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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시 흥남동 팔마산 아래 주변(2011년 6월 촬영)
 군산시 흥남동 팔마산 아래 주변(2011년 6월 촬영)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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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2011년 초여름, 구 군산역에서 500m쯤 떨어진 옥구선(군산-옥구) 주변 모습이다. 그해 4월부터 옥구선에 열차 운행이 부정기적으로 재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나갔다가 팔마산(43.7m) 아래에서 기념비를 발견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겉으로는 오래되지 않아 보였으나 비(碑)를 세우게 된 배경과 비문의 주인공(김용진)이 누구인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비가 세워진 비탈에서 내려와 두 가닥의 녹슨 철길(옛 옥구선과 군산선)을 건너면 팔마광장이다. 팔마광장(팔마재)은 1908년 국내 최초로 개설된 신작로(전군도로) 시작점으로 조선 시대부터 군산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부근에 400년 역사를 지닌 설애장터(경장시장)가 있었고, 임피·대야 쪽에서 군산 진영에 오려면 이곳에서부터 산길을 이용했던 것.
 
 토지구획정리사업 전 흥남동 산동네
 토지구획정리사업 전 흥남동 산동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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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마재는 일제강점기 '옥구군 미면 팔마산리'에 속했다. 이 지역은 헐벗고 배움에 굶주린 조선인 8백여 명이 옴닥옴닥 모여 사는 동네였다. 광복 후에도 빈촌이었으며 한국전쟁 후 피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60~70년대에도 하꼬방(판잣집), 움막, 오두막집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였으나 198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추진되면서 도시화 됐다.

옛날신문에서 만난 김용진, 그는 무산아동교육가

흔한 기념비 사진을 오랫동안 보관해온 이유가 있었다. 비를 세운 시기와 배경을 캐보면 흥남동, 경장동 일대 향토사 정리에 유익한 근대사와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또 하나는 본래 능선은 동쪽으로 한참 진출해 있었으나 군산선(1912년 완공)과 옥구선(1953년 완공) 공사 때 많은 부분이 깎여나간 팔마산을 재조명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金公瑢鎭永年記念碑(김공용진영년기념비)'

기념비 중앙에 음각된 비문이다. 안타깝게도 김용진(金瑢鎭)의 영년(장수)을 기원하는 큰 글씨만 확인될 뿐 좌우 잔글씨는 해독이 어려웠다. 주위에 쓰레기가 수북이 쌓여 있고,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버려진 상태의 비석이었지만 유적지에서 흔히 발견되는 공덕비나 영세불망비 이상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향토사학자, 지역 주민 등 비석 내력을 알 만한 분에게 질문하면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고난도 퍼즐게임을 대하듯 답답해하다가 최근 궁금증이 풀렸다. 김용진은 일제강점기 옥구군 미면 경장리(군산시 경장동)에 살았으며 초등교육 환경이 열악함을 통감하고 야학을 세운 '무산아동교육가'였음을 알아낸 것. 아래는 1928년 11월 24일 치 <동아일보> 기사이다.

 
 일신야학교 설립한 김용진씨 관련 기사(1928년 11월 24일 치 <동아일보>)
 일신야학교 설립한 김용진씨 관련 기사(1928년 11월 24일 치 <동아일보>)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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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부 외 미면 경장리 김용진씨(群山府外米面京場里金瑢鎭氏)는 거금 약 오년전(距今約五年前)부터 동리(同里)에 거주(居住)하야 오든바 동리(同里)는 원래(元來) 무산자(無産者)만 거주(居住)함으로 일 개월(一個月)에 일 원 이내(一圓以內)의 수업료(授業料)를 판출(辦出)할 길이 업어 학령(學齡)에 달(達)한 아동(兒童)을 전부 문맹(全部文甿)에 빠지게 됨을 유감(有感)으로 일신야학원(日新夜學院)을 설립(設立)하고 씨(氏)의 재산(財産)으로 삼개년간(三個年間)을 경영(經營)하여 오든 중(中)...(아래 줄임)"

기사에서 '무산자'는 '재산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일컫는다. 따라서 당시 경장리는 어린 자녀의 수업료도 못 내는 하층민이 모여 사는 동네였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후반 군산 채석장에서 돌 깨는 부녀자는 하루 15전, 부두 노동자는 하루 40~50전씩 받았음을 고려하면 빈궁한 조선인들에게 한 달 수업료 1원은 거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김용진은 1923년 경장리에 정착, 1925년 일신야학교(일신야학원)를 설립한다. 그해 학생은 모두 2백여 명. 이후 입학생은 매년 증가했으나 교실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관리비도 늘어났다. 1927년 9월에는 공유지인 팔마산 기슭을 학원 소유로 편입하고 매년 발생하는 수입금(地稅) 30여 원은 학교 운영비에 충당한다.

김용진은 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어려움 속에도 1928년 6월 학예회를 개최하는 등 학원 운영에 열성을 다한다. 그해 12월에는 무산아동 교육에 관심을 나타내는 주민 중심으로 유지회(維持會)를 조직한다. 그 과정에서 개정면 개정리 거주 문명진(文明眞)씨가 희사한 700원과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교사를 신축한다.

1928년 당시 재적 학생은 남녀 150여 명. 그해 9월부터는 학생 90여 명에게 매월 수업료를 20전씩 징수한다. 일신야학은 밤에만 수업하는 야간학교였다. 김용진은 낮에 수업하는 주간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현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민들이 기념비 세우고, 건축기성회도 조직

 
 일신야학 부흥운동을 알리는 1935년 12월 4일 치 <동아일보> 기사
 일신야학 부흥운동을 알리는 1935년 12월 4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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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은 무산 아동 교육과 문맹 퇴치에 온 힘을 다하였다. 동네에서 그를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감사하게 생각하며 기념비를 세우기로 의견을 모은다. 1935년 2월 3일 주민 수백 명이 모여 제막식을 거행했다. 일신야학교는 그해 12월 기준 재적 학생 300여 명으로 군산을 대표하는 무산 아동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해(1935) 김용진 나이는 예순여섯 당시로는 고령이었다. 그가 야학을 세우고 11년 동안 배출한 졸업생은 2천여 명, 자신의 재산 4천 원을 야학 관리 및 운영비로 사용해온 그는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그와 뜻을 함께해온 사람들이 신일야학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건축기성회를 조직한다.

건축기성회에는 군산, 옥구 지역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 농장주도 다수 동참한다. 회장단 및 임원은 위원장에 궁기보일(宮崎保一), 부위원장에 김용진, 광부가팔(光富嘉八), 위원은 웅본이평(熊本利平), 적송번부(赤松繁夫), 도곡독(島谷篤), 김형기(金炯基), 전의용(全義鎔), 서홍선(徐鴻善) 등으로 구성됐다.

그중 궁기보일은 군산에서 농지를 가장 많이 소유한 궁기가태랑 아들(양자)이고. 적송번부와 광부가팔은 도의원, 웅본이평은 개정 구마모토 농장주, 도곡독은 발산 도곡농장주로 알려진다. 도곡농장은 노령자와 극빈자에게 소작료를 후하게 잡아주고, 농사지을 동안 먹을 양식을 무이자로 대출해주거나 무상으로 나눠줘 전북에서 모범 지주로 평판이 높았다고 전한다.

전의용, 김형기, 서홍선은 군산부회 의원이었다. 특히 전의용은 서울 출신으로 신호고등상업학교 야구선수로 활약했으며 일본 유학 중에는 동경 유학생 선수단 일원으로 모국을 방문하여 시합을 가졌다. 그는 선수와 심판원 경력을 토대로 군산 야구 발전에 큰 공을 세웠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야구협회 회장(1964~1966)을 지내기도 하였다.

기성회가 발족하고 이듬해(1936) 2월 궁기보일이 건축기금으로 거금 1000원을 희사했다는 신문 보도가 주변 사람들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다. 당시 1000원은 시내에서 큰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 후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일신야학교 부흥운동 진행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연구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김용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동참
 
삼일운동(1919) 이후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한다. 이에 이상재, 한규설 등은 1920년 6월 '조선교육회'를 출범시킨다. 설립 목적은 학교 증설과 조선인 교육 차별. 1922년 2월 일제가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고 내선공학(內鮮共學)을 내세우며 관립제국대학을 설립하자 조선교육회는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 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친다.
 
군산에도 1923년 6월 지역 유지들의 발기로 '민립대학 지방부'가 설치된다. 이때 김용진은 임원으로 참여한다. 민립대학 군산 지방부는 집행위원장에 홍종익, 집행위원 김용진, 이중기, 이원형, 김홍두, 차현모, 조중환, 한상계, 라병선, 조용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뤄 김용진은 진즉부터 무산아동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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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