기에 달하는 동상을 세웠다.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가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애국선열 동상 세우기를 통해 보완하고 싶었던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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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한때 남산이 한국 도서관의 '메카'였던 시기가 있다는 점이다. 1964년 남산도서관이 지금의 위치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후, 1974년 소공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이 남산 어린이회관(지금의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건물로 이전하면서 남산 시대를 열었다. 

1981년에는 용산도서관이 남산도서관 코앞에 개관하면서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도서관 세 곳이 남산 회현 자락 몇 백 미터 안에 '옹기종기' 모이게 됐다. 1981년 당시 서울에 10개 공공도서관이 있었음을 고려할 때 대형 도서관의 '남산 집중'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남산이 '도서관의 메카였던 시기'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이 시대는 도서관의 '남산 유배 시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도서관의 '남산 집중'은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지금의 서초구 반포동으로 신축 이전하면서 '완화'된다. 1977년 정독도서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남산도서관은 서울, 아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공도서관으로 역할을 해왔다. 비록 도서관 역사는 2년 먼저 개관한 종로도서관에 뒤지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남산도서관은 서울 공공도서관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만하다. 

도시 이름이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시'로, 도서관의 위치가 '명동'에서 '소공동'을 거쳐 '남산'으로 바뀌는 동안 도서관 이름은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서울시립남대문도서관'을 거쳐 '남산도서관'으로 바뀌었다. 우리 도서관 역사에서 이런 변화를 겪은 도서관은 흔치 않다. 서울시는 2013년 남산도서관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도서관이 가진 역사로 보나, 1960년대 이후 남산도서관이 지닌 상징성으로 보나, 새벽같이 이곳을 찾아 줄을 섰던 수많은 시민의 추억으로 보나 남산도서관은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만하다.

하지만 접근성을 고려치 않은 도서관의 '입지'만큼은 미래가 아닌 '과거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우리에게 산으로 간 도서관은 남산도서관으로 충분하며, 산으로 가 버린 도서관 역사는 이제 끝나야 한다. 2022년 남산도서관은 개관 100주년을 맞는다. 

[남산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 109 (후암동)
- 이용시간 : 인문사회과학실 (평일 09:00 - 22:00, 주말 09:00 - 17:00), 문학실.한국문학자료관 / 자연과학실  (평일 09:00 - 20:00, 11월-2월 09:00 - 19:00, 주말 09:00 - 17:00), 전자정보실 / 독서치료.어학실 / 연속간행물실 (평일 09:00 - 18:00, 주말 09:00 - 17:00) 일반열람실 (평일 07:00 - 23:00, 11월-2월 08:00 - 23:00, 주말 07:00 - 22:00 11월-2월 08:00 - 22:00) 
- 휴관일 : 매주 첫째 및 셋째 월요일, 법정공휴일, 임시휴관일(도서관장이 지정한 날)
-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 소재 직장인 또는 학생. 무료
- 홈페이지 : http://nslib.sen.go.kr/
- 전화 :  02-754–7338
- 운영기관 : 서울시교육청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남산도서관 역사를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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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