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연출한 송원근 감독.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연출한 송원근 감독. ⓒ 이선필

 
상처와 절망, 그리고 희망과 좌절. 일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은 그렇게 극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주름은 굴곡진 우리 역사의 비극을 상징하며 그 사이에 아마도 차마 말로 다 못할 사연들이 비밀처럼 숨어 있을 것이다. 

그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로 피해자 할머니들을 조명한 작품이 이어져왔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 중인 <김복동>은 생의 끝에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낸 김복동 할머니의 마지막 투쟁 모습을 담고 있다.

첫 상영 당시 관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의 존재만으로 관객들에게 어떤 감흥을 주기 충분했다. 7일 전주 영화의 거리 모처에서 송원근 감독을 만났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영화는 30년에 달하는 김복동 할머니의 투쟁 기록과 지난 1월 2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 정의기억연대(아래 정의연)의 자료를 <뉴스타파>가 받아 재구성하고 추가 취재한 결과물이다. 

MBC에서 아침 프로, 시사 프로인 < W(더블유) > 등을 연출했던 송원근 피디는 2013년 <뉴스타파>에 합류, 세월호 1주기 무렵 <세월호 골든타임, 국가는 없었다> 등을 연출했다. 2018년 말 미디어몽구로부터 김복동 할머니 소식을 듣고 급히 관계자들을 만난 후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처음부터 영화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김복동 할머니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몽구에게 전해 듣고, 그간 피해자로서 메시지를 던지며 인권활동가로 활동하신 한 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활동을 어떻게 돌아보고 계실지 궁금했다. 유튜브용으로 제작하다가 영화 제작으로 방향을 틀게 됐다. 미디어몽구가 2011년부터 정의연 및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고 계속 촬영하고 있었다. 영상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말에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와도 함께 만나서 할머니에 대한 모든 기록, 그러니까 영상, 녹음, 사진 등 있는 대로 달라 해서 정리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생애로만 보지 말자는 생각이 있었다. 1992년부터 2018년까지를 선으로 두고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입장 변화를 놓고 보니까 언제 할머니가 좌절해서 부산으로 내려갔고, 왜 다시 서울에 왔는지가 보이더라. 점점 일본이 극우화되니 할머니는 다소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셨다. 해외로 나가서 목소리를 내신 거지. 이 타임라인을 기반으로 할머니가 어떻게 대응해서 싸웠는지를 보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의 한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

 
영화엔 소녀상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위안부 피해자 운동에 있어서 소녀상은 상징적이다. 지난했던 투쟁의 시간, 일본의 사과와 직접적인 배상이라는 요구가 허공에 흩어질 때 소녀상은 다시금 할머니들에게 생기를 준 계기가 됐다. 송 감독은 "특히 젊은 친구들이 할머니 곁으로 모이게끔 하는 동력이기도 했다"며 그 의의를 전했다.

"20년 넘게 투쟁하면서 지쳐있던 때에 소녀상이 등장했다. 할머니들이 뺏겼고, 잃어버렸던 그 모습이었다. 아마 소녀상으로 어떤 정답을 찾지 않으셨나 싶다. 그 전까지 어린 친구가 할머니들을 찾으면 (할머니들이) 화를 내셨다더라. 당신들이 당한 걸 어린 친구에게 말하기 싫으셨던 거지. 근데 그 이후 명확하게 하실 일을 깨달으신 것 같다. 저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멀리서만 바라봤던 할머니들이 사실은 수십 년째 매주 수요일 같은 자리에 계셨다는 걸 알게 됐다. 

소녀상의 그림자가 할머니 형상이라는 사실, 발뒤꿈치가 올라와 있다는 사실,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 또 머리 역시 단발이 아닌 뜯긴 머리 형태라는 사실을 이번에야 알게 됐다. 너무 우리 사회가 대상을 단순화해서 보는 거 아닐지. 나조차도 그랬구나 느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영화에서 묘사하는 김복동 할머니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모든 사물을 깔끔하게 정리해놓는 사람이었다. 제작진 역시 처음부터 할머니와 관계를 맺어온 게 아니기에 접근이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을 때부터 합류한 <뉴스타파> 제작진은 조금씩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며 그의 본질을 보려 했다.

"저희는 10월, 11월경 몇 차례 응급실을 찾았고, 숙소로 돌아가시는 과정을 찍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전 재산을 기부하는 마지막 행사를 할머니 방에서 진행했는데 제가 그 방에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미디어몽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지. 영화 기획안이 아직 없던 때였다. 멀찌감치 몽구가 촬영하는 걸 봤다. 마지막 유지를 전하는 느낌이더라.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저는 그 문턱도 넘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 이후로 한 발자국도 아닌 한 발가락씩 다가갔던 것 같다. 그러다 조금은 말을 건넬 입장이 됐고. 조선학교 학생들을 보시면 그렇게 우신다. 제가 '왜 우세요' 여쭤보는데 희한하게 눈물이 난다고 하시더라. 당신 역시 그 이유를 정리 못 하셨더라. 그 이후로 병실에 오래 못 계셨다. 모든 게 제겐 의미로 다가오더라. 

영화를 할 수 있던 것도 개인적 친밀도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몽구처럼 개인의 삶에 집중하기보단 공적인 삶을 본 거였다. 그와 정의연과 한 배를 타고 이동하진 않았지만 그 배 가까이 있는 나루터에서 그 배가 어떻게 오는지 경로를 봤다고 생각한다. 그 배가 언제 휘청거렸고, 또 제대로 갔는지 쭉 지켜보는 역할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레이터로 참여한 배우 한지민 역시 김복동 할머니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2017년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된 곳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조성된 '기억의 터' 1주년 행사 홍보대사로 한지민이 위촉된 것. 당시 한지민은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김복동 할머니를 직접 만났고, 이를 알게 된 제작진이 한지민을 영화 내레이터로 섭외했다. 

"당시 행사에서 한지민씨가 할머니 손도 잡고, 노래도 같이 부르는 모습을 봤다. 기획안과 시놉시스를 보냈고, 하겠다는 답변이 왔다. 김복동 할머니를 알고 계시더라. 행사 때 그 모습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길원옥 할머니 손을 잡고 이동하느라 김복동 할머니 손을 못 잡은 게 속상했다고 하셨다. 아, 우리 영화를 일이 아닌 마음으로 접근하는구나 느꼈다. 원고를 보내드리면서 우리도 한지민씨에게 토닥토닥 할머니를 안아주는 느낌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너무 잘해주셨다." 

따뜻했던 손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연출한 송원근 감독.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연출한 송원근 감독. ⓒ 이선필

 
송원근 감독은 유독 김복동 할머니의 손을 잡는 게 조심스러웠던 사연을 전했다. 조용하고 엄격한 자세로 누군가 자신의 손 잡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김복동 할머니의 손을 마지막 순간에야 잡을 수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나지막이 했던 김복동 할머니의 말을 감독은 기억하고 있었다.

"94세 할머니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의 처음으로 돌아가는구나 생각했다. 할머니 손이 차가울 줄 알았는데 따뜻해서 놀랐다. 할머니께서 낯선 기운을 느끼셨는지 목을 좀 돌리셨다. 정의연 윤미향 대표가 영화 만들고 있는 감독이라 소개하니 뿌리치지 않으시더라. 돌아가셨을 순간 손에 온기가 남아 있잖나. 다시 그 손을 잡고 '영화 잘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아마 들으셨을 거다.  

영화를 보시면 할머니께서 수요집회 때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서도 항상 일본 대사관을 향해 외치신다. '일본 대사는 들으라!'고. 할머니께서 계속 그런 말을 하시거든. 내일 죽을지 한달 뒤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좀 편안하게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사실 (진정성 있는 사과가) 대단한 게 아니다. 일본은 복잡미묘한 표현으로 사과를 안 하면서 피해자를 기만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절에 그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일 수 있겠지만 지금 시대에선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는 인정할 수 있지 않나.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걸 느낀다.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그렇게 대처할까."


송원근 감독은 "단순히 김복동 할머니의 생활만 조명하는 게 아닌 그분의 30년 가까운 운동사를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할머니의 활동 속에 일본 정부, 국제 사회 대응이 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아닌,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을 알리는 것". 저널리즘 다큐멘터리에 대한 송원근 감독의 정의였다. <김복동>과 함께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상영 중인 <삽질> 또한 기자들이 만든 또 하나의 다큐멘터리다. 송원근 감독은 "알아야 할 사실을 잘 전달하는 게 저널리즘이 해야 할 일"이라며 최근 저널리즘 다큐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자백>이 국정원 간첩 조작 이야기를 했고, <공범자들>이 공영방송을 장악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권력자들을 이야기했다. <삽질>도 이명박 시대에 개발 논리로 자연을 바라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담았다. 그런 사실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건 우리 같은 언론사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가진 힘이 있다. 저널리즘의 문제의식과 영화라는 매체적 특징이 연결되는 셈이지. 방송용 다큐를 왜 극장에서 하냐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은 교감의 가능성을 간과하시는 게 아닐지. 리포팅이나 기사처럼 일방적 메시지 전달이 아닌 교감의 힘이 영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김복동 전주국제영화제 송원근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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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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