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전야> 포스터

<파업전야> 포스터 ⓒ 명필름 문화재단

 
영화 한 편을 만들고 보는 게 운동이고 투쟁이자, 집회와 시위였던 시절이 있었다. 되돌아보면 <파업전야>는 그렇게 봐야하는 영화의 시초였다. 영화 보는 게 무슨 큰 죄라도 되는 듯 군사독재정권은 검열을 거치지 않은 한 편의 영화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긴데 독재정권의 시대는 그게 통하던 시기였다.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찰 간의 대치와 충돌한 불가피했고, 격렬한 싸움이 오가기도 했다.
 
온갖 난관을 뚫고 영화 상영을 시작한다고 해도 편하게 마음 놓고 영화만 볼 수는 없다. 상영을 막기 위해 밀고 들어오던 전투경찰을 막아야 했고, 저지선이 뚫린 순간에는 다들 흩어져 피신해야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아니었다. 경찰이 빠져 나가면 관객들은 다시 모여 들었고, 그렇게 다시 영화를 보려고 하면 경찰이 공세를 취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영화 상영과 중단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막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했던 당시 행태는 독재정권의 폭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음습한 암흑의 시절, 헌법을 유린하고 고문을 자행하며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던 독재세력들은 그렇게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파업전야>를 보려고 애썼던 사람들 중엔 3~4번을 봤지만, 끝까지 제대로 다 못 봤다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영화 상영을 지키기 위해 사수대로 나섰다가 지금은 꽤 알려진 영화인으로 활동하는 분도 있다.

도망갈 준비를 하며 봐야했던 영화, <파업전야>
 
 1990년 당시 <파업전야> 자료집

1990년 당시 <파업전야> 자료집 ⓒ 성하훈

 
1990년의 어느 날 나 또한 그런 난관을 뚫고 서울 시내 한 대학에서 <파업전야>를 봤다. 애초에 안락한 좌석은 기대할 수 없는 실내 공간에서 수백 명이 쪼그리고 앉아 영화를 봤다. 건물 안에 걸린 흰 천이 스크린을 대신했고, 뒤편에서는 책상 위에 올려 놓은 16mm 영사기가 돌아갔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침탈에 대비해 긴장을 풀 수도 없었다. 언제나 도망갈 준비를 해야했다.
 
그렇게 집중하면서 본 영화의 장면 장면은 나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했다. 극장에서 보던 익숙한 한국영화가 아닌 노동 현실을 다룬 영화였지만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늘 보던 영화에선 느낄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과 이를 통제하고 막으려는 사측과 방해와 회유부터 그것을 뚫고 만들어낸 민주노조의 깃발까지. 구사대의 폭력 등이 어우러진 영화는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었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에 깊게 빠져든 나머지, 끝 부분에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연장을 치켜드는 순간,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치켜올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옛 추억이다. <파업전야>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 영화'가 됐다.
 
30년 전 기억 소환하는 눈물
 
그렇게 30년이 흘러 디지털로 복원된 영화를 마주했다. 식당이 나오는 첫 장면을 보자마자 30년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동성금속 단조반 사람들과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던 한수의 꿈, 잔업거부를 통해 알게 된 단결의 힘과 위장취업자 완익, 노조 창립과 이어지는 테러 등등. 이미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영화는 전혀 식상하지 않았다.

30년 전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분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이 신기했다. <파업전야>가 영화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주제곡이었던 '철의 노동자'가 울려퍼지는 순간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상영이 끝난 후 극장에 불이 들어온 순간 30년 전 영화 속 젊은 여성 노동자였던 미자 역 최경희 배우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백기완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감동과 여운이 진하게 남는 영화에 다들 옛 기억이 떠오르는 듯 뜨거운 눈물을 기분 좋게 흘리고 있었다. 힘들게 상영을 하면서 경찰의 침탈을 막아내던 순간 등이 다들 영화 장면이 겹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파업전야> 시사회에 참여한 감독과 배우들. 가운데가 미자역 최경희 배우

<파업전야> 시사회에 참여한 감독과 배우들. 가운데가 미자역 최경희 배우 ⓒ 명필름

  
<파업전야>는 당시 노동운동의 단일대오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는 시점에 상영이 시작돼 흥행 면에서도 성공한 영화였다. <장산곶매>가 제작한 장편영화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는 5월 광주와 노동현장, 전교조 문제를 다룬 영화였는데, 흥행은 <파업전야>가 가장 두드러졌다.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이 성장하던 시대적 상황과 잘 맞물렸기 때문이다.
 
5월 광주학살을 다룬 <오! 꿈의 나라>가 독재정권의 방해로 소극장에서의 상영마저 가로막혔던 것과 비교하면 전국의 대학가와 대기업 공장 등을 상영관으로 활용한 <파업전야>의 배급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파업전야>는 영화운동 진영의 역량이 응집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영화사적으로도의미가 크다. 적어도 영화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봐야할 작품이 됐고, 사회현실을 비판하는 한국영화의 흐름에서 <파업전야>가 갖는 가치는 적지 않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자 했던 청년 영화인들의 의지가 미학적인 면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30년 만에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는 <파업전야>는 독재정권의 반민주적 탄압을 뚫어낸 대표작이라는 점에서 40~50대 관객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영화다. 20~30대들에게는 1990년대 한국영화의 고민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파업전야>는 창작의 자유를 물리력으로 동원해 막으려했던 독재정권의 후예들이 반성하는 마음으로 봐야할 영화기도 하다. 블랙리스트 등으로 문화와 예술을 차별하고 탄압하던 자들에게, 1990년대 영화가 남겨주는 교훈이 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의 의미를 모르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줄 것이다.
파업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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