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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할머니들의 시 그림책 '사뿐사뿐 눈이 오네'를 읽고 작가인 할머니들께 편지를 쓰는 장흥초등학교 학생들.
 곡성 할머니들의 시 그림책 "사뿐사뿐 눈이 오네"를 읽고 작가인 할머니들께 편지를 쓰는 장흥초등학교 학생들.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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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군에도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23일 봄비가 내렸다. 고추며, 마늘이며 모종을 심은 밭에 봄비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낙수의 속도에 따라 덜덜 떨리는 초록색의 여린 잎들의 싱그러움이 건강하게 느껴졌다. 비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생겼지만, 그래도 곡성교육문화회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 손에는 복사용지 43장으로 출력한 탐진강에 사는 아이들의 편지가 있었다. 이 편지는 섬진강에 사는 속칭 '시인 할매'들에게 드릴 것이었다.
 
곡성 할머니들이 쓴 시그림책 "눈이 사뿐사뿐 오네"
 곡성 할머니들이 쓴 시그림책 "눈이 사뿐사뿐 오네"
ⓒ 북극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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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군에 있는 부산초등학교, 장흥초등학교, 장흥 남초등학교 학생들이 '독서 토론' 시간을 이용해 할머니들의 시 그림책인 <눈이 사뿐사뿐 오네>를 함께 읽고 편지를 썼다. 이 하나의 사실이 주는 의미를 멀리서 본다면 특별할 것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교실에서 사용하는 연습장을 이용해 '곡성 할머니'라 쓴 낱말이 애틋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날줄과 씨줄로 돼 있는 문자를 해독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 의미는 크지 않을 것이다. '책'이라는 매체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야 할 나 자신의 탐구 여정을 위한 활용 품이 돼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둘러싼 마을, 그곳에 속한 사람을 읽는 것까지 돼야 '책을 읽었다'는 행위가 종료되는 것 아닐까. 삶의 피부에 가깝지 않은 먼 곳의 이야기를 그저 앵무새 따라 하기식으로 받아 적고 단순 암기하는 것이 아닌, 내 삶의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탐구 활동을 통해 세계를 넓혀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을 잇는 집배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장흥공공도서관이 기획한 '독서 토론' 수업과 곡성교육문화회관에서 기획한 '시인 할매 북 콘서트'(이하 북 콘서트) 사이에서 아이들이 할머니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장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수업 전 우리는 '출석 인사'를 나눴다. 한 명씩 눈을 맞추며 '잘 지냈어' '만나서 반가워' 등으로 인사를 나눴다. 학교 도서관이라는 특수 공간과 낯선 문화예술교육 강사가 주는 이질감을 누그러뜨리려는 방법이었다. 수업하기 전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 없던 에너지가 솟아났다.

무턱대고 책을 올려 놓지는 않았다.

"오늘은 내가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 

목소리의 톤을 조금 낮춰 속삭이듯 말하자 아이들이 쳐다봤다. 의구심이 어린 눈빛이 보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거 아니야!' 등의 경계하는 눈빛도 보였다. 소란스럽게 학교 도서관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던 아이들도 차분한 분위기에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모두가 조용해졌을 때 나는 다시 입을 뗐다. 

"오늘 너희에게 책 한 권을 읽어줄 거야. 그런데 이 책을 선생님은 일부러 복사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책을 복사해 프린트된 용지를 나눠주면 잘 보관하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을 더 많이 봤거든. 다른 것도 아니고 여기 시를 쓴 할머니들의 글이 짓밟히고 구겨지면 선생님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그래. 이해해 줄 수 있니?" 

차분한 내 음성에 아이들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을 쓴 할머니들은 칠십 세가 넘어 한글을 배웠어.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에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배워 어디다 쓰겠냐'며 학교에 보내지 않았단다.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할머니들은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았어. 그만큼 애잔한 사연도 많아. 예를 들어 남편이 군대에 가 있을 때 편지를 쓸 수 없어 답답했다든지, 자식이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쓸 때 아버지 오면 물어보라고 하는 심정이 어땠을지. 이 책에는 고스란히 쓰여 있어."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말을 천천히 듣고 있었다. 몰입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넌지시 물었다.

"글을 모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너희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배운 글이잖아. 가갸거겨. 하지만 할머니들은 그렇지 못했어." 

아이들은 질문에 '편지를 받을 수 없다' '고지서를 내기 힘들다' '계약서를 쓸 수 없어 곤란하다' 등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들을 쏟아냈다. 아이들의 모습처럼 다양한 답이 나왔다. 

"너희들 말이 다 맞아. 그만큼 불편한 거지. 하지만 글을 배우고 나서 할머니들의 삶은 조금씩 변화가 보였어. 처음 한글을 배우게 된 계기는 곡성에 있는 길작은 도서관의 김선자 관장님의 발견이었단다. 서가를 정리하던 중 책을 거꾸로 꽂는 할머니들을 본 거야. 그때 할머니는 서가 정리를 도와주고 있었거든. 관장님이 '어머니 책을 옳게 꽂아주세요' 했지만 할머니는 옳게 꽂혀 있는 옆 책을 거꾸로 꽂는 거였지. 그때 할머니들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관장님은 알게 됐다고 해. 

그래서 시작한 한글 교육이었어. 한자씩 배우면서 나이 일흔이 넘은 할머니들은 꿈을 갖게 됐지. 문자를 배우니 자신을 표현하는 재미를 느끼신 거야. 관장님의 도움으로 시를 쓰게 됐고, 이어 시집도 출간하셨어. 첫 번째 시집에 이어 두 번째 시 그림책까지 출간했어. 이걸 맞춰 할머니들 북 콘서트가 곡성에서 열린단다. 우리가 할머니들의 첫 독자가 돼 할머니들의 책을 보고 편지를 써서 주면 어떨까?"

 
장흥남초 위해솔 친구의 편지.
 장흥남초 위해솔 친구의 편지.
ⓒ 위해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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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서두가 긴 내 말을 놓치지 않고 들어줬다. 글을 배운다는 느낌. 소통하고 싶다는 느낌. 그것이 학교 교문 담장을 넘어 누군가에게 전달된다는 느낌에 공감을 한 것일까. 시종일관 흐트러지지 않았다. 장난치지도 않고 진지하게 편지를 썼다. 글을 쓰기 어렵다는 친구들은 만화를 그려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그렇게 편지가 모였다.
 
인형극 연습이 한창인 곡성 시인 할머니들.
 인형극 연습이 한창인 곡성 시인 할머니들.
ⓒ 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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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북 콘서트가 곡성교육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린다. 콘서트를 준비하기 위해 23일 리허설 시간을 가졌다. 이날 아이들은 준비한 편지를 할머니들께 전달했다. 

당시 할머니들은 북 콘서트에서 선보일 인형극 연습이 한창이었다. 한글을 몰라 답답했던 할머니들의 유년 시절을 짤막하게 콩트로 다룬 인형극이었다. 자정이 넘도록 손바느질해 만든 인형으로 호미로 밭에 난 잡초를 뽑듯 천천히 인형극 연습을 하고 계셨다. 

할머니들은 편지를 천천히 읽어보기를 원했다.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일일이 어린 독자에게 답장할 수 없는 마음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김선자 도서관장은 할머니들의 시집으로 학생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것에 고마움을 내비쳤다. 김 관장은 "할머니들의 시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이 현재를 감사하길 바랐는데 편지까지 보내줘 고맙다"고 말했다.
 
장흥초등학교 박주혁 학생의 시, '책을 읽었네'
 장흥초등학교 박주혁 학생의 시, "책을 읽었네"
ⓒ 박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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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마음이 진솔하게 전달된 것이기에 어느 것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장흥 초등학교 박주혁 학생의 시는 인상 깊었다. 그 전문을 옮겨 본다. 

책을 읽었네 - 박주혁 

책을 읽고 할머니를 알았네 
책을 읽고 옛날을 알았네 
책을 읽고 차별을 알았네 

나는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였네 
뉴스에서 보는 일이 
세상 전부는 아니었네 


책을 통해 소통하고, 책을 통해 지역 어른들의 삶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은 봄날 심은 모종처럼, 이 가을에 수확을 기다리는 희망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때론 애잔함으로, 때론 천둥벌거숭이처럼 천방지축으로.
 
부산초등학교 정다연의 그림.
 부산초등학교 정다연의 그림.
ⓒ 정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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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곡성교육문화회관, #장흥공공도서관, #부산초등학교, #장흥초등학교, #장흥남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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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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