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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 <사계>를 처음 들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로 시작하는, 경쾌한 멜로디에 상반된 가사를 담고 있는 노래.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노래는 미싱사들이 계절 변화도 알지 못한 채 어둡고 좁은 공장에 들어앉아 죽어라 미싱을 밟다 쓰러져갔던 지난 세기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다음 세기를 살며 대학/대학원 교육까지 마친 나의 경우, 비록 물리적인 노동 환경은 과거에 비할 바 없이 좋아졌을지 몰라도 본질은 그때의 미싱사, 시다 언니들의 노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자료사진)
 아르바이트 (자료사진)
ⓒ 출처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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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시다바리, 쓰다 버리는 부품

대학 4년, 대학원 2년의 과정을 마칠 때까지 빵집, 학원 세 군데, 과외, 회사 임시직 연구원, 번역, 고시원 총무 일을 번갈아 하며 푼돈을 벌었다. 장학금 덕에 학교는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지만, 네 식구 주거비와 생활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선 뭐든 해야 했다. 졸업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석사 졸업 후에도 유학 준비에 필요한 어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공부할 시간을 남겨두어야 했기 때문에 학원 일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학원 강사는 근로자 취급을 받지 못한다. 법적 지위상 특수고용직에 속하는 학원강사는 사업소득세 3.3%를 뗀 급여를 받는데, 말이 좋아 '사업소득'이고 '특수'지 그게 바로 강사를 근로자로 보지 않는 근거라는 걸, 당시엔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명색이 대학졸업자이니 근로기준법 정도는 들어봤지만 그게 내게도 해당되는 일이라는 건 생각해보지 못했다. 4대 보험이며 주휴수당, 연차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학원에서도 종이로 된 계약서를 내민 적이 없었다. 그저 구두로, "다음 주부터 나오세요, 페이(월급이나 급여라는 말조차 쓰지 않는다)는 이 정도면 될까요?" 하고 월급의 액수만 조정하면 채용 결정이 되는 거였다. 이상하단 생각은 못 했다. 학원계는 원래 그런가 보다 했다.

실은 학원계뿐 아니라, 그간 몸담았던 저 많은 알바 자리 중에 계약서라는 걸 쓴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딱 한 번, 나름 번듯한 회사에서 연구용역으로 잠시 일했을 때도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필요할 때 가져다 쓰고 버리면 되는 부품, 누군가의 시다바리, 그게 나였다.

선생님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매일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라 보람이 크지만, 학원강사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낮 12시에 출근해 밤 9시, 10시가 넘어야 퇴근했고, 수업은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이어졌으며, 인근 학교 시험 기간엔 시험기간이라는 이유로, 격주 토요일은 이벤트나 특강을 이유로 추가 수당 없이 일했다. 원장은 가끔 '수고가 많으시다'며 선심 쓰듯 몇만 원 더 얹어주었을 뿐이다.

교통비, 식비 모두 알아서 해결하는 건 당연했고, 매일 목소리 높여 수업을 하니 목 상태는 나아지질 않는데 결근은 곧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므로 쉴 수도 없었다. 등록 원생 수가 늘어 수업 시수가 늘어도 월급은 같았고, 일을 그만둘 땐 후임자를 구해놓고 나가라는 말을 당연하게 들었다.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면 원장은 정성스레 만든 '각서'를 내밀었다. 학원 반경 몇 백 미터 이내에 학원을  차리거나 학원 아이들을 상대로 과외 수업 유치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에 사인을 한 뒤에야 학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아이들도 원장도 학부모도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불렀지만 나는 선생님이 아니었고, 매일 9시간씩 일하면서도 4대보험은 커녕 계약서 한장 제대로 써본 일이 없었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초등학생 아이들은 나의 출신 대학을 묻고 따지며 "거긴 00대보다 별로인데 아니예요?" 했고, 매일 번듯한 정장을 입고 원장실에 앉아 상담하던 원장은 "선생님이 화장도 안 하고 옷도 잘 안 갖춰 입으니까 애들이나 학부모들이 선생님을 어리게 보고 얕잡아 본다"고 지적했다. 부모들은 매달 수십만원 학원비를 내는 소비자로서 그만한 결과물을 얻길 원했지만 학원 뺑뺑이에 지친 아이들의 눈은 흐려지기만 했고, 나는 밥벌이의 고단함에 지쳐갔다.  

학원강사 딸, 요양보호사 엄마

그로부터 약 8년. 결혼과 해외 체류, 육아로 인해 여전히 다른 경력 따위 쌓을 일 없었던 나는 아마 귀국하면 또 다시 그 길에 스스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만한 시간이 흘렀으니 사정이 조금 나아졌을까, 하고 구직 웹사이트를 둘러보지만, 한눈에 봐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전국적으로 이름이 있고 규모가 있는 학원이나 돼야 채용 공고에 4대 보험, 퇴직금 지급, 같은 말들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언론 기사를 찾아봐도 학원계에서는 여전히 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경우가 많고, 학원 강사의 노동자성 인정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대학, 대학원까지 마치고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숱한 임금노동을 했으면서도, 노동의 의미와 노동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모두가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엘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취직' 이후의 삶이라는 게 '노동자'로서의 삶이라는 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커서 사회에 나가면 '노동자'가 되는거라고 말해준 사람도 없었고, 노동자로서의 삶과 권리에 대해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노동권을 가르치고 배웠다면 위험천만한 작업장에서 목숨을 잃는 청년들이 지금쯤은 사라졌어야 할테니.
 
그런 엄마에게, 엄마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엄마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런 엄마에게, 엄마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엄마는 아무 말이 없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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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째 전국 각지의 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나의 엄마 역시 60 평생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닥치듯 해치워 온 사람이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 같은 건 배워본 적이 없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딸 때 혹시 노동권리 교육 같은 걸 받은 적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예상대로 그런 건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나보다 낫다. 고졸 학력의 엄마보다 몇 년이나 더 배웠다는 나도 막상 그런 일을 당하면 싸우기보단 포기하는 쪽을 택할지도 모르는데, 엄마는 매번 싸운다. 월급도, 퇴직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착취하는 요양시설과 싸우다 결국 자리를 옮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엄마는, "당연한 걸 요구하는 건데도 시설장과 동료 요양보호사들이 나를 유별난 사람 취급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그런 엄마에게, 엄마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지만 엄마는 아무 말이 없다. 엄마처럼 참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어야 시설에서도 움찔하고, 세상이 바뀌게 되는 거라고, 그동안 우리는 너무 몰랐고, 너무 참아와서 지금껏 이렇게 살고 있는 거라고. 엄마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고단한 엄마의 하루에 번지르르한 말만 보태는 꼴이 될 게 뻔해서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옛날 전태일은 함께 노동법을 읽어줄 대학생 친구가 그렇게 절실했다는데, 정작 대학을 나오고도 그의 친구가 되어주진 못했을 나는, 올해 노동절도 이렇게 보내고 만다. 

태그:#노동, #학원강사, #요양보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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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활동가로 살고 싶은 사람. 아이의 선천성 희소질환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T 증후군)'을 계기로 <아이는 누가 길러요>를 썼다. 한국PROS환자단체 대표, 부천시 공공병원설립 시민추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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