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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나 햄 등의 캔 용기를 따려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예리한 절단면에 손가락이 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절단면에 깊이 베어 봉합 수술을 받은 지인들에 비하면 내 상처는 약과였지만, 캔 용기를 딸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안심 뚜껑으로 된 캔 용기가 나오면서, 이 무시무시한 캔 뚜껑의 공포는 겨우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캔 뚜껑 때문에 부상을 입게 되면, 뚜껑의 디자인을 탓하는가, 뚜껑을 연 사람의 부주의함을 나무라는가?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 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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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야기한 원인은 분명 위험한 캔 뚜껑에 있다고, 캐스린 H. 앤서니는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에서 주장한다. 캔 뚜껑 때문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내 지인들은 다행히 손가락을 잃지는 않았지만, 나쁜 디자인의 피해 사례는 매우 심각하다.

"우발적 자상, 낙상, 절단, 평생 가는 부상, 심지어 사망을 야기하기도 한다." (p103).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면, 만들어진 모든 것은 디자인으로 탄생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디자인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것이 사용하는 사람의 필요를 최대한 반영했는지를 판단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디자인이 사용하는 사람을 결정하는 걸까? 사용하는 사람이 디자인을 결정하는 걸까?

당연히 사용하는 사람이 우선되어야 한다. 캐스린 H. 앤서니는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에서 사용자의 '디자인 결정권'이 심각히 침해당하는 사례를 패션, 제품, 건물의 측면에서 고찰한다. 저자는 '나쁜 디자인'을 비판하며, 사용하는 사람의 젠더, 연령, 체형 면의 다양한 '니즈(필요)'를 고려한 '디자인'의 '넛지'를 그 개선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패션 디자인

크고 마른 체형이 보편으로 규정되면서, 체형이 크거나 작은 사람들은 옷 앞에서 의기소침해진다. 제대로 맞는 옷을 사 입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체형이 큰 사람들은 가장 큰 사이즈의 옷을 입어도 몸을 구겨 넣어야 하는 굴욕을 감내해야 한다. 옷의 길이는 어떤가. 바지의 길이는 비교적 쉽게 수선한다지만, 셔츠나 티셔츠, 블라우스 등의 소매를 줄이는 일은 쉽지 않고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한다.

옷은 또 어찌나 유행을 타는지, 스키니 스타일이 유행할 때 폭이 넓은 바지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인의 옷은 어떤가? 노인의 옷은 정말 마땅한 것이 없다. 내 엄마는 단추 달린 오픈 스타일 니트를 좋아하는데, 매장에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노인 옷들도 어찌나 유행에 충실한지, 고령의 노인의 몸에 맞는 편한 옷을 구해 선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 옷의 디자인은 단지 젊고 크고 마른 체형에 유리하게만 고안되는 걸까?

제품 디자인

어린이 용품, 장난감, 포장, 대중교통 디자인까지, 우리는 위험천만한 디자인에 둘러싸여 있다. 트램펄린은 미소아과 협회에서 가장 위험한 놀이기구로 규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클램셸 포장'(두껍고 딱딱한 플라스틱 용기)을 뜯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견고한 포장을 뜯기 위해서는 칼로 절단해 해체해야 하는 정도의 고난도의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포장의 폭력'이 일어나는 이유는 쓰는 사람의 안전이나 편리보다는, 오직 제품의 보호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왼손잡이의 불편함은 어떨까? 오른손잡이를 전제한 연장, 학교 책상, 생산 라인 등은 '왼손잡이 증후군'을 일으켜 건강 침해는 물론, 기대수명을 줄이고 작업장에서는 산재율을 높이는 원인이 된다. 잘못된 디자인이 단순히 불편 정도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연사가 서게 되는 연단은 어떨까? 모두 키 큰 성인을 기준으로 디자인됐기 때문에, 키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는 연단에 서게 되면 보이지가 않는다. 열차나 버스, 비행기의 좌석은 어떤가? 단지 보통의 체형만 수용될 수 있다. 좁은 의자, 앞뒤 좌석 간 밭은 간격은 장시간 여행객의 편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의 다른 체형을 고려하지 않는 편향적 디자인은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연단은 높이를 조절할 수 있게 디자인할 수 있으며, 오른손잡이 전용 디자인은 양손잡이가 쓸 수 있게 만들어질 수 있고, 대중교통 좌석은 팔걸이를 제거해 넒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고안될 수 있다.

건물 디자인

저자는 "공중화장실은 당대의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중요한 역사적 유물"(p179)이라 언급하며, 건물 디자인 중 나쁜 디자인의 전형적인 사례로 화장실에 주목한다.

여남 화장실의 비율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째서 기저귀 교환대는 여성 화장실에만 있는 것인지, 왜 세면대의 높이는 아동들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지, 어째서 공립학교 화장실을 비위생적이고 폭력의 장소로 방치되는지 물으면서, 그 대안도 함께 제시한다.

기저귀 교환대를 남성 화장실에도 설치하거나, '가족 화장실'을 배치하면 된다. 높게 디자인된 세면대는 아동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디딤대인 스태픈워시(STEP'N WASH)를 설치해 보완할 수 있으며, 공립학교 화장실은 '남녀공용화장실' 또는 '젠더중립화장실'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남녀공용화장실'이나 '젠더중립화장실'은 이미 미국 150곳 대학에 설치되어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시선을 미국 안으로 한정하지 않고, 세계의 화장실 실태도 보고한다. 아프리카 소녀들은 학교에 화장실이 없어 등교를 할 수 없고, 인도의 3억 3천만 여성들 또한 화장실이 없는 채 살아가고 있다.

직업의 '젠더 편향'은 나쁜 디자인과 연동된다. 남자들이 독점하는 직업군인 건축가, 엔지니어, 과학자의 경우, 임금 격차, 지지기반 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수유시설의 부재와 화장실의 낮은 접근성 등으로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다. MIT 낸시 홉킨스 교수는 남성에 비해 훨씬 협소한 연구 공간, 연구비의 낮은 책정 등을 문제 삼으며, '젠더 편향성'을 제기한 바 있다.(p286) 이에 MIT는 문제 제기 후 6년 만에 개선책을 내놓았다.

저자는 여성의 정치 진출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당에 상하원 전용 화장실이 여전히 남성 전용임을 일깨운다. 또한 법원의 경우 어린이용 대기실, 직원 대상 보육 시설 등의 공간이 고려되지 않는 '권력만을 위한 공간'임을 지적한다. 법원의 젠더 편향성은 꾸준한 문제 제기와 법원젠더편향위원회의 노력으로 개선되는 중이다.

여성 인력이 현저히 적은 소방서의 경우, 샤워실, 탈의실, 수면실 등 여성대원의 공간이 부재하다. 여성 대원에게도 시설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유방 뢴트겐선 조영법
 유방 뢴트겐선 조영법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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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병원의 나쁜 디자인이 환자의 '편하게 아플 권리'를 어떻게 침해하는지 밝힌다. 유방 영상기가 얼마나 고통을 유발하는지는 사용해 본 여성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산부인과 병동 침대가 의사의 편의에 맞게 디자인된 점, 병실의 채광 불량이 환자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점, 안내 표지판이 모두 영어로만 되어 있어 비 영어 사용 환자들의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점 등은, 병원의 디자인이 환자를 우선하는 게 아니라, 진료자 중심으로 되어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한국의 병원 환경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주택단지는 어떨까? 여기엔 어떤 디자인 편향성이 있을까? 교외 주택의 경우 노인과 어린이에게 불리한 환경이다. 부족한 보도 접근성, 녹색 공간의 부재는 건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공동주택이 대부분인 한국의 저층 공동주택의 경우, 엘리베이터가 설계되어 있지 않아 장애인은 물론 노인들이 거의 갇혀 지내는 처지이다.

주택 단지를 '부'의 기준으로 구분해 볼 때, 사는 곳에 따라 건강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가난한 동네의 경우, 소음, 거리 교통량, 공기 물의 오염 등이 심각하여,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게 된다.

한 연구 결과는 열악한 주택 설계가 아이들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인지발달을 저해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전망(자연 풍광)과 자연광은 정신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주택과 주택단지를 디자인함에 있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주거 공간인 한국의 고시원 등을 생각해볼 때, 유의미한 개선점을 제시하고 있다.

디자인은 어떤 필요에 의해 고안돼야 하는가

저자는 모든 디자인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용하는 사람의 다양한 필요와 요구를 수용한 건강한 디자인은, 젠더, 체형, 연령 등 인간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가능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그러기위해서 우선, 고작 20%인 여성 산업 디자이너의 비율을 현격히 증가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한 시민의 역할은 없는 걸까? 저자는 시민의 부단한 요구만이 더 나은 디자인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고 설득한다. 시민의 각성과 행동으로 성취한 '디자인 결정권'은, 디자인에 사람을 꿰맞추는 '나쁜 디자인의 폭력'을 막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예정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 여성과 아동, 소수자를 외면하는 일상의 디자인을 고발하다

캐스린 H. 앤서니 지음, 이재경 옮김, 반니(2018)


태그:#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 #개스린 H. 앤서니 , #디자인 폭력, # 디자인 편향성, #유니버설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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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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