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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일제 강점기 3대 사립 전문학교 중 하나인 연희전문학교는 시인 윤동주가 4년을 보낸 모교다. 1915년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 원두우(언더우드 1세)가 기증한 230여 권의 책으로 출발한 연희전문 도서관은 1940년 당시 도서관과 문과, 상과, 이과 연구실을 합쳐 6만여 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1935년을 기준으로 연희전문(4만9천 권)은 보성전문(3만 권)이나 이화여전(1만6천 권)보다 많은 장서를 가진 곳으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제외하고는 장서가 가장 많은 학교였다. 

장서량은 많았으나 당시 연희전문은 보성전문처럼 독립된 도서관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1925년 6월 완공된 언더우드홀 3층을 도서관으로 썼다. 지금도 남아있는 언더우드관이 바로 연세대학교 도서관의 모태인 셈이다. 연희전문 도서관은 열람실, 서고, 사무실로 이뤄져 있었고 듀이십진분류법으로 책을 분류했다. 1940년 당시 도서관장은 이묘묵이었고 도서관원 1명과 도서역 2명이 직원으로 있었다. 장서량이 많아 그런지 직원 수도 당시 전문학교 중에 가장 많은 편에 속했다. 

윤동주 재학 시절 연희전문 도서관
 
연희전문 시절 도서관은 언더우드관 3층에 있었다. 연희전문은 도서관 뿐 아니라 문과, 이과, 상과 연구실에 자료를 분산 비치해서 학생들이 책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부분은 보성전문이나 이화여전과 다른, 연희전문 도서관만의 특징이다. 윤동주 재학 당시 연희전문 도서관은 일제 강점기 전문학교 중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대학본부로 쓰인다.
▲ 연희전문 도서관이 있던 언더우드관 연희전문 시절 도서관은 언더우드관 3층에 있었다. 연희전문은 도서관 뿐 아니라 문과, 이과, 상과 연구실에 자료를 분산 비치해서 학생들이 책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부분은 보성전문이나 이화여전과 다른, 연희전문 도서관만의 특징이다. 윤동주 재학 당시 연희전문 도서관은 일제 강점기 전문학교 중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대학본부로 쓰인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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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묘묵은 1926년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도서관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근대사 최초의 '도서관학 석사'가 아닐까 싶은데, 연희전문 교수직과 도서관장을 함께 맡은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1936년 1월 1일 <동아일보>가 '문화조선의 다각적 건축'이라는 학술 특집면을 냈을 때 이묘묵은 '종합도서관 문화계수기(文化計數機)'라는 글을 썼다.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도서관 전문가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뛰어난 영어 실력 때문에 이묘묵은 해방 후 특별비서관이라는 직함으로 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통역을 담당한다. 이 과정에서 이묘묵은 실권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친일 활동으로 이묘묵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다.

<우리말본>을 쓴 외솔 최현배도 교수직을 박탈당한 후 연희전문 도서관 촉탁으로 몸 담은 바 있다. 윤동주는 연전에서 외솔에게 조선어를 배웠다. 동주는 외솔이 쓴 <우리말본>을 그의 고향집 서가 가장 좋은 자리에 꽂아 두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 원두우(언더우드 1세)의 손자 원일한(Horace Grant Underwood Jr.)은 연희전문 도서관에 대해 이런 회고를 남겼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기 전해엔가는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대학 도서관을 수색, 불온문서란 이름으로 귀중도서 수백 권을 압수해갔다고 들었다. 압수 당한 도서 가운데는 한일합병에 관한 영문 사료도 포함돼 있었다."

원일한이 증언한 연희전문 도서관 수색과 압수가 있던 해는 1938년이다. 연희전문 38학번 윤동주도 도서관 탄압 소식을 알았을 것이다. 동주는 도서관 책조차 마음 놓고 읽기 어려운 환경에서 연전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연희전문 도서관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기록은 없지만 대단한 독서가였던만큼 도서관도 즐겨 이용하지 않았을까. 

송몽규와 윤동주의 독립운동을 밝힌 두 나라 사서
 
문익환 목사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는 자기보다 매사 한발 앞서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졌다'고 한다. 윤동주가 자신의 말처럼 대기만성형이라면 송몽규는 천재형이 아니었을까.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아름다운 두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는 2016년 2월 17일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 <동주>라는 이름으로 제작, 개봉된다. 영화 <동주>는 117만 명이 관람했다.
▲ 영화 <동주> 포스터 문익환 목사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는 자기보다 매사 한발 앞서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졌다"고 한다. 윤동주가 자신의 말처럼 대기만성형이라면 송몽규는 천재형이 아니었을까.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아름다운 두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는 2016년 2월 17일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 <동주>라는 이름으로 제작, 개봉된다. 영화 <동주>는 117만 명이 관람했다.
ⓒ ㈜루스 이 소니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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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첫 해 쓴 작품이면서 동주가 남긴 마지막 시가 '쉽게 씌어진 시'다. 영화 <동주>에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중 만나는 여학생 쿠미(최희서 분)가 나온다. 이준익 감독이 밝힌 것처럼 쿠미는 가상 인물이다. 도쿄 유학 시절 윤동주는 결혼 상대로 친구 여동생 박춘혜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이어지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윤동주는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긴다. 1875년 설립된 도시샤는 일본 사립대학 중 여덟 번째로 문을 연 곳으로 윤동주가 다니던 릿쿄대학보다 오래된 학교다. 도시샤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정지용 시인이 다닌 학교이기도 하다. 윤영춘의 회고에 따르면 교토 시절 윤동주는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새벽 2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북간도로 귀향하려 했던 윤동주는 7월 14일 일본 특수경찰인 특고(特高) 형사에게 체포된다. 절친이자 교토에서 함께 유학하던 송몽규와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윤동주의 체포와 투옥에 대해 그의 가족은 '독립운동' 혐의였음을 주장했으나 국내 문학계는 일제의 과잉 단속에 희생양이 된 걸로 받아들여 왔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실제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투옥됐음을 일본 정부 서류를 발굴해서 입증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도시샤대학 출신이자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서인 우지고 츠요시(宇治鄕毅)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부관장을 지내고 <근대 한국 도서관사의 연구>(近代韓国図書館史の研究, 1988)를 쓰기도 한 우지고 츠요시는 일본 정부의 극비문서 중 특별고등경찰의 <특고월보>에 실린 송몽규와 윤동주의 '재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 책동 개요' 문서를 찾아냈고, 또 다른 극비문서인 <사상월보>에서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을 찾아 공개했다(<사상월보>에서 윤동주 판결문을 찾아 공개한 사람은 또다른 일본인 이부키 고다).  

우지고 츠요시가 일본 정부 비밀문서를 발굴해서 공개한 사연에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정병욱의 남동생이자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였던 정병완은 1970년 10월 15일부터 1주일 동안 윤동주 서거 25주년, 국립중앙도서관 개관 25주년 기념으로 '시인 윤동주 유고전'을 열었다.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던 우지고가 이 전시회를 자세히 살펴보고 정병완을 통해 윤동주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 없다는 사연을 들었다고 한다(관련기사 : "영화 <동주>가 빼먹은 특별한 '엔딩 크레디트'").

일본으로 돌아간 우지고는 기밀문서 해제 시점에 해당 문서를 발굴해서 한국에 전했고, 그의 노력으로 1977년 <문학사상> 12월호에 일본 특고경찰의 비밀기록이 공개됐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독립운동 기록의 발굴·공개는 한일 두 나라 도서관 사서의 기묘한 인연과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서 신분으로 자국의 어두운 과거사를 공개하는 데 앞장 선 우지고 츠요시의 행동은 지성인인 사서로서의 귀감이 아닐까. 일본인으로서 그가 겪었을 고심에도 불구하고 학자와 사서로서 그가 양심에 따라 한 행동 덕분에 우리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마지막, 그리고 최후의 진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지고는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계속 진행해서 <시인 윤동주로의 여행>(詩人尹東柱への旅)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44년 3월 31일 윤동주는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규슈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지 19개월, 8.15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1945년 3월 7일에는 절친이자 후쿠오카 감옥에 함께 투옥된 송몽규도 옥사한다.

윤동주 유해는 아버지에 의해 후쿠오카에서 화장돼 1945년 3월 6일 북간도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동주의 장례식 때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됐다. 장례 후 그의 유골은 용정 동산 중앙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집을 내지 못했지만 시인으로 살다 간 그의 무덤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기적처럼 전해진 윤동주의 육필원고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은 청운수도가압장의 기계실을,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은 2개의 콘크리트 물탱크를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제2전시실은 물탱크 천장을 제거해서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중정으로 꾸몄다. 제2전시실 벽체에 남아있는 네모난 구조물과 철심은 콘크리트 물탱크로 들어가는 입구와 철제 사다리 흔적을 남겨둔 것이다.
▲ 중정으로 꾸민 윤동주문학관 제2전시실 윤동주문학관 제1전시실은 청운수도가압장의 기계실을,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은 2개의 콘크리트 물탱크를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제2전시실은 물탱크 천장을 제거해서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중정으로 꾸몄다. 제2전시실 벽체에 남아있는 네모난 구조물과 철심은 콘크리트 물탱크로 들어가는 입구와 철제 사다리 흔적을 남겨둔 것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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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중 옥사한 윤동주와 이양하 교수가 가진 시집은 전해지지 않았고, 후배 정병욱이 챙긴 육필원고만이 무사히 전해져 1948년 정음사 판으로 출판됐다.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윤동주 육필원고 보관을 신신당부했다.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서 술도가를 한 정병욱 어머니가 마루 아래 항아리에 소중히 보관하면서 윤동주의 육필원고는 기적처럼 전해졌다.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통해 자세히 밝힌 것처럼 후배 정병욱뿐 아니라 친구 강처중의 공도 컸다. 강처중은 1946년 6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유품을 전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은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시를 소개했다.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쉽게 씌어진 시'가 정지용의 찬사와 함께 실린 건 강처중이 애쓴 덕분이다.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나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31편의 시가 실렸는데, 19편은 정병욱이 보관했던 수기 시집에, 12편은 강처중이 보관했던 유품에 있던 시다. 초간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강처중의 발문이 실려있다. 정병욱과 강처중,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를 전한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돼 학자의 길을 걸었다. 정병욱의 소개로 그의 여동생 정덕희는 윤동주 시인의 남동생 윤일주와 결혼, 두 집안은 인척이 된다. 강처중은 경향신문 조사반에서 일하다가 좌익 활동 혐의로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난 강처중은 1950년 9월 4일 월북했다. 월북한 이후 강처중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청운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문학관
 
11개동이 있던 청운아파트는 모두 철거돼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서울시는 이 자리에 청운공원을 조성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문학도서관이 자리하면서 이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김현옥 시장 시절 지은 청운아파트 11개동이 있던 청운아파트는 모두 철거돼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서울시는 이 자리에 청운공원을 조성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문학도서관이 자리하면서 이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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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문학관이 건립된 청운공원은 원래 청운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다. 1966년 4월 1일 40세 나이로 최연소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은 강력한 추진력 때문에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김현옥 시장은 '돌격'이라고 적힌 헬멧을 쓰고 다니며 군사 작전을 하듯 서울을 개발했다. 서울 전역이 공사판이던 시대다. 

그런 김현옥 시장이 1969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헐고 시민아파트 10만 호를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수송장교 출신답게 속도전으로 밀어붙였다. 시민아파트는 금화아파트, 낙산아파트, 회현아파트를 비롯 32개 지구에 434개 동 1만7402호가 지어졌다. 1970년 4월 8일 지은 지 3개월밖에 안 된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나 34명이 죽고 40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도 이 때다. 

김현옥 시장의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 일환으로 인왕산 기슭에 들어선 아파트가 청운시민아파트다. 1969년 11월 청운아파트는 11개 동 513세대 규모로 지어졌다. 1969년 10월 20일 입주 공모를 했는데 4일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500세대가 넘게 거주한 청운아파트는 청와대가 가까워 경호실 직원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2003년 정밀 안전진단에서 청운아파트가 재난위험지역에 해당하는 D등급을 받자 주민 퇴거가 시작되고, 지은 지 36년 만인 2005년 9월 철거됐다. 서울시는 청운아파트를 철거한 후 나무 1천여 그루를 심고 녹지를 가꿔 2007년 1월 청운공원을 조성했다. 2009년 7월 11일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고 '서시' 시비가 세워졌다. 

윤동주문학관을 세우려 했던 종로구는 예산과 부지가 마련되지 않아 고심하다가 윤동주 시인의 언덕 근처에 방치돼 있던 청운수도가압장에 주목한다. 가압장은 느려진 물살에 압력을 가해 힘차게 흐르도록 하는 시설로 지대가 높은 청운동 일대에 안정적인 상수도 공급을 위해 1974년 지었다. 종로구는 2010년 12월 4일 청운수도가압장 기계실에 윤동주문학관을 임시로 개관했다. 

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한 윤동주문학관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서일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문학관과 기념관, 도서관으로 부활하고 있다. 2012년 종로구가 개관한 윤동주문학관에 이어, 연세대학교는 2019년 현재 핀슨홀을 윤동주기념관으로 조성중이고, 은평구는 2018년 <새로운 길>의 시구를 딴 '내를 건너 숲으로 도서관'을 개관했다.
▲ 윤동주문학관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서일까.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문학관과 기념관, 도서관으로 부활하고 있다. 2012년 종로구가 개관한 윤동주문학관에 이어, 연세대학교는 2019년 현재 핀슨홀을 윤동주기념관으로 조성중이고, 은평구는 2018년 <새로운 길>의 시구를 딴 "내를 건너 숲으로 도서관"을 개관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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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가 보안여관, 이상집터, 윤동주 하숙집터, 정철 생가터,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이르는 '문학둘레길'을 만들면서 윤동주문학관 리모델링 사업이 본격화된다. 임시로 운영 중이던 윤동주문학관 리모델링은 건축가 이소진이 맡았다. 설계에 착수한 지 418일이 지난 2012년 7월 25일, 윤동주문학관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문을 열었다.  

제1전시실인 시인채에는 윤동주 시인의 인생이 연대기 순으로 정리돼 있고 그가 아끼던 소장도서, 유품, 육필원고를 만날 수 있다. 제1전시실 한복판에는 윤동주의 고향에서 가져온 우물 목곽이 자리하고 있다. 제2전시실인 열린 우물은 가압장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해서 중정(中庭)으로 만든 공간이다. 제3전시실 닫힌 우물은 물탱크를 그대로 보존한 공간으로 박범찬 PD가 만든 시인에 대한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다. 카페 공간인 별뜨락에서는 차와 음료를 즐길 수 있고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함께 거닐어볼 수 있다. 

콘크리트 물탱크를 활용해서 독특한 느낌을 주는 제2, 제3전시실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을 뻔했다. 리모델링 설계를 마치고 착공을 앞둔 2011년 7월에 폭우가 쏟아졌다. 전국 각지에서 산사태와 인명 피해가 나면서 청운수도가압장도 구조안전진단을 다시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 이소진은 뜻밖의 발견을 한다. 가압장 사무실 건물 뒤편에 있던 콘크리트 물탱크 2개를 발견한 것이다. 이소진은 물탱크를 전시실로 활용하는 새로운 설계에 착수한다. 5.9미터 깊이 콘크리트 물탱크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심했던 건축가 이소진과 스토리텔링팀은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제2전시실, 제3전시실을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로 각각 표현한 것은,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을 문학관의 핵심 콘셉트로 잡은 덕분이다.

독특한 풍경을 지닌 윤동주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한국의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건축가 이소진에게 2012년 '젊은 건축가상'을 안긴 작품이기도 하다. 

윤동주문학관은 도서관이 아니다. 여느 도서관처럼 만인의 책을 만날 수 없고 작품을 대출할 수도 없다. 전시품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가 아닌 정밀하게 영인된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전시품보다 공간과 '영혼의 가압장'이라는 스토리텔링으로 승부하는 독특한 문학관이다. 

하지만 어떤가. 동주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 아니던가. 오직 한 사람, 시인 윤동주를 깊이 만나고 싶다면 이곳, 윤동주문학관을 찾으시라. '닭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부는' 우물 속, 홀로 있는 사나이를 만나고 싶다면 이곳을 찾으시라. 

[윤동주문학관]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19 (청운동)
- 이용시간 : 10:00 - 18: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시 소재 학생 또는 직장인, 무료
- 홈페이지 : https://www.jfac.or.kr/site/main/content/yoondj01
- 전화 : 02-2148-4175 
- 운영기관 : 종로문화재단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윤동주와 그의 문학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윤동주문학관, #윤동주, #송몽규, #연희전문도서관, #이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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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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