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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질문과 나만의 모범답안

2000년대 초반 우리 병역거부자들이 주로 받은 질문은 이런 거였다.
 
"만약 강도가 당신 집에 침입해 여동생을 강간하려고 하고 있고, 당신 옆에는 총이 있다. 그 상황에서도 강도에게 총을 쏘지 않을 거냐?"

저열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질문을 인터넷 게시판에서만 보았다면 그나마 덜 서글펐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런 질문은 재판정에서 판검사의 입을 통해서도 나왔다. 물음표로 끝났을 뿐 실은 질문을 가장한 공격이었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모든 가능성을 통제하여 대답하는 사람에게는 딱 두 가지만의 답을 요구하며, 어떤 답을 택하든 함정에 빠지게끔 설계한 공격이 단지 물음표만 달고서 공정한 질문인 것처럼 능청을 떨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은 폭력행위라고 생각합니까?"

지난 4월에 열린 재판에서 검사가 병역거부자 오경택에게 이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 역시 앞선 강도 질문처럼 2000년대 초반 병역거부자들이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단 당시에는 강도 질문을 판검사가 했다면,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의 무장에 대한 질문은 주로 진보진영에 속한 이들이 병역거부자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물론 당시의 진보진영에서도 병역거부라든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을 때라서 이 질문 또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병역거부에 대한 약간의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한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질문들은 굉장한 공격인 것 같지만 논리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금의 나라면 저런 질문을 받아도 차분하게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1번 질문: 강도가 침입한 상황은 일상적이지는 않죠. 그런데 여동생이 때마침 집에 있고, 그리고 그 강도가 물건 훔치기보다 동생을 강간하려는 상황은 더더욱 흔치 않을 겁니다. 게다가 세상에, 총기 소지가 허용되지 않은 나라인 한국에서 어떻게 제 옆에 총이 있을까요? 이건 질문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서 들이미는 것은 저열한 방식의 공격일 뿐입니다. 게다가 총을 빼앗겨 여동생도 저도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게 우리를 지켜줄 적절한 수단이라고 어떻게 확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질문은 개인의 양심의 진지함을 판단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질문입니다. 게다가 병역거부는 국가 안보에 대한 질문인데, 고작 강도 하나 잡는 것과 국가가 국민들의 평화를 지키는 일은 차원이 다른 일인 만큼 적절한 비유도 아닙니다.
 
2번 질문: 제가 당시 광주에 살았다면 저는 시민군으로 총을 들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지금 섣불리 대답할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 입영영장을 거부하는 데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살아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 쉽게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평화주의자로서 저는 알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위대했던 것은 총을 들고 저항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수부대의 폭력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총을 든 시민군들뿐만 아니라 많은 광주시민들이 공수부대에 저항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기꺼이 했습니다. 전쟁이 그러하듯 혁명 또한 총을 든 사람들만 역할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평화주의자로서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총을 들지 않고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이 많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시 총을 든 시민군들의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냐고요? 천만에요. 한강의 소설이 그에 대한 답을 품고 있습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소년이 온다> 117쪽) 시민군들 중 누군가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거나 허공에 당겼을 겁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계엄군인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모든 시민군이 이러진 않았겠죠. 총을 든 시민군들 가운데도 이런 식으로 병역거부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마 당신은, 그럼 계엄군에게 총을 겨눈 시민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묻겠죠. 당신은 제 입에서 제 양심을 부정하거나,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거나 둘 중 하나의 대답을 듣고 싶은 모양입니다만 죄송합니다. 당신이 시민군의 무장을 병역거부와 연관 지어서 제게 물어보시려면 지금 잘못된 질문을 하고 계신 겁니다.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정부의 폭력적인 공권력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 사회운동 세력은 일상적으로 군사훈련이나 그에 준하는 훈련을 받고 물리력을 동반하는 무기를 준비해두어야 합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니요,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주주의의 확장입니다. 폭력을 동반한 투쟁은 당장에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민주주의의 확장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게다가 폭력으로 싸우는 건 우리보다 저들이 훨씬 더 잘합니다. 우리의 방식으로는 효율적인 면에서도, 정치적인 면에서도 맞지 않습니다.

물론 병역거부 재판 때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면 나 또한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중언부언 했을 거다. 나는 소견서에도 쓴 것처럼 평화주의자여서 병역거부를 한 게 아니라, 병역거부자가 되고 나서 평화주의에 대해 공부했다. 오랜 세월 활동하며 공부한 덕에 병역거부에 대한 악의적인 질문들에도 어느 정도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병역거부자들은 여러 상황과 질문에 대해 자기만의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고, 이는 오랜 세월 활동과 경험과 사유가 축적된 결과물이다.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그럼에도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다. 주로 기자들이 묻는 질문이다.
 
"병역거부를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라크 파병 반대 병역거부를 했던 당시 이등병 강철민처럼 차라리 특별한 계기가 있는 병역거부자들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기자들이 바라는 것은 어린 시절 폭력에 대한 극한의 경험 혹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특수한 경험들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무난한 삶을 살아왔고, 병역거부자가 된 데에 특별한 일이라곤 없었다.

자연스러운 우연과 나를 둘러싼 필연들이 오랜 세월 동안 경합한 작용의 결과물이 병역거부였다. 나에겐 병역거부는 결과물이기보다는, 평화주의자로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병역거부를 결심한 것도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춘 결정이 아니라, 스스로 그 결정을 납득해가는 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그게 내 양심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전쟁과 군대,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부족하나마 나름의 논리적인 구성을 갖고 있다. 평화운동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최소한 가져야 할 수준의 교양 정도다. 교양, 지식, 정보, 논리 이런 것들은 조금만 연습하고 공부하면 누구나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의 형성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논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논리적이어야 하고, 언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철저하게 세상은 철저하게 언어로 설명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질문들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초창기 병역거부자들에 비해 최근의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양심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덜 받았다. 병역거부 운동이 만들어낸 변화 덕분에 법원은 실형 1년 6개월을 넘기지 않는 일명 정찰제 판결을 해왔고 그에 따라 판검사들도 병역거부자들도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규명하거나 증명하는 일에 관심을 덜 두었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자들이 늘어갈수록 병역거부자 개개인에 대한 사회의 관심도는 떨어졌는데 이 또한 최근의 병역거부자들이 자신의 양심을 사회에 드러내야 하는 상황을 피해가는 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그러니까 대체복무제가 도입되고 정부에서는 대체복무제를 악용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때가 가까워질수록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양심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더욱 거세게 받을 것이다. 판검사의 질문, 혹은 새롭게 구성될 대체복무 심사위원회의 질문은 준비만 잘한다면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더 어려운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이다. 우리의 양심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길어 올려야 한다.

병역거부자들이 받아왔고, 앞으로도 받게 될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는 측면이 또 하나 있다.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또 한 측면은 질문의 사회적인 측면이다. 우리에게 가해지는 질문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맞서면서도 우리 스스로 평화주의자의 윤리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해서는 안 되는지를 정할 필요는 없다.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정상과 비정상으로 세상을 나누는 건 군사주의의 방식이지 우리 평화주의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각각의 상황에서 정답을 알려주는 매뉴얼이 아니라, 다양한 맥락을 고려하고 다각도에서 경합하는 갈등의 한가운데서 평화주의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판단의 기준과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다.

근데 이게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늘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몇 가지의 선택지 중에 무엇을 고를 것인지, 대답을 요구받는다. 맥락을 구성하고 경합하고 갈등하는 과정이 평화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당장의 현실에 대한 대답을 대체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는 개개인의 몫일 수밖에 없게 되고, 개인에게는 무척 어렵고 고독하고 괴로운 과정일 수밖에 없다.

어쩌겠나, 폭력의 질서를 거부하는 삶을 사는 것은 그런 일인데. 그게 병역거부인데. 아무나 할 수 있는 병역거부지만, 누구든 병역거부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우리가 마주하고 만들어가야 할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withoutwar.org/?p=15283


태그:#강도가 쳐들어왔는데 당신 옆에 총이 있다면, #병역거부와 시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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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를 알게 되고, 평화주의자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출판노동자를 거쳐 다시 평화운동 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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