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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여행할 때였다. 길거리에서 온갖 희롱을 일삼는 인도 남성들에 대한 경고를 익히 듣고 갔기에 반소매 티셔츠에 긴 치마를 입고 나름 얌전하게 다니던 중이었다. 그런데도 인도 남성들의 희롱은 여름철 하루살이처럼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그러던 중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젊은 여성 여행자만 지나가면 '휙- 휙-' 휘파람을 불어대던 동네 청년들이 이스라엘 여성들이 지나가자 조용해진 것이다. 짧은 반바지에 소매 없는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데도 말이다. 궁금증을 못 참고 한 인도 남성에게 물어봤다. 

"왜 이스라엘 여자들 앞에서는 얌전해?" 
"이스라엘 여자들은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 쟤들은 기본적으로 '크라브마가'를 할 줄 알거든." 


크라브마가? 대체 크라브마가가 뭐기에 누구는 겹겹이 입고 다녀도 "마담, 유 쏘 뷰티플, 메리 미, 메리 미"라는 소리를 듣는데 이스라엘 여성들은 저렇게 시원하게 입고 다녀도 괜찮다니. 그때 결심했다. 크라브마가가 뭔지는 몰라도 나도 저걸 배우겠노라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크라브마가는 이스라엘에서 창시된 근접격투술이었다. 다양한 격투기의 기술들을 혼합해 실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강점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여성들은 군대에서 크라브마가를 배우고 여행을 오는 경우가 많기에 인도 남성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크라브마가를 배우게 된 것은 인도 여행을 다녀오고도 한참 후였다.
 
상대의 나이프를 막은 후 팔목을 꺾어 제압하고 있다
▲ 크라브마가 수련 중인 여성 회원  상대의 나이프를 막은 후 팔목을 꺾어 제압하고 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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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화장실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을까?

내가 사는 세상이 절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을 기억한다. 3년 전 강남역에서 발생한 '여성 살해' 사건. 대부분 여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성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직장 상사, 종교 지도자 등에게 성폭력을 당할 수 있고 남자친구나 남편, 일면식도 없는 남성이 휘두른 칼에 찔리거나 폭행을 당해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외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은 안전한 대한민국'은 여성들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흉악 강력범죄의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이 84.6%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혼자 40여 개국을 여행했고 예기치 못했던 상황들에 맞서왔다. 그래서 어느 정도 문제 상황에 대처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을 보면서 여행지에서보다 내 일상의 위험이 전방위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뉴스를 읽으며 머릿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만약 내가 그 화장실에 있었다면 나는 살아 나올 수 있었을까? 

우리의 뇌는 위험을 감지했을 때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도망을 칠 수도 있고 맞서 싸울 수도 있다. 그리고 긴장과 공포로 인해 뇌가 얼어붙어 버리는 '긴장성 부동화'(tonic immobility)에 빠질 수도 있다. 긴장성 부동화는 부교감신경을 극도로 작동시키는 우리 뇌의 방어기제다. 마치 파충류나 곤충이 위협 앞에서 빳빳하게 굳어 쓰러지는 현상과 비슷하다. 

2017년 6월에 발표한 온라인 과학 매체 '과학 지식리포트'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들 대부분이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저항능력이 마비되는 '긴장성 부동화' 상태에 빠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피해자들에게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누구나 그 상황이 오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마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화장실 문을 가로막고 내게 칼을 휘둘러 댄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내 뇌는 긴장성 부동화에 빠지지 않고 도망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도망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괴한이 이미 출구를 막고 있다면? 맞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맞서 싸우는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가 휘두르는 칼을 막고 그를 밀쳐낼 수 있을까? 최소한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소리라도 지를 수 있을까?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해봐도 강남역 그 화장실에서 내가 살아 나올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 앞에서 그저 무력해져 갔다.
  
도망도 기술이다
 
크라브마가센터에서 여성회원이 나이프방어 기술을 익히고 있다
▲ 상대의 나이프를 막는 훈련을 하고 있는 여성회원 크라브마가센터에서 여성회원이 나이프방어 기술을 익히고 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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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해 여름부터 홍대의 한 크라브마가 센터에 등록해 운동하고 있다. 하지만 등록을 하면서도 내가 한 달 이상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워낙 체력이 좋지 않은 데다가 평소에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몸치는 수업을 못 따라가 곧 포기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운동을 시작한 지 열 달이 지났다. 

첫 크라브마가 수업에서 배운 것은 '방어 자세'였다. 칼이나 주먹의 공격이 들어왔을 때 팔을 들어 막는 기술이다. 무술이라면 보통 품새부터 익히는 거로 생각했는데 크라브마가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바로 방어 자세를 배우고 실제로 대련 상대가 찌르는 모형 칼을 막아내야 했다. 

칼을 막아냈으면 틈을 봐서 상대를 밀치고 도망가는 것을 배운다. '막기-밀치기-소리 지르기-도망가기' 훈련의 반복이다. 문제는 이 도망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상대가 문을 막아섰을 경우 그를 한쪽으로 밀쳐내고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당황하다 보니 잘못 밀어 오히려 퇴로를 막아버리곤 했다. 도망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나는 모의 훈련을 하며 수없이 칼에 찔려 죽고 좀비처럼 되살아나 다시 '막기-밀치기-소리 지르기-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 방어와 밀치기, 도망가기 등을 익혔으면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기술을 배운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상황에 대비한 실전 훈련을 배운다. 상대가 내 목을 조르거나 위에서 올라탔을 때 제압에서 벗어나는 법이나 여러 상대에게 둘러싸였을 때 뚫고 나가는 법,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나 눈을 가린 상황에 대처하는 법 등이다. 이때 회원들과 돌아가며 롤 플레이로 공격과 방어를 연습한다. 물론 기초체력을 높이기 위한 체력훈련과 공격력을 높이기 위한 펀치나 킥도 당연히 훈련한다. 

크라브마가 수업의 특징은 화려하거나 난도 높은 동작이 없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것에 있었다. 체력 훈련으로 땀을 뺀 후 기술을 익히고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가 있곤 했다. 

사실 그동안 수련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체력 훈련이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었다. 도저히 주먹을 뻗어 상대를 공격하지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타인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경우뿐 아니라 많은 여성이 공격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애초에 공격을 안 해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격성을 보여야 한다. 이 공격성은 단순히 상대를 때리는 것뿐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 상황을 벗어나겠다는 의지기도 하다.

그 공격 기술 중 하나가 바로 낭심 공격이다. 실제로 센터에서 '기-승-전-낭심'이라고 배울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여성이 남성의 힘을 이기기 위해선 급소공격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낭심을 찰 때는 단순히 발로 차는 것이 아니라 정강이를 이용해 아래에서 위로 찍어 올리도록 배운다.
 
여성이 남성의 힘을 이기기 위해선 급소공격이 가장 효과적이다
▲ 나이프를 막은 후 낭심차기를 훈련중인 여성회원  여성이 남성의 힘을 이기기 위해선 급소공격이 가장 효과적이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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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실전으로는 한 번도 못 차봤다. 혹시나 있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연습 중에는 급소보호대를 차고 운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체 이 공격이 상대에게 어느 정도 고통을 주는지 짐작이 가지도 않지만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날이 올 것으로 믿고 열심히 연습 중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다

'크라브마가'라는 운동을 한다고 하면 주변 여성들은 '나도 배우고 싶다' '대단하다' 등의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남성들에게선 정반대의 반응이 나온다. "나이가 몇 살인데 호신술이야?" "그 나이에 남자가 건드리면 '고맙습니다' 해야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실제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그걸 배운다고 성인 남자 힘을 이길 수 있겠어?" 

'여자인 네가 그걸 배워봤자 성인 남성인 '나'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 발언 속엔 '여성은 남성을 이길 수 없다'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물론 본인은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겠지만.
 
여성 셀프디펜스의 기본은 '때리기(막기)-밀치기-소리 지르기-도망치기'다
▲ 셀프디펜스 배우는 핫펠트 예은  여성 셀프디펜스의 기본은 "때리기(막기)-밀치기-소리 지르기-도망치기"다
ⓒ MBN 비행소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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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질문에 대답하자면 "그래서 기술을 배웁니다"이다. 실제로 성인 남성이 칼을 휘두르거나 목을 조를 때 여성이 체력적으로 그 남성을 이기는 방법은 없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마찬가지다. 상대와 체급 차이가 나거나 상대가 무기를 들고 있는 경우 효과적으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적절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크라브마가와 같은 훈련을 통해 우리 뇌가 긴장성 부동화에서 벗어나 맞서 싸우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고 맞서 싸울 때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테크닉을 연습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훈련을 해도 그들 말대로 성인 남자 힘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파트에 불이 나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갈 때 누군가 칼로 나를 위협한다면, 나는 주춤하지 않고 훈련받은 대로 칼을 막고 그를 밀칠 것이다. 그냥 그대로 그가 날 살해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3년 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여성들은 두려워하기보다 서로 손을 맞잡고 더는 우연히 살아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두려움 앞에 맞서 싸울 것을 선택했다. 남성들이 "그런 걸 배운다고 성인 남자 힘을 이길 수 있겠어요?"라며 비아냥거릴 때 나는 차라리 줄넘기 한 세트를 더 뛰고 눈, 코, 입, 급소를 가격하고 도망치는 방법을 연습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혐오를 받으며 죽어 마땅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험 상황에 처했을 때 나를 지키는 방법

일상 속에서 예기치 않은 범죄의 위협을 받았을 때, 범죄 상황에 대한 빠른 판단과 함께 적절한 대응으로 맞서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위험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1. 기본 중의 기본, 소리 지르기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가려 하면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질러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2. 최고의 기술, 도망치기
어떤 상황에서든 도망칠 수만 있으면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이 최고의 기술이다. 어떻게 배운 기술을 응용해 운 좋게 상대를 넘어뜨렸다면 무조건 상대방으로부터 멀리 도망을 친 후 112에 신고하거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3. 허를 찌르는 기술, 깨물기
신체 부위 중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부위 중 하나가 치아다. 앞니 한 개로 무는 힘은 20kg 정도고, 어금니로는 60kg까지 물 수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호신술 수업에서도 납치하려는 어른의 팔을 인정사정없이 깨물라고 가르친다.

4. 기-승-전-낭심, 낭심 차기
낭심 차기는 가장 치명적이면서 효과적인 기술이다. 허나, 실패하게 되면 상대도 방어 자세를 취할 수 있으므로 요령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낭심을 찬 후, 반드시 '도망치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료 제공: KKM 홍대 더벙커센터 대표 김한민)

태그:#셀프디펜스, #여성 호신술, #크라브마가, #근접격투, #K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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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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