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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계몽 사상가인 루소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사상가들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그에 맞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심지어 '노예'와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도 우리와 똑같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다'며 인간의 평등을 강조했다.

그런 그들이 '평등한 권리를 누릴'에서 제외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여성이다. 시대를 이끌었던 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들은 '여성은 남성을 위해 태어난 존재 혹은 남성 때문에 가능한 존재(부속물)'와 같은 당대의 보편적인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루소는 심지어 "우리 남성들을 기쁘게 하고, 남성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 여성의 의무"라고 정의하는가 하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여성은 제외다.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시킬 필요도 없고,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라고 했다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과 사상에 반기를 든 여성이 있었다. 영국의 급진적 사상가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년)는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통해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이성적 존재이며, 따라서 교육을 비롯한 보편적인 권리를 누려야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어땠을까? 아마도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 같다.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까지도 말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그릇된 인식과 악습의 희생자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조선 여성들이 그렇게만 살지 않았다. 아주 드물지만 자주적 삶을 선언하고, 그처럼 당당하게 살았던 '신인류'와 같은 여성도 있었다. 그간 <규합총서>의 저자 정도로만 알려진 빙허각 이씨(1759~1824년, 아래 빙허각)도 그런 여성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의 형수이기도 하다.
 
"기댈 빙(憑), 빌 허(虛), 집 각(閣) 빙허각이온데 '허공에 기대어 산다'라는 뜻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담은 이름입니다." - 107쪽에서.

당시 우리보다 문물이 발달한 청나라는 조선 사람들에게 선망의 나라였다. 실학자 집안으로 남다른 학구열을 가졌던 빙허각의 친정과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빙허각 또한 마찬가지. 그런데 빙허각은 단순한 선망에 그치지 않고 필요하다 싶으면 생활에 적극 활용했다. 자동약탕기가 대표적인 물건 중 하나이다.

당시 약탕기는 여성들에게 애환의 존재였다. 아차 하는 한순간 끓어 넘쳐 버리는가하면, 너무 졸아버리거나 태워먹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불 사정도 좋지 못했다. 그러니 약을 달이는 동안 극도의 조바심 속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청나라에선 보다 편리한 약탕기를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 빙허각은 그런 약탕기를 힌트로 조선만의 약탕기를 발명했다고 한다.

당시 빙허각의 약탕기는 민간에서뿐만 아니라 궁궐에서까지 많이 쓰였다고 한다. 이처럼 일상에서 자주 쓰이지만 불편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물건들을 개선하거나, 필요하다 싶으면 발명해 보다 쉽게 쓸 수 있게 하는 것, 대대로 이어져온 전통일지라도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것 등은 빙허각이 추구하고 적극 실천한 학문이었다.  
 
<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책표지.
 <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책표지.
ⓒ 자연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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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기대선 여자>(저자 곽미경, 자연경심 펴냄)는 빙허각의 삶을 조명한 역사소설이다. 소설은 이러한 빙허각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를 물 흐르듯, 시간 순으로 들려준다. 그래서 소설은 좀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넘겨 읽다가 결국 열일을 제쳐두고 끝까지 내쳐 읽은 책이 되었다. 이와 같은 끌림은 어찌 된 걸까.

조선시대 여성의 행적이라고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빙허각의 선구적이며 당당한 삶 때문이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나 소설인 만큼 어느 정도의 허구를 염두에 두고 읽어도 너무나 의외다 싶은 그런 한 조선 여성의 삶에 대한 경이로움 때문에.

이미 언급했듯 빙허각은 서유구의 형수이다. 그런데 단순한 형수가 아니었다. 서유구의 학문적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남녀차별과 집안사람들끼리의 서열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한 남성의 스승이었던 한 여성의 존재감을 말이다.

게다가 정조 세손 시절 스승을 배출한 명망 있는 학문 가문으로 대대로 벼슬아치들을 배출해온 서씨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시동생의 스승이었던 며느리를 말이다. 또한 미뤄 짐작해보자. 서유구에게 빙허각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과연 <임원경제지>가 가능했을까?

곽미경 작가는 어쩌다 빙허각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됐을까. 지난 4일 전화로 물을 기회가 있었다.

"서유구가 형수이자 스승이었던 빙허각의 비문을 썼는데요. 오늘날 기준 10폰트 A4 1매 반 분량에 빙허각의 삶을 자세하고 명쾌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비문을 그대로 소설화했습니다. 정조는 서유구 집안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습니다. 서유구의 할아버지 서명응이 정조 세손 시절 스승이기도 하고, 뭣보다 정치 노선이 같았습니다. 추구하는 학문 방향도 같았고. 그래서 정조는 보위에 오르고서도 서씨 집안을 자주 찾았고, 궁궐로 서씨 집안 사람들을 자주 불렀다고 해요.

비문에도 기록될 정도로 빙허각에 대한 정조의 스승 서명응의 평가는 실로 대단했다고 해요. 빙허각은 정조처럼 당시 대다수 조선인들에게 낯선 학문이었던 수학(기하학)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고. 정조와 빙허각은 불과 몇 년 차이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사실들과 당시의 상황이나 정조에 대한 기록들을 미뤄 짐작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소설에서처럼 정조와 빙허각의 관계를 상상해보기도 했죠."


빙허각은 한·중·일 3개국 실학자 99명중 유일한 여성실학자이다. 가문이 어려워지자 가문의 생계를 위해 대규모 차밭을 운영하는 것으로 '조선 최초의 대규모 차밭 농장주'로도 기록되고 있다. <청규박물지>, <빙허각고>의 저자이기도 하며, 백화주와 절명사의 주인공이다.

여성으로서 이와 같은 빙허각의 삶을 다룬 <허공에 기대선 여자>를 읽으며 생각이 남다른 것은 당연하다.

빙허각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같은 해 태어났다. 그러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에게 남존여비 사회로 알려진 조선에서 태어난 여성 빙허각이 선입견을 깨고 당당하고 자주적인 삶을 살았다는 거다. 그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세계로 알려진 서양에서 태어난 여성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책과 함께 조롱받거나 논란거리가 되었으며, 결국 비극적인 삶을 마무리했다.

빙허각의 그와 같은 삶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정반대의 삶을 미뤄 짐작, 생각해본다. 빙허각 이씨가 제아무리 총명했기로 친정아버지나 남편 등, 집안사람들의 진정한 이해나 실천적인 협조, 독려와 응원 등이 없었다면 빙허각의 이런 삶이 가능했을까?

오늘날로 치면 상류층 집안임에도 뭣보다 '딸의 재능을 살려줄 가문인가'를 첫째 조건으로 결혼시킨 빙허각의 친정, 며느리를 가문을 위한 일보다 자신의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한편 몸소 실천하는 것으로 외조를 중시한 서씨 가문 어른들에 감동하며 읽은 소설이기도 하다.

당시 남성들의 보편적인 상식이었다는 남존여비 혹은 가부장적인 삶과 정반대로 여성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고 배려한 당시의 남자들의 모습은 여전히 가부장제를 사는 지금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허공에 기대선 여자 빙허각

곽미경 지음, 자연경실(2019)


태그:#빙허각, #규합총서, #서유구(임원경제지), #루소, #곽미경(풍석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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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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