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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구석에서 먼지 쌓인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꺼내 펼쳐보았다. 십 년 전쯤 한 번 읽었던 책이다. 잊고 있었던 이 책을 오랜만에 찾아 꺼내본 이유는 요즘 여러 가지 이유로 머리가 시끄럽기 때문이다. 차분히 앉아 마음과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마음이 심란하고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그리고 자기 전에 읽기 좋은 책이 있다. 꽃과 나무에 관한 책이나,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 위의 동물들에 관한 책이 그런 책이다. 천천히 글자를 눈으로 쫓아가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릿속 생각들이 단정해진다. 이런 책들은 낮에는 집중해서 읽기가 어렵고, 꼭 어둑어둑한 밤에 잘 읽히니 희한한 일이다. 이번에 그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좋았다. 가지런히 놓인 숫자들과 수식을 말하는 문장들이 딱딱하지 않으면서 단정하고 따뜻하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부터 진작에 수학은 포기하고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수포자'지만, 이 소설에 적힌 수식들에는 거부반응이 없었다. 거부는커녕 너무나 매력적인 나머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현대문학(2014)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현대문학(2014)
ⓒ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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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쓴 오가와 요코는 1962년 오키야마 시에서 태어났다. 오가와 요코는 1988년 <상처 입은 호랑나비>로 가이엔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1991년 <임신 캘린더>로 제104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쓴 후 오가와 요코는 일본에서 수학 교육의 보급에 공헌하는 개인과 단체에게 수여하는 일본수학회상 1회 수상자로 뽑히기도 했다. 소설의 끝에는 이 소설을 쓰면서 참고했던 수학 관련 참고문헌도 소개되어 있어 그녀가 수학을 소재로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문장을 고르고 써 내려갔을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열여덟 살에 아이를 임신해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성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늙은 수학자인 박사는 젊은 시절 자동차 사고로 뇌의 일부분을 다쳐 1975년에 기억이 멈춰있다. 새로운 생성된 기억은 80분간만 유지되고 80분 후에는 다시 깨끗이 지워진다. 그는 형수의 집 별채에서 혼자 오로지 수의 세계 안에서 숫자들과 함께 살아간다.

파출부로 일하는 그녀에게 어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사는 아이에게는 엄마가 있어야지 혼자 두면 안 된다며, 아이가 학교를 마치면 혼자 집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고 박사의 집에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 가라고 한다. 그렇게 박사와 파출부, 그리고 그의 아들, 이렇게 셋이 수학을 매개로 정을 쌓게 된다.

한가지 소설에서 특이한 점은 작가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독자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름 대신 숫자로 인물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신발 사이즈, 전화번호, 아니면 수학 기호 루트 같은 것.
 
내가 경계심을 풀고 박사를 신뢰하게 된 것은 박사와 아들이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였다. 가방을 멘 아들의 모습이 현관에 나타났을 때, 박사는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아들을 포옹했다. 그 두 팔에는 눈앞에 있는 연약한 존재를 보호하려는 애정이 넘쳐났다. 박사는 아들의 모자를 벗기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름은 묻지도 않고, 아들에게 딱 어울리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 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40~41쪽)

다음날이 되면 박사의 기억은 다시 깨끗이 지워지지만 박사는 언제나 루트를 기쁘게 맞이한다. 박사가 루트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기도 하고, 야구 이야기도 하고, 함께 저녁 식사도 하면서 쓸쓸했던 박사의 집은 어느새 향기롭고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찬다.

박사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숫자와 수식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수학이라고는 마트에서 물건의 값을 계산하는 것 말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루트의 엄마도 어느새 일상에서 수시로 눈에 띄는 숫자들을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느새 숫자와 수식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이다.
 
박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것은 소수였다. 나도 소수란 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사랑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소수를 아끼고 어루만지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존경했다.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고집쟁이 수에게 무슨 매력이 그리 있는지.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소수에 대해 얘기하는 박사의 한결같은 태도에 이끌리다 보니 우리 사이에 연대감 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소수가 감촉을 지닌 이미지로. 마음속에 동그마니 떠오른 것이었다. 그 이미지는 세 사람 모두 달랐을 텐데, 박사가 소수라고 한마디만 해도 서로 친밀감에 찬 눈짓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캐러멜을 떠올리면 입안에 달콤한 침이 고이는 것처럼. (87~88쪽)

소설을 읽다가 문득 '나는 왜 이렇게 일찍 수학을 포기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학교에 다니는 내내 수학과 수학 선생님을 모두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래도 처음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 구구단을 배울 때는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수학과 담을 쌓기 시작한 건 아마도 수학 시간에 x와 Y가 등장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산수에서 수학으로 넘어가는 시기. 그때부터 수학 교과서는 내가 해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렸고, 수학 선생님의 설명은 한국말이긴 하지만 외계어와도 같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만약 내가 이 소설 속 박사와 같은 수학 선생님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도 수학을 아주 잘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적어도 그렇게 일찍부터 수학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와 수학 선생님을 원망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수학 만점을 받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나로서는 딱히 할 말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학을 못해서 곤란했던 기억도 딱히 없으니, 새삼스럽게 수학 선생님을 원망할 일도 아니다.
 
"실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수학의 질서가 아름다운 거야."
박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수의 성질이 분명해졌다고 해서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지. 그러나 아무리 세상을 등지고 있다 해도, 수학의 발견이 결과적으로 현실에 응용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어. 타원 연구는 혹성의 궤도를 밝혀주고, 아인슈타인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우주의 형태를 제시했지. 소수 역시 기호의 기본으로 전쟁을 돕고 있어. 한심한 일이지. 그러나 그것은 수학의 목적이 아니야. 수학의 목적은 오로지 진실을 밝혀내는 데 있어."
박사는 진실이란 말을 소수만큼이나 중요시했다. (163쪽)

소설은 큰 사건 사고 없이 끝까지 잔잔한 강처럼 흘러간다. 결국 박사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고, 루트는 자라서 수학선생님이 된다. 어엿하게 자란 루트를 바싹 말라 작아진 박사가 힘 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로 꼭 안아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다 읽고 나니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십 년 전에 읽었을 때는 '수학을 이렇게 아름답게 설명할 수도 있구나'라는 감탄에 그쳤던 것 같은데,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 다시 읽으니 '나도 아이들에게 소설 속의 박사와 같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 가르치는 방식이 마음속에 너무나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자기 반찬이 루트보다 많으면 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주의를 주었다. 생선 토막이든 스테이크든 수박이든, 제일 좋은 부분을 가장 어린 사람에게 준다는 신념을 끝까지 관철했다. 루트가 질문을 하면 어떤 질문이든 기뻐했다. 어린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로 고민한다고 믿었다. 단순히 정확한 답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질문한 당사자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루트는 스스로 찾아낸 답 앞에서, 그 답의 정확함뿐만 아니라 질문 자체의 훌륭함에 황홀해했다. 박사는 또 루트의 몸에 대해서도 천재적인 관찰력을 보여주었다. 눈을 찌르는 속눈썹을 발견한 것도, 귓불에 난 뾰루지를 발견한 것도 나보다 빨랐다. 빤히 쳐다보고 만져보지 않고서도 루트의 어느 부분에 주목해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간파했다. 게다가 본인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내게만 살짝 가르쳐주었다.'(183쪽)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 파란 하늘과 초록 잎사귀들이 싱그러운 계절에 아이들과 함께 읽기 더없이 좋은 책이다. 학생들과 선생님이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좋겠다. 다 읽고 나면 곳곳에 숨어 있는 숫자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가만있어 보자. 내 나이가 서른여섯이니까, 36의 약수의 합이 1+2+3+4+6+12+18=46이니까 과잉수구나. 올해는 쓸데없는 생각과 욕심을 조금씩 덜어내며 살아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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