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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2일, 대구(丘)를 연구(究)하는 독서 단(團)체 '구구단(丘究團)'이 결성되었다. 구구단 회원들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1283-1 용학도서관(관장 김상진)에서 창립 총회를 열고 이원호 (주)에이에스티 네트웍스 대표를 초대 단장으로 선출했다. 구구단은 향후 월 1회 정기 독서토론회 및 현장답사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대구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할 계획이다.

한자 사용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구를 연구하는 단체의 이름이 어째서 구(邱)구단이 아니고 구(丘)구단인가?'라는 의문을 품을 것이다. 대구의 한자 표기는 대구(大丘)가 아니라 대구(大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한결같이 대구(大邱)로 기록하는 것과 달리 대구의 본래 한자이름은 대구(大丘)였다.
 
'대구를 연구하는 독서 단체'를 표방하는 '구구단'(대표 이원호)이 2019년 3월 22일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용학도서관에서 창립 모임을 가졌다.
 "대구를 연구하는 독서 단체"를 표방하는 "구구단"(대표 이원호)이 2019년 3월 22일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용학도서관에서 창립 모임을 가졌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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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우리말 이름은 '달벌' 또는 '달구벌'이었다. <삼국사기>는 신라 첨해이사금이 재위 15년(서기 261년) '봄 2월에 달벌성(達伐城)을 쌓아 내마(奈麻) 극종(克宗)을 그 성주로 삼았다'라고 증언한다. <삼국사기>는 또 그로부터 428년 지난 689년에 신문왕이 재위 9년을 맞아 '서울을 달구벌(達句伐)에 옮기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라고도 말한다.

대구의 우리말 옛이름은 '달벌, 달구벌'

대구(大丘)라는 이름은 사람이름과 땅이름을 대대적으로 중국화한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처음 생겼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잡지' 중 '지리'에 '대구현(大丘縣)은 본디 달구화현(達句火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그대로 쓰고 있다.'라고 했다.

'火'는 '불 화'이므로 달구'화'는 달구'불'이고, 달구불은 곧 달구벌이다. <살고 싶은 그곳, 흥미로운 대구여행>의 저자 전영권은 산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고어 '닥' 또는 '닭'이 연음이 되면서 '달구'로 표기되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달(구)벌'은 산으로 둘러싸인 벌판, 즉 분지의 우리말 표기이다.
대구 경북 일원에 아직도 남아 있는 신라 때 지명

수성, 하빈, 화원, 해안, 자인, 임고, 신녕, 안강, 기계, 군위, 효령, 어모, 지례, 단밀, 진보, 상주, 다인, 예천이라는 이름이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그 중에서 화원은 '본디 설화였는데 경덕왕이 화원으로 고쳤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설화'는 오늘날 '화원읍 설화동'으로 남아 있다.
 


'달'은 산인가, 닭인가?

다만 '닥' 또는 '닭'이 '달구'가 된 것은 우리말 발음의 변화과정이므로 '달(구)벌'이 한자음 '대구'로 바뀐 현상까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달구를 신라어로 크다(大)의 의미로 해석할 근거는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대구경북역사연구회의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은 대구사람들이 '닭'을 '달' 또는 '달구'로 발음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달구의 원형은 닭'이라고 풀이한다. 달구벌은 닭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살았던 벌판이라는 해석이다.

대구경북역사연구회의 해석은 <삼국사기> 미추이사금조의 '알지출어계림(閼智出於鷄林)'이라는 대목을 원용한 결과이다. 대구경북역사연구회는 신라 왕조의 김씨들이 조상 알지(閼智)의 출(出)생지인 반월성 아래 숲을 '계림(鷄林)'이라 부른 까닭은 닭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이는 곧 그들이 대구사람들과 같은 종교를 신봉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신문왕은 통일에 기여한 점을 내세우면서 권력의 지분을 더 많이 차지하려드는 귀족들을 억누르고 그 대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앙이 같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대구로 천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신문왕은 귀족들의 권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구 천도를 계획했으나 결국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 신문왕릉 신문왕은 귀족들의 권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구 천도를 계획했으나 결국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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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의 문화적 사대주의 정책 이후 달(구)벌은 줄곧 대구(大丘)로 불렸다. 경덕왕이 우리말 지명 '달(구)벌'을 한자 지명 '大丘'로 바꾼 데에는 어떤 논리가 들어 있을까? 경덕왕은 '달구벌'을 '대구'로 한자화하면서 끝자 '벌'은 없앴고, '달(達)'은 '대(大)'로 바꾸었고, '구(句)'는 '구(丘)'로 한자는 바꿨지만 소리는 그대로 남겨두었다. 

달구의 '구(句)'가 대구의 '구(丘)'로 소리는 변함없이 '구' 그대로 있고 한자 글자만 바뀐 것은 구(丘)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句)'를 본래대로 그냥 두었을 터이다. 이는, 한자의 뜻글자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여 '대구(大丘)'를 '긴(大) 구(丘)릉'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말해준다. 긴 구릉으로 둘러싸인 땅은 곧 분지이다. 결과적으로, 흔히 거론되는 "대구는 분지"라는 통용어와도 내용상 닿는다.

달벌은 '달 같은 벌판'이 아닐까?

그런 추론에 바탕을 두면, 첨해이사금 때의 달벌을 '달'같이 둥근 '벌'판으로, 신문왕 때의 달구벌을 '달'처럼 둥글고 긴 '구'릉에 둘러싸인 '벌'판으로 읽는 문학적 상상도 가능하다. 
     
앞산에서 바라본 대구. 가운데로 신천이 흐르고 있다. 멀리 바라보이는 팔공산 일원과 앞산(비슬산 자락) 사이에 대구가 자리를 잡고있는 이 사진만으로도 대구가 분지라는 사실은 대략 가늠이 된다.
 앞산에서 바라본 대구. 가운데로 신천이 흐르고 있다. 멀리 바라보이는 팔공산 일원과 앞산(비슬산 자락) 사이에 대구가 자리를 잡고있는 이 사진만으로도 대구가 분지라는 사실은 대략 가늠이 된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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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에도 대구는 대구(大丘)였다. 당시 대구 지역 연합 의병군인 공산의진(公山義陣)의 초대 의병대장 서사원(徐思遠)이 남긴 일기의 1592년 10월 20일자 내용 중 일부를 읽어본다.
 
'바람이 불었다. 처자식을 고향 마을로 다시 옮겼다. 고개를 넘어 채정응(蔡靜應)을 만나 확부점에서 밥을 펼쳐 먹고 허기를 달랬다. 길을 가다가 승군(僧軍)을 만났는데 대구부(大丘府)의 왜적과 교봉하다가 패배하여 물러난다는 군병(軍兵)의 나쁜 소식을 들었다.'

서사원은 대구를 대구(大丘)로 표기하고 있다. 서사원은 이틀 전인 10월 18일자 일기에도 '승장(僧將) 김극유(金克裕)가 나의 말을 빌려 타고 대구(大丘)로 전투하러 갔다.'라고 쓰는 등 줄곧 대구를 대구(大丘)라 했다. 영조 시대 이전까지 대구(大邱)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구(大邱)라는 이름은 영조 때 출현
 
대구향교 대성전 앞에는 중국 청도시가 기증한 공자상이 서 있다.
 대구향교 대성전 앞에는 중국 청도시가 기증한 공자상이 서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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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바꾸어야 한다는 논란은 <조선왕조실록> 영조 26년(1750) 12월 2일자에 처음 등장한다. 대구의 선비 이양채(李亮采)가 임금에게 '공대부의 이름(孔丘)자인 구(丘)를 써서 대구(大丘)라 하는 까닭에 대구의 인심이 불안하다'는 취지의 상소문을 올린다.

영조는 '대구의 유생들이 고을 이름의 일을 상소로 진달했다고 한다. 아! 근래에 유생들이 신기한 것을 일삼음이 한결같이 어찌 이와 같은가? 3백여 년 동안 본부의 많은 선비들이 하나의 이양채 등만 못해서 말없이 지내왔겠는가? 한낱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상구(商丘)와 옹구(顒丘)란 이름이 아직도 있는데, 옛날 선현들이 어찌 이를 깨닫지 못했겠는가?'라고 힐난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대구(大邱)가 처음 등장하는 때는 정조 2년(1778)년 5월 5일이다. 그 이후 대구(大丘)는 점점 대구(大邱)로 바뀌어갔고, 박진관의 <대구 지오그라피>에 따르면 철종 때부터는 대구(大邱)만 썼다.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추로지향(鄒魯之鄕), 즉 공자의 고향을 자처하는 대구 사람들은 공자의 이름자를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대구(大邱)를 대구(大丘)로 되돌리자

달같이 둥근 벌판이라는 뜻의 '달벌'은 달같이 둥글고 긴 구릉에 에워싸인 벌판이라는 의미의 '달구벌'이 되었다가, 사람이름과 땅이름을 중국식으로 개명해야 한다는 문화적 사대주의에 따라 '大丘'로 바뀌었고, 다시 공자의 이름자를 지명에 써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사대주의에 의해 '大邱'로 재개명되었다.

즉, 구구단이 '구구단(邱究團)' 아닌 '구구단(丘究團)'을 단체 이름으로 채택한 데에는 대구의 이름을 '달(구)벌'까지 되돌리지는 못할지라도 '大丘' 정도로는 복귀시켜야 한다는 정신이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대구의 행정적 변화

신라 때의 대구 지역은 위화군과 달구화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경덕왕 16년(757) 위화현이 수성군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기의 대구 지역은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대구현은 수성군, 해안현은 장산군에 속해 있었다.
조선 세종 1년(1419) 대구현이 대구군으로 승격되었다.
세조 12년(1466)에 도호부가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높아졌다.
선조 34년(1601)에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그 이후 대구는 경상도 전체의 중심으로 도약했고, 해안현, 하양현, 경산현, 수성현, 화원현, 하빈현을 거느린 큰 도시가 되었다.
고종 32년(1895) 지방제도가 8도에서 23부로 개편될 때 대구관찰부가 설치되었고 예하 23개 군을 관할했다.
고종 33년(1896)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대구부는 대구군으로 개칭되었다. 여전히 부청 소재지였다.
고종 43년(광무 10, 1906) 통감부 산하의 대구이사청이 설치되었다.
1910년 이사청이 폐지되면서 대구군은 다시 대구부로 바뀌었다.
1948년 대구시가 되었다.
1981년 대구직할시가 되었다.
1995년 대구광역시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대구를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한편, 구구단의 토론자료로 사용하기 위한 '대구 완전 학습'은 앞으로 계속 집필됩니다. 이 기사는 서사원 저(박영호 역) <국역 낙재선생일기>, 전영권 저 <살고 싶은 그곳, 흥미로운 대구여행>, 박진관의 <대구 지오그라피>를 참조하였습니다.


태그:#구구단, #비슬산, #대구, #박진관, #전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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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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