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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회 개막식장의 문미순 작가
 전시회 개막식장의 문미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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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축제 특별전시《문텐(文展)로드》가 5월 1일부터 7일까지 부산 아스티 호텔 3층 갤러리에서 열렸다. 여기서 문텐이란 문미순 전시라는 뜻이다. 문미순은 한지인형 명인으로 최근 10년간 조선통신사 인형 재현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그녀는 조선통신사행렬도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를 인형으로 재현한 바 있다. 이들 전시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여러 번 열렸다. 이번 특별전은 행렬도에 나오는 삼사(三使) 등 중심인물과 마상재(馬上才)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문진우 사진가의 조선통신사 관련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사진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문진우는 부산매일신문 사진부 기자 때인 2003년부터 조선통신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포토스페이스 중강> 대표로 국제신문에 [부산 도심여행]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박외수 서예가의 글씨도 걸려 있다. 글씨는 '조선과 일본이 이웃으로 교류함에 있어 믿음과 정성을 다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교린이신(交隣以信), 교린이성(交隣以誠), 성신교린(誠信交隣)이 그것이다.
 
 통신사 삼사
 통신사 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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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입구에 조선통신사 삼사의 인형이 있다. 삼사는 정사, 부사, 종사관을 말한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이들 삼사가 왕으로부터 칙명(勅命)을 받는 장면이 나타난다. 칙명에 정사 조태억(趙泰億) 부사 임수간(任守幹) 종사관 이방언(李邦彦)이라 적혀 있다. 그렇다면 숙종 37년(1711) 제8차 통신사행 모습이다. 이들은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왕이 세 사신을 친견하고 서계와 예물을 전달하다
 
 숙종 임금을 알현하는 통신사 삼사
 숙종 임금을 알현하는 통신사 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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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떠난 삼사 중 부사인 임수간이 여행기인 『동사일기(東槎日記)』를 남겼다. 통신사 좌목(座目)에 보면 조태억 정사는 호조참의였고, 임수간 부사는 사복시정이었으며, 이방언 종사관은 병조정랑이었다. 이들 삼사는 5월 15일 임금을 알현하고 어주(御酒)를 하사받는다. 이 때 임금은 삼사에게 과음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 무더운 여름에 원행하게 되었으니 과음하지 말 것이며 마시더라도 석 잔에 지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는 해로가 험하지 않은지 물어본다. 이에 임수간 등은 해로가 멀기는 하지만 노정이 그리 험하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이들 일행은 궁궐을 나와 숭례문을 지나 남관왕묘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즉 관복을 벗고 근무복을 입거나 여행복장을 했다는 뜻이 된다. 이들은 비를 무릅쓰고 한강을 건너 양재역에 이르러 하루를 묵는다.

실무적인 교섭을 담당했던 사람들 인형
 
 조선과 일본의 외교교섭 실무자 인형
 조선과 일본의 외교교섭 실무자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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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을 받은 삼사는 이렇게 한양을 떠나 에도에 갔다 289일 만에 돌아온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신행은 실무진의 협의와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이 동래부와 대마번의 관리와 역관들이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현덕윤(玄德潤: 1676-1737)과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다. 현덕윤은 왜학역관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일본어뿐 아니라 시서(詩書)에도 능했다. 그는 1711년 왜학상통사(倭學上通事)로 일본을 방문해 사신들의 업무를 도왔다.

그가 남긴 필적 2점이 일본 시즈오카(靜岡) 세이켄지(淸見寺)에 남아 있다. 그는 1718년 문위행(問慰行) 도해(渡海)역관사로 대마도에 가 1719는 통신사행을 위한 사전작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29년에는 동래부 왜학훈도로 근무하면서 훈도청을 크게 보수하였다. 훈도청의 이름을 성신당(誠信堂)이라 했는데, 그것은 당시 조선과 일본간 교류 어젠다인 '정성과 믿음'에서 따왔다. 현덕윤의 대마도측 파트너가 아메노모리 호슈다.
 
 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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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모리 호슈는 1668년 시가현(滋賀縣) 나가하마(長浜)에서 태어났다. 1689년 에도에서 대마번주인 종가(宗家)의 가신이 되었고, 1693년 대마도로 건너가 행정보좌역으로 대조선 업무를 담당한다. 그가 맡은 일은 조선의 동래부로 보내는 문서 작성, 대조선 무역 업무 수행, 역관의 접대와 양성 등이었다. 1711년과 1719년에는 대마도를 통해 에도로 가는 조선통신사들을 접대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1719년 아메노모리 호슈가 대마도에서 만난 사람이 또 한 사람이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다. 그는 제술관으로 통신사행에 다녀온 후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이 책은 일본의 사정을 가장 정확히 기록한 통신사 기행서다. 그곳에 보면 아메노모리 호슈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메노모리가 중국어(漢語)와 조선어에 능통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 표정을 보면 노회한 역관이었다는 것이다. 
 
 신유한
 신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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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형상을 보니, 험하고 독하여 평탄하지 못하였고, 겉으로는 문장을 한다고 핑계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창과 칼을 품고 있다. 만약 그로 하여금 국가의 높은 지위에서 권력을 잡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이웃 나라에 일을 내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국법에 국한되어 작은 섬의 한 개의 기실(記室)에 불과하여 그 땅에 살다가 늙어 죽게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는 것이다."

필담창화(筆談唱和) 모습을 보여주는 인형들
 
 필담창화
 필담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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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담창화는 글씨와 그림을 통한 의사소통을 말한다. 이곳에는 통신사 일행이 글씨와 그림을 일본인에게 주는 모습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이러한 필담창화의 모습은 임수간의 『동사일기』「강관필담(江關筆談)」편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강관은 에도(江戶)와 시모노세키(下關)에서 한자씩 따 만든 표현이다. 그러므로 「강관필담(江關筆談)」은 에도와 시모노세키에서 주고받아 정리한 필담이 된다.

"지난번 내가 갔을 때, 대마도 사람 우삼동(雨森東)이 도중에 시권(詩卷)을 가지고 와서 우리들에게 서문을 지어 주기를 청하기에 물어보니, 축후수 원여(筑後守源璵)가 지은 것이다. 시가 자못 청고(淸高)하고 볼 만하여 우리 세 사신은 각각 글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동무(東武)에서 30리 쯤 되는 곳에 이르니, 원여가 마중을 나와 매우 간곡히 대하였고, 관(館)에 머무는 동안에도 자주 찾아 주었다.

그리하여 서로가 두 나라 사이의 교환(交驩)하는 뜻을 필담(筆談)으로 하는데, 간혹 농담을 섞어 웃기도 한 것이 하루에 무릇 수십 백 장이라, 비록 붓 나가는 대로 쓴 것이나마 이따금 전할 만한 것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하관(下關)에서 풍랑에 막혀 여러 날 묵게 되었는데, 하도 무료한 심정이라 행장 속의 필담한 낡은 종이를 꺼내 엮어서 차례를 정하고 그 이름을 「강관필담」이라 하였다."
 
 
 이방언의 '일동제일형승'
 이방언의 "일동제일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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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삼동은 아메노모리 호슈의 한자식 이름이다. 축후수 원여는 도쿠가와 이에노부 쇼군 시대 정치가이자 주자학자이다. 그의 일본 이름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다. 그런데 필담창화 인형에는 일동제일형승(日東第一形勝)이라는 글씨와 그것을 쓴 종사관 이방언의 모습이 눈에 띈다. '동쪽 일본의 제일가는 명승'이라는 뜻으로 후쿠젠지(福禪寺) 창문 위(門楣)에 걸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이 글씨가 절 입구에 표지석으로도 세워져 있다.

말에서 부리는 재주를 보여주는 인형들
 
 <문텐로드전>을 찾은 일본 히로시마 거리공연팀 모미지렌(紅葉連)
 <문텐로드전>을 찾은 일본 히로시마 거리공연팀 모미지렌(紅葉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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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재는 말 그대로 말을 타고 부리는 무술이자 예술이다. 그래서 무예(Martial Arts)라고 부를 수 있다. 마상재는 소동(小童)과 함께 조신통신사행에 따라간 대표적인 문화사절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고, 소동춤은 가라코오도리(唐子踊)라는 이름으로 우시마도(牛窓) 등에 남아 있다. 마상재 역시 무형문화유산으로 일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정조 때 발간된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그 내용과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소개된 마상재는 4가지로 나눠진다. 말 타고 재주부리기, 말 타고 무기 사용하기, 다수의 말과 사람이 기예 보여주기, 말 타고 경주하기다. 그 중 말 타고 재주부리는 모습이 8가지 인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들 용어가 한자말이어서 어렵다. 이를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정니리 인형
 정니리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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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두 마리 말 위에 선 채로 달리기(雙馬立馬) ② 말안장을 붙들고 좌우 넘나들며 일곱 걸음 가기(左右七步) ③ 말 위에 거꾸로 서기(馬上倒立) ④ 말 위에 가로 눕기(馬上橫臥) ⑤ 말 옆에 몸 숨기기(鐙裏藏身) ⑥ 좌우로 말 등 넘나 들기(左右超馬) ⑦ 말 옆에 몸을 비스듬하게 거꾸로 세워 흙먼지 일으키기(淨泥裏) ⑧ 말 위에서 머리를 꼬리 쪽으로 눕히기(臥枕馬尾)

사실 마상재 인형을 만드는 일은 마상재를 시연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고 한다. 그것은 문미순 명인이 마상재 모습을 제대로 본 적도 없고, 이를 설명하는 자료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설명과 그림을 작품 제작에 참고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마상재 인형에서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몸을 완전히 거꾸로 또는 비스듬하게 거꾸로 세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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