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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오늘 날씨가 계속 흐리다. 습기를 머금은 어둑어둑한 밤에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를 손에 들고 있자니 '이것을 또 어떻게 꼭꼭 씹어 읽을까'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묘한 기대감에 마음이 설렌다.

단편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어쩐지 꿈틀꿈틀 살아있는 산낙지가 담긴 접시를 받아 든 기분이다. 이것을 꼭꼭 씹어 삼킬지, 기분 나쁘다며 도로 뱉어낼지는 각자의 몫. 처음에는 뱉어내기도 했고, 씹지 않고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급하게 삼켜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꼭꼭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는 정도는 된다.

단편 소설에서 작가는 삶의 어느 한 부분만 딱 잘라 독자에게 툭 던져놓고 무심히 뒤돌아 가버린다. 작가가 던져놓고 가버린 그 파편이라는 게 과일로 치자면 싱싱하고 달콤한 부분이 아니라, 벌레 먹어 상하고, 멍든 부분이다. 작가들이란 대체로 남들이 좋아하는 달콤하고 싱그러운 과육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다.

그런 이유로 단편소설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많다. 그 찜찜한 기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축축한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고 독자를 오래 괴롭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 읽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오직 그것만이 줄 수 있는 위로를. 나의 상하고 멍든 부분을 유난스럽게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오래 어루만져 주는 소설에는 희미하게나마 치유의 힘이 있다.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창비(2016)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창비(2016)
ⓒ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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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봄밤>, <삼인행>, <이모>, <카메라>, <역광>, <실내화 한 켤레>, <층>. 일곱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온전하지 못하다.

상처 입은 영혼들. 술을 마셔 병든 것인지, 병들어서 술을 마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인간들의 이야기. 하지만 그들에게 그 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잔인하다. 마취 없이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견디라는 것과 같다.
 
막차를 타고 읍내에 내린 영경은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두 캔과 소주 한 병을 샀다. 편의점 스탠드에 서서 맥주 한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신 후 캔의 좁은 입구에 소주를 따랐다. 또 한 모금 마시고 소주를 따랐다. 그런 식으로 맥주 두 캔과 소주 한 병을 비우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몸은 오슬오슬 떨렸지만 속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꽉 조였던 나사가 돌돌 풀리면서 유쾌하고 나른한 생명감이 충만해졌다. 이게 모두 중독된 몸이 일으키는 거짓된 반응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까짓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젖을 빠는 허기진 아이처럼 그녀의 몸은 더 많은 알코올을 쭉쭉 흡수하기를 원했다. (<봄밤> 32~33쪽)

심각한 류머티즘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혼자서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연인 수환을 요양원에 두고, 알코올중독과 간경화를 앓고 있는 영경은 혼자 밖으로 나와 편의점에서 술을 마시며 시구절을 읊는다. 중얼거림으로 시작해 끝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는 김수영의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촛불 모양의 흰 봉오리를 매단 목련나무 아래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울었다. (33쪽)

그들이 온몸으로 받아내는 삶의 고통을, 인생의 악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의 잘못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신의 짓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왜 하필 나인가. 인간의 연약한 두 다리로는 버텨낼 수 없는 무거운 고통을 나더러 무슨 수로 짊어지고 살란 말인가.
 
자신이 겪는 불행이 무의미한 우연의 소산이라는 사실은 견딜 수 없으므로 어떤 식으로 건 납득할 수 있는 사건으로 만들려고 하며 그 불행을 둘러싼 어떤 작은 우연도 혹시 필연은 아닐지 의심한다. 책임질 주체를 찾으려 하고, 끝내 찾을 수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이라도 피고석에 세운다. (245쪽 신형철의 해설)

<안녕 주정뱅이>를 읽으면서 그 찜찜함의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재수 없게 하필이면 그들에게 닥친 비극을 읽으며 다음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내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내 손을 잡고 나를 늪에서 구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 권여선의 소설을 읽어내기 힘든 이유다.

누군가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그저 허구한 날 술만 퍼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지겨운 변명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가 술잔을 내려놓고 당신의 손을 잡고 좀 도와달라고 해도 될까. 그럼 당신은 그를 도와줄 수 있는가. 그들의 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끔찍한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당신이 조금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면, 그들을 욕하지 마라. 우리에게는 그들을 욕할 자격이 없다. 구해 줄 수 없다면 잠깐 마주 앉아 그의 술잔을 좀 채워주는 것으로 족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간도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저 부서져 내리는 자기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떨어져 나간 부스러기들을 손으로 훔치며 망가진 채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날 2층 발코니에서 그녀는 무심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구겨진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며칠 전 심한 불면과 숙취에 시달리다 격렬한 필체로 휘갈겨놓은 것으로, 더 많은 햇빛 산책 햇빛 산책, 이라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글자들 아래에는 메모지가 찢길 만큼 진한 밑줄이 그어져 있고 끝에는 부들부들 떨리는 세 개의 느낌표가 찍혀 있었는데, 어느 쪽이든 녹슨 칼로 팔목을 마구 그어대는 듯한 살의와 파괴력으로 충만했다. (<역광> 152쪽 )

책을 덮고 글의 여운을 찬찬히 곱씹어 본다. 인생이 참 고약하구나. 사는 게 어떻게 보면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얼마나 큰지 잘 모르겠지만 벌을 받는 거라는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날들이 있다.

그런 날에는 권여선의 소설을 읽는다. 입안에서 꿈틀대는 산낙지를 기어이 꼭꼭 씹으며, 그의 글을 꾸역꾸역 읽어낸다. 산낙지에 술이 빠질 수 없지. 딱 한 잔만. 아니 한잔 더. 그저 성마른 몸에 취한 피가 돌면서 금세라도 깊이 잠들 수 있을 만큼, 딱 그 정도면 족하다.
 
아무리 마셔도 아무리 써도 끝장이 나지 않는 불안의 쳇바퀴 속에서 나는 자꾸 조갈이 난다. 오늘은 또 누구와 술을 마시고 누구에게 설을 풀 것인가. 그 누구는 점점 줄어들고 나는 점점 초조해진다. 몇 번 입술을 깨물고 다짐도 해보았지만 나란 인간은 결코 이 판에서 먼저 일어나자는 말을 할 수가 없다. (271~272쪽 작가의 말)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창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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