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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만 명, 한국 전쟁 이후 해외로 입양된 한국 입양인들의 숫자다. 최근 몇 년 사이 해외로 입양됐던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찾는다. 우연한 계기로 입양인의 가족 찾기를 도왔던 평범한 한국의 여성들은 마음을 모아, 미국의 여성 입양인들과 함께 입양인을 돕는 모임 '배냇'을 만들었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입양인들을 미국과 한국의 회원들에게 소개해 준다. 그들을 돕다 보면 본의 아니게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생생히 지켜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해외입양인들의 슬픔, 기쁨, 아픔, 그리고 부끄러운 역사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 기자 말
 
지난 4월 엄마와 고국을 방문한 새라
▲ 엄마와 딸 지난 4월 엄마와 고국을 방문한 새라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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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벚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리던 4월 12일, 노르웨이발 비행기 한 대가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새라(Sarah)가 터미널을 빠져나와 게이트를 통해 첫발을 내디뎠다. '코레아! 내가 태어난 바로 그 나라.'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낯설기 그지없다. 머리카락부터 눈동자 색깔까지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그녀 곁을 지나쳐 간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모두 나와 똑같이 생겼어!" 

새라는 수 십 년 전 해외로 보내진 입양인이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졌다. 대구에 있는 보육원에서 잠시 지내다가 태어난 지 7개월이 되던 무렵인 1984년 어느 날, 노르웨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4년. 이번 고국 방문은 태어난 지 34년 만에 처음 이뤄졌다. 생모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한국에 왔다. 고국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심장이 심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누군가 다가와 다정하게 잡았다. 흔들리는 새라의 마음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는 바로 새라의 엄마였다. 그렇게 새라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를 찾으러 왔다.

두 엄마
 
34년 전, 씨그너는 오슬로국제공항에서 처음 새라를 만났다.
 34년 전, 씨그너는 오슬로국제공항에서 처음 새라를 만났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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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그너(Signe)는 새라의 양엄마다. 그녀에게 공항은 매우 특별한 곳이다. 34년 전 그녀는 오슬로국제공항에서 처음 새라를 만났다. 

"그날을 잊을 수 없죠. 우리 부부는 새라를 만나기 위해 몇 시간을 달려 공항으로 갔어요. 저 멀리서 갓난아이가 점점 다가오는데... 입양을 하기로 했음에도 생김새가 다른 아이가 앞에 나타나니 사실 당황스럽고 정신이 없어지더라고요. 하지만 5분도 안 돼 내 심장이 그 아이를 자석처럼 끌어안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 새라를 말이에요." 

옹알이를 하던 작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소녀가 되고 숙녀로 자랐다. 이제는 어엿한 세 딸의 엄마로 성장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녀의 곁에는 늘 엄마 씨그너가 있었다. 생모를 찾고 싶다고 엄마에게 처음 털어놓은 것은 불과 3년 전이다. 

"자라면서 특별히 생모 얘기를 꺼낸 적이 없던 아이였죠. 그런데 지난해 한국에 생모를 찾으러 가고 싶다는 거예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새라의 마음에 그런 생각들이 서서히 들어왔던 것 같아요."
 
새라는 자라면서 '정체성 혼란'이라는 깊은 늪에 빠졌다. 그 방황은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치유됐다.
 새라는 자라면서 "정체성 혼란"이라는 깊은 늪에 빠졌다. 그 방황은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치유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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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입양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새라는 '정체성 혼란'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 버렸다. 

"입양인들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우리는 '뿌리가 없이 서 있는 나무' 같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 방황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였다.

"아이를 낳게 되면서 생각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비록 저는 뿌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야 하지만 내가 이제 누군가의, 내 딸의 뿌리가 되었다는 생각. 그 생각이 저의 방황을 잠재워 준 것 같아요." 

지난 3월에 그녀는 첫 고국 방문 계획을 세웠다. 입양인들의 한국 방문을 곁에서 지켜볼 기회가 종종 있다. 그런데 그들의 여정을 지켜보다 보면 이 여행이 보통의 여행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해외 입양인들은 대체로 모국방문 시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 그것은 그 여행이 절대 혼자 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감정의 파도는 생모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 폭풍우가 되어 그들을 수도 없이 넘어트리고 주저앉힌다.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무게의 여정이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무게는 쇳덩어리보다 무겁고 아프다. 

이 힘든 여정에 함께 할 동반자로 새라는 엄마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엄마'를 찾으러 '엄마'의 손을 잡고 고국을 방문한다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만, 새라의 엄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두렵기도 했어요. 아이가 한국을 방문해서 생모를 찾겠다고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흔쾌히 동행해주기로 했죠. 새라가 생모를 찾게 되든 아니든 저는 모두 괜찮아요. 난 그저 새라의 엄마로 내 아이 곁을 지켜주고 싶었거든요." 

벚꽃 비가 온 세상에 흩뿌리며 내리던 4월 13일, 엄마는 딸과 함께 그녀의 또 다른 엄마를 찾아 고향인 대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오기 전 새라는 사실 대구지방경찰청으로부터 생모를 찾았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모는 새라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새라는 대구를 찾았다. 

대구에 머문 닷새 동안 새라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를 찾으러 대구 시내를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시장이며 공원이며 안 다녀 본 곳이 없다. '저 사람이 내 엄마일까?' 스쳐 지나가는 나이 든 아주머니들을 바라보면서 새라는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새라는 잠시 머물렀던 보육원도 들렸다. 보육원은 새라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서류에는 새라의 작명한 한국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그녀의 아기 시절 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 새라의 모습이 이상하다.

34년 전

34년 전 오슬로국제공항. 새라를 처음 건네받은 씨그너는 깜짝 놀랐다.

"She was wrong! (무언가 잘못됐어)"

새라의 얼굴 한쪽이 찌그러져 있었다. 입양기관에서는 사전에 이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으나 아이의 머리와 얼굴은 납작하게 눌린 상태였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본래 새라는 미혼모가 아닌 정상적인 부모 아래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가 둘이나 있었다고 한다. 안면 이상인 아이를 낳은 엄마만큼이나 안면 이상인 아이를 입양아로 건네받은 엄마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아이를 처음 대면하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건네받는 순간 다리가 풀릴 만큼 당황스러웠어요.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어요. 그냥 주저할 것도 없이 새라를 내 품 안에 감싸 안았습니다. 본능적으로 말이죠. 새라를 데려온 지 일 년이 지났지만 아이의 상태는 큰 차도가 없었어요. 얼굴도 그렇지만 손가락을 잘 가누지 못했어요.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뇌했답니다. 그러나 현재의 새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정상적인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전 세계 한국계 해외입양인 20여만 명에게는 그 숫자만큼의 양엄마가 존재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입양인들의 굴곡진 운명만큼이나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혀 다른 인종의 아이, 아이가 겪어야만 했을 인종차별, 그리고 그것을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부모들. 사춘기에 들어서면 폭풍 같은 정체성 혼돈의 시기가 시작된다. 우울증부터 자살 충동까지. 그들이 겪는 혼돈의 정도는 상상 그 이상이다. 하지만 그것을 또 곁에서 묵묵히 바라봐야 하는 것도 양부모들의 몫이다. 자식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은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아들을 잃고 슬픔이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던 그때, 새라는 이 부부의 모질고 고통스런 인생 속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아들을 잃고 슬픔이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던 그때, 새라는 이 부부의 모질고 고통스런 인생 속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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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였던 씨그너는 수십 년 전 아프리카 고대 유물 발굴 현장에서 지질학자인 남편을 만났다. 둘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노르웨이로 돌아와 두 남매를 낳았다. 다섯 살 된 딸 아이와 세 살 된 아들 하나. 더없이 행복한 가정이었다. 

남편이 아이를 입양하자고 얘기를 처음 건넨 것은 새라를 만나기 일 년 전이다. 이 행복한 가정에 예상치도 못한 불행이 닥친 것도 그즈음이다. 한밤중 운전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해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었다. 아이를 잃고 두 부부는 지독한 상실감으로 끔찍할 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사고 후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들은 큰딸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들만큼 힘든 시기를 견뎌내고 있는 큰딸. 부부는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동생을 낳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수차례의 유산. 그러던 중 결정하게 된 것이 바로 입양이었다. 

슬픔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던 그 힘든 시절. 새라는 이 부부의 모질고 고통스러운 인생 속에 운명처럼 다가왔다. 씨그너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힘들었지만 새라 아빠는 새라를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부녀 관계가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거예요. 남편은 당시 자신의 운전 부주의로 아들을 잃었다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이 예쁜 새라를, 어쩌면 대구 길가 한복판에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새라를 정성껏 키우면서 스스로 상처를 치유했던 것 같아요.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지 십 년이 다 되어갑니다. 저는 남편을 너무 사랑했어요. 남편의 빈자리가 지금도 많이 힘듭니다. 

수차례의 병원 신세, 십 대 때의 극심한 정체성 혼란 등 힘든 날도 셀 수 없이 많았죠. 하지만 제가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모두 새라 덕분입니다. 새라가 우리에게 고마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라에게 더 고마워해야지요." 


지난 4월 23일 인천국제공항, 한국에서 열 한밤을 보낸 새라는 생모를 만나지 못한 채 노르웨이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해외입양인 중에는 새라처럼 생모의 거취는 확인했으나 만남을 거부해 상봉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부모의 거부는 입양인들을 아프게 한다

지난해 늦가을 생모를 만났던 케일린은 생모의 행방을 확인한 지 16년 만에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아이 얼굴을 봐야겠다'고 엄마의 마음이 변하는 데 걸린 세월이 16년이었다. 케일린의 생모는 그날 아이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며 "그리울 거야"라는 말 대신에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자식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죽했으면 천륜을 끊으려 했을까. 

입양인들의 생각은 이렇다. 

"생모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만남을 거절할 때 저희는 처음 버려졌을 때만큼 또 한 번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거부당했다'는 마음의 상처는 생각보다 지독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평생 정체성 혼란이란 독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입양인들의 운명입니다. 부모의 '거부'는 우리를 너무 아프게 합니다." 

케일린은 생모를 만나고 난 뒤 몇 달 후 내게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생모와 입양아 간에는 삶에 대해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의 생모는 '그것'을 지우고 부정하고 묻어버림으로써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입양인들은 그 반대예요. 우리는 잃어버린 '그것'을 찾음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죠. 양쪽 모두 간절히 이 생을 살아내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 길을 가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이 너무도 달라 문제인 것이지요." 

떠나기 전 새라도 이렇게 말했다. 

"단 한 번 노력으로 생모가 만나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분 마음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줄 거예요. 저는 그분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아요.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로 생각해요. 저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다음에는 저를 꼭 만나주세요." 

부디 그녀의 이 간절한 마음을 엄마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관련 기사]
지하창고에서 발견한 기록... 쥴리의 엄마를 찾아서 ☞ http://omn.kr/1cofz
사라진 아이... 38년 전 사건의 재구성 ☞ http://omn.kr/1hogc

태그:#입양, #해외 입양,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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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70~80년대 해외로 입양된 친구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 알게 된 친구가 생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면서다. 그녀를 돕는 과정에서 나는 입양인의 아픔에 공감하게 됐다. 현재까지 수 많은 입양인들과 인연이 되어 돕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세상 어느 드라마보다 감동적이다.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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