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어디에서 처음 그를 봤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마을 크고 작은 모임에 그는 항상 앞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쑥스러운 얼굴로 인사하는 모습도 변함없었다. '일동주민자치위원장으로 마을공동체 사업들을 추진하며 일동이 주민자치 모범마을이 되는 기반을 닦은 사람'이란 주변 평가가 무색할 만큼 자신을 내세우지도, 어른 대접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인터뷰 내내 "잘 난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이 70이 넘었으니 세상 살만큼 살았다는 것 외엔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다"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원덕윤 일동동네주민협의회 공동대표를 만났다.

"잠시 머물려던 안산, 삶 속으로 성큼"
 
일동동네주민협의회 원덕윤 공동대표 ‘일동주민자치위원장으로 마을공동체 사업들을 추진하며 일동이 주민자치 모범마을이 되는 기반을 닦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원덕윤 일동동네주민협의회 공동대표를 만났다.
▲ 일동동네주민협의회 원덕윤 공동대표 ‘일동주민자치위원장으로 마을공동체 사업들을 추진하며 일동이 주민자치 모범마을이 되는 기반을 닦은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원덕윤 일동동네주민협의회 공동대표를 만났다.
ⓒ 김영의

관련사진보기

  
아버지 고향인 안양에서 태어나 쭉 그곳에서 살았던 그는 '공기 좋고 햇볕 좋다'는 동생 말에 안산에 터를 잡았다. 이사 후에도 생활권은 여전히 안양과 서울이어서 '몇 개월 살다 다시 가야지' 생각했다. 몇 개월이 어느새 24년이 됐다.

"자영업 사장도 하고, 건설회사 사장도 하고... 직장생활을 30년 이상 했어요. 65세 되던 6년전쯤 '이제는 사회 봉사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산시자원봉사센터 소양교육을 받았죠. 그 때 동사무소 플랜카드에 주민자치위원 공개모집을 봤어요.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봉사할 것이 있나' 찾아보자 하던 차에 맞아 떨어졌죠."

면접을 보던 40~50대 심사위원들은 '60대 노인분이 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이가 큰 문제가 되겠느냐'고 답하면서도 '나이가 많아 안 되나 보다' 포기했다. 다행히 주민자치위원으로 위촉장을 받으며 동네일에 첫발을 내딛었다. 1년 만에 기획홍보분과장이 됐고, 임기가 끝나던 해 주민자치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 중심에 두고 고민"

"주민자치위에 정치하는 분들이 위원으로 많이 들어오는데 나는 정치랑 무관했어요. 당시 주민자치위원장 하던 분이 여러 잡음이 있어 다른 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를 추천했어요. 처음에는 사양했죠. 하지만 나 대신 하겠다고 나선 분을 보며 '이분이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맘을 바꿨어요."

원 공동대표는 "위원장 선거를 하면 다른 지역은 치열한데 그 당시 우리는 만장일치로 추대됐다"고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다 곧 "너무 내 자랑인 것 같다. 빼달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동네일을 시작한 지 2년만에 주민자치위원장으로 고속승진(?)한 비법을 물었다. '봉사는 섬기는 것'이란 마음가짐과 공정성,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업무추진, 좋은 러닝메이트 등을 꼽았다.

또 사리사욕 따지지 않고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중심에 두고, 원칙적으로 판단하면서도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업무추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했다.

"회의를 할 때 나는 측근이나 러닝메이트라 하더라도 아니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원칙을 지켜주고 언행일치가 돼야 하니까 그런 부분을 각별히 신경을 썼죠. 전체를 위해 내가 희생하면 언제가는 알아준다고 생각해요."

"쉽지 않던 동네일, 조금씩 벽 허물어"

동네일이 쉽지는 않았다. 일동이 주민자치 모범마을로 자리매김을 했지만 처음 마을공동체 사업을 추진하면서 어려움도 많았다.

"어느 조직이든 뉴페이스가 들어오면 배타적이죠. 저 역시 동네일을 시작하니 비협조적이고 벽도 높았어요. 지금은 '위원장을 하며 벽을 허무는 데 조금은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사업을 제안하면 '안 된다' 막히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동네 직능단체와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마음을 알아주겠지'란 생각에 통장협의회, 바르게살기 야유회 등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행사장에 가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주민들의 힘으로 첫 마을축제가 열리던 2016년, 쉬지 않고 달리던 몸에 이상이 와 심장수술 받았다. 하지만 주민자치위 주관 마을축제에 협조가 안돼 목발을 짚고 직능단체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내 정성이 갸륵했던지 그해 마을축제는 시 규모로 열렸다고 할 만큼 성과가 좋았어요."

"다양한 공동체, 주민이 함께하는 마을 꿈꿔"

원 공동대표는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지난 3월 안산시 월례회의 때 경기도 공동체활성화 유공표창을 받았다. 그날 그는 함께 일해왔던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일 하겠다는 사람을 일할 수 있게 조력하고 실익을 있는 동네일이면 밀어붙이고 설득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됐을 뿐인데 내가 상을 받게 돼 할 말이 없었죠. 그래도 처음 위원장이 돼 참석한 안산시 주민자치협의회에서 동네자랑을 해달라고 할 때 '우리동네는 자랑할 것이 없어서 제가 그만둘 때에는 자랑거리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켜 좋습니다."

그가 위원장을 맡으며 다져진 마을공동체 토대 위에 일동은 쑤욱 성장했다. 주민자치위원으로 함께 일했던 오병철 주민자치위원이 위원장을 맡으며 일동은 주민자치위원회 박람회 대상을 받았다. 다른 지역에서 벤치마킹도 오고 행안부 차관도 찾아오는 등 일약 유명한 마을이 됐다.

주민자치위원장을 끝으로 쉬려던 원 공동대표는 일동동네주민협의회 구성과 함께 다시 발목이 잡혔다.

"그만하려고 빼달라 했는데 아직 쓸 데가 있다고 잡았어요. 젊은 사람들이 내가 필요하다니 고맙죠. 그 마음을 알기에 공동대표를 맡게 됐고 올해 연임됐습니다. 시간 속에 쌓인 상호신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동네일 하다보니 몇 년이 후딱 지나갔어요."

원 공동대표는 '꿈꾸는 마을'에 대해 묻자 "몇 사람이 소유하거나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공동체, 주민이 함께하는 마을"이라고 답했다.

"마을일을 하면서 다채롭고 다양한 공동체를 처음 알았어요. 일동은 일할 수 있는 활력소를 가진 젊은이들이 많아요. 여러사람의 생각을 취합해 비전을 갖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관계자와 나이든 사람의 역할이라는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마을신문 너머N에게 게재됩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자유를 꿈꾸며 백수가 됐지만 결국 생계에 붙들려 경기다문화뉴스 등에 기사를 쓰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