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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비앓이'를 하는지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앓는 건 하늘 뿐, 영주 무섬마을 가는 내 마음, 내 발은 가볍다. 무섬은 350도 물이 휘돌아 육지 속 섬마을이라 불린다. 원래 이름은 물섬, 'ㄹ'은 물에 흘러갔는지 어느새 물섬은 무섬이 되었다. 한자 좋아하는 이는 수도(水島)라 한다.
  
무섬마을 정경 무섬마을은 태극모양으로 크게 휘돌아가는 내성천가에 있다. 그 마을 모양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하여 무섬이라 했다. 350여 년 동안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기와집과 초가집 짓고 한데 어울려 잘 살아왔다.
▲ 무섬마을 정경 무섬마을은 태극모양으로 크게 휘돌아가는 내성천가에 있다. 그 마을 모양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하여 무섬이라 했다. 350여 년 동안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기와집과 초가집 짓고 한데 어울려 잘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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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를 훑고 온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시작하여 영주시를 적신 서천 물이 무섬 바로 앞에서 만나 제법 몸집을 불리더니 산을 깎고 다듬기를 수 만년, 물 위에 뜬 아름다운 연꽃마을을 빚었다. 풍수지리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형상이라 하여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다리, 무섬 외나무다리

1983년 수도교가 놓이기 전, 세상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외나무다리뿐이었다. 농사를 지으려 해도 학교나 장에 가려해도 아슬아슬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내 평생 차멀미, 뱃멀미, 사람에 치여 사람멀미를 해보았어도 외나무다리 위에서 물멀미는 처음 해보았다.

꽃가마길이 꽃상여길이 될 줄 누가 알았을꼬. 꽃가마 타고 시집 와서 평생 한 마을에 살다 꽃상여 타고 저 세상으로 떠난 애잔한 다리다. 1932년 여름에는 독립운동하다 일경에게 붙잡힌 18명 마을청년이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영주천변으로 끌려간 한 많은 다리였다.
  
외나무다리 정경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다리다. 시대별로 마을사람들의 생활사가 얽혀있는 다리다. 시가 주관하여 만들면서 태극모양으로 휘어지게 만들었다.
▲ 외나무다리 정경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다리다. 시대별로 마을사람들의 생활사가 얽혀있는 다리다. 시가 주관하여 만들면서 태극모양으로 휘어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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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남1녀를 무섬에서 키워낸 장두진(92) 할머니는 김위진가옥 안채에서 세월을 더듬었다.

"저그 금강(평은면 금광리)에서 시집 안 왔능교, 외나무다리 건너 꽃가매 타고 왔니더. 금강은 이자 영주댐으로 수몰되었어라. 땜이 들어서 서천 물은 그대로나 동천(내성천)은 물이 질질거려 물이 쪼그라들었니더. 아 학교 보낼 때 물 많은 강을 아 둘을 업고 건너다녔구먼. 꽁꽁 언 다리를 갔다오믄 발바닥이 감각이 없어졌어라. 고생이 이만저만 하지 않았겠능교?"

반남박씨, 선성김씨 집성마을, 무섬마을

마을이 생긴 지는 350년 넘었다. 1666년 마을서편 강 건너 머럼(원암)마을에서 살던 반남박씨 박수(1641-1729)가 건너와 터 잡았다. 그 후 선성김씨 김대(1732-1809)가 박수의 증손녀 사위로 들어와 두 집안이 나란히 번창하여 반남박씨와 선성김씨의 집성마을이 되었다.
  
만죽재고택 입향조 반남박씨 박수가 지은 집으로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93호로 지정되어 있다.
▲ 만죽재고택 입향조 반남박씨 박수가 지은 집으로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9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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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당고택   선성김씨 입향조 김대의 후손, 김락풍이 중수한 집으로 마을에서 규모가 제일 큰 집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92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해우당고택  선성김씨 입향조 김대의 후손, 김락풍이 중수한 집으로 마을에서 규모가 제일 큰 집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92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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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이 역설적으로 보존을 낳았다. 문화재로 등록된 집만 만죽재와 해우당을 비롯해 9집이나 된다. 만죽재, 박덕우, 박천립가옥, 오헌고택 등 반남박씨 집은 마을 가운데 몰려있고 해우당, 김뢰진, 김정규, 김위진가옥 등 선성김씨 집은 마을 양쪽에 넓게 퍼져 있다.
  
무섬마을 담 무섬마을에는 농지, 우물, 담과 대문, 사당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만죽재, 박천립가옥, 오헌고택으로 이어지는 담만은 두터워 이웃정과 옛집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 무섬마을 담 무섬마을에는 농지, 우물, 담과 대문, 사당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만죽재, 박천립가옥, 오헌고택으로 이어지는 담만은 두터워 이웃정과 옛집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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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가 맨 처음 지은 집은 만죽재(晩竹齋) 고택. 원래 섬계초당(剡溪草堂)이라 했으나 박수의 8대손 만죽재 박승훈(1865-1924)이 중수하고 당호를 만죽재라 했다. 무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 만죽재라면 가장 큰 집은 해우당(海愚堂) 고택이다. 1830년 선성김씨 입향조 김대의 손자, 김영각(1809-1876)이 짓고 해우당 김락풍(1825-1900)이 1879년에 중수하였다.

선성김씨 해우당의 흥선대원군 글씨와 반남박씨 오헌고택의 박규수 글씨

'육지 섬마을'이라 해서 무섬마을은 바깥세상과 단절되지 않았다. 이름난 이의 방문이 이어졌고 다른 고을과 인맥을 넓혀 나갔다. 흥선대원군은 해우당을 방문하여 '해우당(海愚堂)' 현판글씨를 썼고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1875년 오헌 박제연의 '오헌(吾軒)' 당호글씨를 남겼다.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락풍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부터 친분을 쌓아 둘은 막역한 관계였다. 오헌(1807-1890)은 40여 년 관직생활을 하면서 종친이며 동갑내기 박규수(1807-1876)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가 전한다. 1874년 박규수가 박제연에게 보낸 편지로 박제연의 손자가 과거시험 일로 서울로 왔다가 헛되이 가게 된 것을 위로하고 있다.
  
해우당편액 글씨 해우당 김락풍과 막역한 사이인 흥선대원군이 해우당을 방문하여 쓴 글씨다.
▲ 해우당편액 글씨 해우당 김락풍과 막역한 사이인 흥선대원군이 해우당을 방문하여 쓴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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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헌 글씨 오헌 박제연과 밀접한 관계였던 박규수가 1874년에 백송정에서 쓴 글씨다.  흥선대원군을 따르지 않고 물러난 오헌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퇴정(淸退亭)과 오헌고택 사랑채에도 걸려있다. 원본사진으로 무섬자료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 오헌 글씨 오헌 박제연과 밀접한 관계였던 박규수가 1874년에 백송정에서 쓴 글씨다. 흥선대원군을 따르지 않고 물러난 오헌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퇴정(淸退亭)과 오헌고택 사랑채에도 걸려있다. 원본사진으로 무섬자료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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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사상을 배경으로 쇄국정책을 편 대원군과 개화사상가 박규수의 글씨가 선성김씨 집안, 해우당고택과 반남박씨 집안, 오헌고택에 각각 걸려있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선성김씨 김락풍과 대원군, 반남박씨 박제연과 박규수와의 두터운 친분관계는 초창기 무섬마을 민족운동(독립운동)이 선성김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무섬마을은 외나무다리 넘어 혼맥을 이어나갔다. 선성김씨 집안은 반남박씨, 풍산김씨, 풍산류씨, 개성고씨와 혼인이 잦았다. 입향조 김대 이후 6대 동안 풍산류씨와 11회에 걸쳐 통혼한 흔적이 보인다(조영득 연구논문 참조). 현 만죽재 종부는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백인재고택에서 스물셋에, 김위진가옥 장두진 할머니는 영주 평은면 금강마을 장씨고택에서 스물에 꽃가마 타고 시집 왔다.

영양 주실마을 출신 조지훈 시인은 1939년 무섬마을 독립운동가 김성규(1904-1946)의 딸, 김위남(필명 김난희)과 결혼하였다. 조지훈은 이별이라 하면 영영 만나지 못할까봐 차마 이별(離別)이라 하지 못하고 별리(別離)라 했는지, 아내를 무섬에 남기고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시 <별리>에 담았다. 해우당 옆 무섬식당 자리가 조지훈의 처가, 김성규가옥 터로 신혼 초에 자주 이 집에 머물렀다 한다.

아도서숙(亞島書塾)
  
아도서숙  아도서숙은 ‘아세아 조선반도 내 수도리 글방’이라는 뜻이다. 1928년 세워졌고 1933년 폐숙되었다가 2014년 복원되었다.
▲ 아도서숙  아도서숙은 ‘아세아 조선반도 내 수도리 글방’이라는 뜻이다. 1928년 세워졌고 1933년 폐숙되었다가 2014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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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적으로 외진 마을이라도 마을사람들 사상과 기운은 '섬마을'에 갇혀 있지 않았다. 마을청년들은 개화기에 서울과 중국,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화를 받아들이고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 영주지회, 영주 청년동맹을 이끌며 영주 사회운동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 시기에 김락풍의 증손자 김화진(1904-1946)은 일본에서 돌아와 1928년 10월, 마을에 아도서숙을 설립했다. 양반, 평민, 남녀노소 차별 없이 문맹퇴치와 농촌계몽활동,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운영위원은 김화진 외에 김성규, 김종진, 김계진, 김명진, 김우규, 김광진, 김희규 등 선성김씨 청년과 반남박씨 박찬하를 포함한 총 9명이었다. 오헌 박제연 집안의 박찬하는 선성김씨 사위여서 아도서숙은 실질적으로 선성김씨 집안이 주도한 셈이다.

아도서숙은 농민운동, 반제 비밀결사인 적색농민조합이 결성될 때 거점 역할을 하였다. 운영위원들은 여기에 적극 가담하며 활동을 하였다. 결국 1933년 7월, 운영위원들이 모조리 구속되고 아도서숙은 불태워져 폐숙되었다. 운영위원 중 김화진, 김성규, 김종진, 김계진, 김명진, 5명은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었다.
  
김계진 훈장증  무섬마을은 1995년부터 2008년에 걸쳐 다섯 명이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었다. 그 중 김계진은 2005년 노무현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반가워서 사진으로 남긴다.(무섬자료실에서 촬영)
▲ 김계진 훈장증  무섬마을은 1995년부터 2008년에 걸쳐 다섯 명이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었다. 그 중 김계진은 2005년 노무현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반가워서 사진으로 남긴다.(무섬자료실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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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 굴뚝

아도서숙은 우여곡절 끝에 2014년 복원되었다. 마을사람들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되었다 하나 아도서숙 굴뚝만은 내 마음에 걸렸다. 서당이나 서원 굴뚝은 대개 낮게 만들거나 기단에 가래굴만 낸 경우가 많은데 아도서숙 굴뚝은 지나치게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도서숙 굴뚝 대개 서당이나 서원, 정자 굴뚝은 작고 낮으며 거의 숨기다시피 만드나 남녀노소 구별하지 않고 공부한 서숙이라 그런지 아도서숙 굴뚝은 유난히 크게 만들어졌다.
▲ 아도서숙 굴뚝 대개 서당이나 서원, 정자 굴뚝은 작고 낮으며 거의 숨기다시피 만드나 남녀노소 구별하지 않고 공부한 서숙이라 그런지 아도서숙 굴뚝은 유난히 크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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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강학당 굴뚝 소수서원 강학당 굴뚝은 기단에 뚫린 구멍이 굴뚝역할을 한다. 건물의 숨구멍으로 착각하기 쉽다.
▲ 소수서원 강학당 굴뚝 소수서원 강학당 굴뚝은 기단에 뚫린 구멍이 굴뚝역할을 한다. 건물의 숨구멍으로 착각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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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 가까이 있는 순흥 소수서원의 굴뚝만 해도 아도서숙 굴뚝과 많이 다르다.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강학당 굴뚝은 기단에 구멍만 낸 기단굴뚝이고 유생들이 유숙하던 직방재와 일신재, 학구재와 지락재 굴뚝은 키가 아주 작아 납작 엎드려있는 모양이다. 불김은 최소화 하고 학구열은 높이라는 뜻이라.

무섬마을 굴뚝은 집집마다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 PVC 연통을 널빤지로 감싼 널굴뚝 아니면 암키와로 점선무늬를 낸 몸체에 오지를 얹어 만든 오지굴뚝이다. 집성마을로 집마다 생각이 거의 비슷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집과 굴뚝을 보수할 때 시(市)의 지원을 받아 일률적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해우당 널굴뚝 널빤지를 덧대 만든 널굴뚝이다. 실생활을 위해 PVC연통을 널빤지로 감싸고 연가에 흡출기를 달아 연기가 잘 빠지도록 했다.
▲ 해우당 널굴뚝 널빤지를 덧대 만든 널굴뚝이다. 실생활을 위해 PVC연통을 널빤지로 감싸고 연가에 흡출기를 달아 연기가 잘 빠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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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섬마을 오지굴뚝  해우정고택과 오헌고택 사랑채굴뚝, 김위진가옥 앞집 굴뚝 모두 비슷한 오지굴뚝이다. 무섬마을은 집성마을로 집마다 굴뚝을 만드는 생각이 비슷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집이나 굴뚝을 보수하면서 이렇게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 무섬마을 오지굴뚝  해우정고택과 오헌고택 사랑채굴뚝, 김위진가옥 앞집 굴뚝 모두 비슷한 오지굴뚝이다. 무섬마을은 집성마을로 집마다 굴뚝을 만드는 생각이 비슷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집이나 굴뚝을 보수하면서 이렇게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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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진 할머니의 말이 다시 들렸다. 외나무다리는 예전에 작고 직선으로 만들었지만 시가 주관하여 지금 다리처럼 된 것이라면서 한 말이다. 굴뚝도 이런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외나무다리는 예전에는 쪼매하고 똑바로 맹글었니더. 나무가 있어야 크게 만들지 않았겠능교? 시가 맹글면서 시방 맹키로 태극모양으로 휘돌게 맹긴기라."

덧붙이는 글 | 무섬마을 민족, 독립운동은 '영주무섬마을 선성김씨 문중의 민족운동(조영득 연구논문)'을 일부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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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