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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의에서는 '2019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연속기고를 시작합니다. 대전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추억담을 독자들과 나누고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대전광역시 동구 추동.

여기서부터 가래울이다. 가래울은 백제시대 우술군에 속해 있었다. 동쪽에는 식장산이 북쪽에는 계족산, 응봉산이 남쪽에는 보문산 등이 솟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멀리 계룡산이 바라다 보이며, 가까이 우산봉이 솟아 있어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우술 지역으로 들어오는 금강은 골짜기 감아 돌아 금산 제원을 영동 심천을 내탑을 어부동을 거쳐 방아실에서 숨 고른 후 부강에 이르는데 이는 우람한 산세가 만들어낸 계곡 따라 퍼런 물줄기를 이루어 내던 곳이다.

나는 가래울에서 나고 자라고 궁구하고 돌기와 집 큰아들 윤규한테 담배 배우고, 재호 형 춘하 형 대규 형한테 술 배우고, 목화밭 길 걸으며 여자를 배웠다. 1980년 대청댐 완공으로 내 질풍노도도 송두리째 물속에 잠겨 사라지고 말았지만 달 밝은 밤이면 마당까지 들어와 찰랑대는 물결 소리에서 선술집 상다리 두드리며 부르던 육자배기 듣고, 장터 옹기 쟁이 집 마당에 펼쳐 놓은 소리판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던 중고제를 듣고, 비포장 도로 덜컹! 먼지바람 날리며 미어터지던 버스 안내양 오라이 소리 듣는다.

가래울 주변 마을에는 호서사림의 학자 많아 김홍정 작가의 유장한 대하소설 <금강>(전 10권. 솔출판사)의 정신적 지주 충암 김정 선생 유적지가 호수 건너 요골(신하동)에 있고, 삼국시대 성신앙 유적지로 추정되는 신선바위가 줄뫼(비룡동)에 있고, 한국전쟁 당시 실향민 집단 거주지인 천개동이 있으며, 효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송준길 별당인 동춘당이 계족산 너머에 있다.
 
"가래울 들어가는 길은 꼬불꼬불하니 길치고개 하나뿐이라서 오늘 밤에는 옛날처럼 눈이 내린다 소나무 가지가 쩍하고 갈라져 나는 고개 넘지 못하고 오골계 집 쪽방 하나 얻어 뒤척이는데 문틈 파고드는 동지 바람이 하필 신혼이라서 문풍지 우는 소리 어찌나 교태 스러운지 지랄 난 몸뚱어리 달래느라 두러 누워 성냥골로 귀 후비다 벌떡 일어나 머리 감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 베름빡에 버스 시간표 눌러 놓은 압핀 빼네 허벅지 찌르며 뒤척이다 각고 끝에 생각해 낸 것이 겨드랑이 터럭이나 하나 씩 뽑아 보자는 것인데 뽑을 때마다 어금니가 다 아픔서 띄끔띄끔하니 문풍지 우는 소리 잠잠해지고 나는 이제 길치고개 넘어 가고 오두막집은 가까워 오고 꿈결에서나 가까워 오고" - '길치고개' 육근상 시집 <우술 필담>(2018.솔)에서
 
 
시가 써지지 않는 날이면
 
 대전 계족산.
 대전 계족산.
ⓒ 한국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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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가 써지지 않는 날이면 길치고개 넘어 천개동에 이른다. 천개동은 계족산 중턱에 있어 면 소재지가 송두리째 물에 잠겼어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옛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천개동 가는 길은 논두렁 밭 두렁길 지나 산중 샛길을 살얼음판 걷듯 들어가야 간신히 닿던 곳인데 천개동 사람들이 삽과 곡괭이로만 길을 내어 지금은 하루 네 번 시내버스 들어가는 오지 마을이다.

나는 천개동 알면서 실향의 아픔 알게 되었고 실향의 아픔은 수몰의 아픔을 위로하였다. 천개동 뒤란 흐르는 물결소리는 마치 빈 잔 채우는 소리와 같아 멀리 출렁이는 대청호 윤슬만 바라보아도 만취하기 일쑤다. 마을 앞 논두렁 길 따라 조금 내려가면 삼국시대 신라와 영토 분쟁으로 싸움 잦아 골짜기에 핏물 마를 날 없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핏골 마을이 수수 모가지로 들판 바라다보며 새 떼를 쫒는다.

새 떼가 일필휘지 하늘 빈자리 채울 때쯤이면 나는 호반 길 따라 구절초랑 코스모스 데리고 부수골 들어간다. 서당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와 성치산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 마을인데 대청댐 수몰로 인하여 섬이 된 마을이 부수골이다.

이곳에는 수령 300년 넘는 느티나무 있는데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목신제가 열려 신성시하는 곳이다. 무엇인가 기도하지 않으면 큰 탈이 날 것만 같아 깊이 합장하고 다시 돌아 나와 은골(마산동)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는 젖소 목장 자리 남아 있어 젖소가 배를 채우던 엉겅퀴며 옥수숫대가 찾아오는 이 반기고 구유며 콘크리트 집터 남아 옛날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도 발 앞까지 수몰되기는 마찬가지지만 대청호 물결이 만들어낸 기묘한 형상의 모래톱 지대는 협곡 이루어 놓은 듯 이국적 풍경을 맘껏 뽐낸다.

멀리 바라보이는 검은 산이 고리산이다. 마치 고리를 연결해 놓은 듯 이어진 여섯 개 봉우리는 서대산 덕유산 속리산과 친구처럼 지낸다. 나는 잘 타일러 내려 앉힌 백로 등에 업혀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바위로 향한다. 신선바위 바로 아래 마을이 고용골인데 마을 입구에 고인돌의 가능성이 큰 선돌이 하나 누워 있다. 그 바위에는 큰 구멍이 세 개 뚫려 있는데 마을 노인 분께 여쭤 보면 한결같이 "누가 사람을 만들랴고 했는게비여" 말씀이시다.

옆으로 상곡사(象谷祠) 표지석 따라 오르면 16세기 사화시대 유학자로 이황, 이준경 등 조선시대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대사간, 도승지 등 육조판서를 지냈으나 을사사화에 가담했다 하여 사람의 지탄을 받기도 한 추파 송기수(1507-1581) 묘역이다. 뒤에 잘 가꾸어진 은진 송씨 묘역으로 오르면 네 개의 구멍으로 절묘하게 표현된 바위가 있다. 앞의 것은 남근 모양이고 뒤에 것은 두꺼비 형상인 듯 여근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마을 입구 세 개의 바위구멍이 두건을 뒤집어 쓴 얼굴 같다는 어르신 말씀에서 성혈(性穴)이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내가 수컷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거기서 쉬엄쉬엄 정오품송까지 가면 신선바위가 눈앞이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남근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근처럼 보이기도 하고,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자세히 보면 거북이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커다란 바위는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나는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가 살다가 다시 올라 갔다는 선암(仙岩)에서 호수 바라보다 물오리 한 쌍 불러 물을 건넌다.

노을 질 무렵이면 호반은 억울한 듯 붉게 탄다. 억울한 마음은 누구에게 쉽게 털어 놓을 수 없는 경우 많아 갈대도 흔들리며 저리 붉게 타는 것인가. 나는 이제 오래된 문인석 같지만 자꾸 돌장승이라 우기는 묘골 마을로 들어선다. 골목 들어서면 많은 꽃들로 둘러싸인 언덕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중종 때 형조판서와 예문관제학을 지낸 충암 김정(1486-1521)선생 묘소와 사당이다. 선생은 조광조와 더불어 자치주의 실현을 위해 미신의 타파와 향악을 널리 알리는 업적을 남겼고,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어 금산에 장배 된 후 제주도에서 사약을 받았다.

나는 데리고 간 구절초랑 코스모스 옆에서 언덕배기 소나무 숲 충암 선생 사당과 함께 서있는 충암김정선생부인정려문에 관한 내용에 침을 튀긴다.

"충암 선생 부인은 은진 송씨 쌍청당 송유의 현손녀로 진사 여익의 딸이여. 김정 선생이 1521년 제주에서 사사되자 자결 헐랴구 했는디 늙은 시부모가 하두 가련허여 깨깟이 접구 효도를 다헌 후 시부모가 세상을 뜨자 식음을 전폐허고 여드레만에 운명허였다는능그믄 그랴. 그래서 효성에 감복허여 순조 3년(1803년)에 정려가 되었다능그문? 참눼."

그러자 곁에 있던 어린 구절초가 "아빠, 근디 정려가 뭐랴?"허고 물으니 코스모스가 자신 있다는 듯 말한다. "있잖여. 그니덜. 시커먼 옷 입고 머리에 수녀처럼 두건 쓰고 다니는 이덜" 오랜 세월 풍화 속에서 글씨마저 사라지고 없는 비석 바라보며 이제 나는 생각한다. 아 무엇을 쓸 것인가.

덧붙이는 글 | 1991년 <삶의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술 필담> 등이 있으며 2016년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지원금을 수혜했고 2017년 시집 <만개>가 세종문학나눔 우수도서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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