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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의 날을 '교육의 날'로 바꿀 것을 청원합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 갈무리.
 "스승의 날을 "교육의 날"로 바꿀 것을 청원합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 갈무리.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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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을 앞두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청원 글 하나가 등장했다. '스승의 날'을 없애고 대신 '교육의 날'로 하자는 주장이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교사라는 이름으로 안아야 하는 불명예와 불편부당한 시선들을 차라리 걷어내자는 뜻으로 교사들이 쏘아 올리는 현장의 목소리인 셈이다.

대한민국의 교사 누구도 스스로 하늘같이 높아져 대접받는 거룩한 '스승'의 자리를 노리고 탐낸 적 없었으니 그들이 느끼는 씁쓸함과 상실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스승의 날이라는 고색창연하고 묵은내 풀풀 나는 이름의 기념일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많은 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발상에 기초하고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라는 국가주의적 다짐으로 끝나는 '스승의 은혜'라는 케케묵은 노래 역시 폐기해야 마땅하다.

'스승의 날', '스승의 은혜'와 더불어 버려야 할, 그러나 못 버리고 있는 익숙한 것들이 있다. 스승의 날보다 더 오래고 해묵은 것이며 진작에 청산했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바로 '교단'과 '교편'이다.

이제 교단은 없다

아직도 몇몇 일간지나 교육 전문지, 교육기관에서 내는 책자나 기타 잡지 등에는 '교단일기'라는 제목으로 교사들의 글을 싣는다. 보통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중심으로 교사로서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쓴다. 관용적 표현으로 쓰는 '교단에 서다'라는 말은 교사(교수, 교육자)로서 일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교단'이 아직 교실에 남아있는 19세기형 학교는 대한민국에 그리 많지 않다. 거의 대부분 초중고교에서 교단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교사가 칠판 앞에 놓인 교단에 올라서서 학생들을 감시하며 수업을 진행하던 시대가 아니다. 이제 교단은 없다.
 
"원래 교단과 교탁은 5세기경 기독교 교회가 만들어지면서 사용된 제단에 그 기원을 둔다...(중략) 신도들의 시선을 모으고 그들과 성직자의 위계를 물리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 높이를 달리하며 높은 탁자가 있는 제단을 만들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대신하여 말하는 교사의 위치에 시선을 모으고 교사와 학생들 간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교단과 교탁을 학교에 도입했다." -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그러니까 교사의 권위 혹은 권력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교실에 설치한 게 교단이라는 것이다. 교단을 통해 교실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의 영역을 구분함으로써 교사에게 절대적 권위(권력)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제압-지도하는 효과를 얻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교단이 교실에 있던 시절에는 그랬다. 교사의 고유영역이자 독점공간인 교단에 함부로 올라서는 것만으로도 학생은 매를 맞거나 처벌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교사 역시 교단을 벗어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굽어보며 감시-통제하는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단이 사라진 지금의 교실 모습은 다르다. 교단이 사라짐으로써 교사는 교단 위에 붙박이장처럼 고정되는 게 아니라 학생들 사이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감시-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곁으로 걸어가서 학생들의 삶과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교사와 학생 사이에 일어난 관계의 혁명이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관계를 확장시키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없다.

교단에서 교편을 잡는다는 말은 묻어야
  
 교단은 부적절한 권위의 대명사이며 교편은 이성을 상실한 폭력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발아래의 교단은 무너졌고 손에 잡았던 교편을 버렸는데도 말이다.
 교단은 부적절한 권위의 대명사이며 교편은 이성을 상실한 폭력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발아래의 교단은 무너졌고 손에 잡았던 교편을 버렸는데도 말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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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과 더불어 버려야 할 다른 하나가 '교편(敎鞭)'이다. '교(敎)'는 회초리를 들고 아이들이 바르게 크도록 인도한다는 의미의 글자이고, '편(鞭)'은 가죽으로 된 채찍이나 회초리를 가리킨다. 교편은 회초리, 그러니까 매 혹은 매를 들어 가르친다는 말이다.

'교편을 잡는다'라고 하면 '교사(교수) 생활을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통한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회초리, 매를 들었다가는 큰일 난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체벌조차 이제는 금지되었으며 폭력으로 간주된다. 사람과 사람이 가르치고 배우면서 때리고 맞는 게 정상적인 일일 수는 없다. 학교라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교단'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말은 공공연하다. 그 말이 지닌 권위적, 폭력적, 반시대적인 뜻을 애써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단은 부적절한 권위의 대명사로, 교편은 이성을 상실한 폭력의 비유로 사용되기도 한다. 발아래의 교단은 무너졌고 손에 잡았던 교편을 버렸는데도 말이다.

이제 그 실체가 사라진 '교단', '교편' 같은 말들을 버릴 차례다. 교단에서 교편을 잡는다는 말은 묻어야 한다. "아이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교육자의 말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행동이라는 사실"(로마노 과르디니, <삶과 나이>)을 기억한다면 교단과 교편을 버리는 교사로서의 존재와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교육자로서 진정한 가치를 실천할 수 있다. 그것은 '스승의 날'과 '스승의 은혜'를 박물관으로 보내는 일만큼 값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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