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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혁명.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4·19 혁명.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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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간의 감정이 안 좋아서인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4.19혁명이 일어난 그 시점에 일본 민중도 5.19 투쟁을 벌였고, 그로 인해 1960년 동아시아의 봄날이 뜨겁게 달궈졌다는 점이다.

1919년에 한국 민중이 3.1운동을 일으켰을 때 중국 민중도 5.4 운동을 일으켜 일본제국주의에 맞섰던 것처럼, 1960년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미국의 대리인 정권에 맞선 투쟁이 동시에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미국 대리인인 이승만 정권에 맞서, 일본에서는 역시 미국 대리인인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 맞선 민중항쟁이 발생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 총리의 할아버지(외조부)다.

교통·통신의 비약적 발달로 대중의 단결력이 향상된 1900년대 초반, 지구상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민중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움직임이 한반도에서는 주로 항일운동으로 표출됐지만, 일본에서는 민주주의 투쟁이나 여성·노동·인권운동 등으로 전개됐다.

이번 달 말일에 퇴임하는 아키히토 일왕(천황)의 할아버지가 다이쇼 일왕(재위 1912~1926)이다. 차기 일왕인 나루히토 왕세자(황태자)에게는 증조부가 되는 인물이다. 바로 그 다이쇼 시절에 일본에서는 민주주의 운동이 활발했다. 일왕도 하나의 국가기관에 불과하며 그 역시 헌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른바 '천황 기관설'이 제기된 것도 그때였다. 이런 흐름들이 그 시대 분위기를 좌우했다 하여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용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민주주의를 향한 일본 민중의 열망은 1945년 패망 뒤에는 민주주의의 증진은 물론이고 미국으로부터의 자주권 획득 및 반핵 평화를 위한 정치운동으로 되살아났다. 이 움직임은 1950년대 후반에 최고점을 향해 치달았다.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이 미국과 소련에 맞서 비동맹운동을 벌이고 서유럽 국가들이 경제통합을 추진하는 등으로 인해 미국의 영향력이 퇴조하던 그 시기에, 일본 민중도 미국과 그 대리인 정권에 대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반미·반정부 운동으로 들끓던 일본열도

그로 인한 위기가 최고점에 달한 때가 바로 1960년이다. 앤드루 고든(Andrew Gordon) 하버드대 교수가 집필하고 인류학자 김우영이 번역한 <현대 일본의 역사>는 "이러한 에너지가 분출되어 1950년대 후반에 대중 시위가 극에 달했고, 1960년에 중대한 위기가 발생했다"는 말로 당시의 위기 상황을 강조한다.

1960년의 일본열도는 반미·반정부 운동으로 들끓었다. 쟁점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업그레이드 문제였다. 1951년 체결된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유효기간 만료가 임박함에 따라 1960년 6월까지는 유효 기간을 갱신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조약을 발효해야 했다. 미일 두 정부는 동맹관계를 격상하는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을 1월 19일 체결한 뒤 의회 비준을 추진했고, 이에 맞서 일본 민중은 조약의 비준을 저지하고자 투쟁했다.

일본 시민사회는 그 전부터 미군 주둔을 싫어했다. 주일미군으로 인해 일본이 미소 간 전쟁에 휘말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재정적 부담도 과중했기 때문이다. 또, 미군 병사들의 성폭력·폭행·교통사고 범죄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대중의 정서가 대미 자주와 반핵 평화를 추구하는 민중운동과 결합하면서 1960년의 위기를 뿜어내게 됐던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전통적으로 일본은 혁명이나 민중 반란 가능성이 낮았다. 기존 시스템을 가급적 존중하고 보호하려는 일본인들의 심리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미국 정부가 일본 점령에 대비해 실시한 일본인 심리 조사의 결과물인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본인은 ······ 사리(邪理)나 부정에 대해 반항하는 일은 있지만, 결코 혁명가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조직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민중투쟁이 잇키(一揆·일규)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잇키 중에는 폭력투쟁 형태를 띤 것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가혹한 세금 착취에 대해 청원을 제기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1894년 동학혁명처럼 체제를 위협할 만한 정치투쟁은 가급적 시도하지 않았다.

그랬던 일본 민중이 1960년에는 달랐다. 한국에서 3.15 부정선거에 맞선 시위 열기가 들끓던 때에, 일본에서는 미일 조약 문제를 매개로 민중의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그런 흐름이 한국에서는 4월 19일에 정점에 달한 데 비해, 일본에서는 5월 19일에 최고점을 찍었다. 5월 19일 일본 국회는 기시 노부스케의 주도 하에 새로운 조약에 대한 동의를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 사건은 '5.19'나 '안보투쟁' 같은 용어로 지칭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된 김주열 열사로 인해 시위 열기가 증폭됐다. 일본에서도 시위 중에 사람이 사망한 일로 인해 분위기가 한층 더 긴장됐다.

<현대 일본의 역사>는 "6월 15일의 시위에서는 젊은 여성 한 명이 사망했다"면서 "경찰은 도망치던 시위대에 밟혀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 시민의 희생은, 조약 체결을 기념해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일정을 취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시민의 희생으로 인해 정치 상황이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시위, 일본에서 일어난 대이변
 
 일본의 5·19 안보투쟁.
 일본의 5·19 안보투쟁.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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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민의 희생 전에, 일본에서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대이변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잇키 정도의 민중항쟁에 익숙했던 일본에서 한국의 4.19 못지않은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날치기가 강행된 5.19 직후 상황에 관해 위 책은 이렇게 말한다.
 
"시위의 규모와 강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몇 주 동안 의사당 주변에서 날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가장 큰 시위에는 줄잡아 10만 명이 참가했으며, 어쩌면 20만 명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소규모 잇키가 일반적이었던 일본 민중운동사에서 10만 이상의 시위대가 뭉쳤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만큼 1960년의 일본인들도 한국인들처럼 맹렬히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4.19는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자유당 독재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승만 정권의 상위에 있는 미국과의 관계에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대리인 정권을 무너트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5.19는 자유민주당(자민당) 집권 체제에는 변화를 주지 못했다.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도 예정대로 발효됐다. 7월 19일 기시 노부스케를 총리직에서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주로 학생들이 참여한 4.19에 비해, 5.19는 더욱 광범위한 사람들의 참여로 이뤄졌다. 학생들 외에도 여성단체나 진보정당도 동참했다. 그처럼 폭넓은 참여 속에 이뤄졌지만, 4.19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1960년 같은 시기에 한일 민중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투쟁을 벌이면서 한쪽에서는 미국의 대리인 정권에 대항하고(한국) 한쪽에서는 미국의 지배에 이의를 제기했다는(일본)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양국 지배집단과 별도로, 양쪽 민중 사이에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4.19가 5.19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놓고 학술적 논란이 있다. 김항 고려대 연구교수는 <상허학보> 제30집에 실린 '알레고리로서의 4.19와 5.19'에서 "한국에서는 일본의 소식이 보도되지 않았고,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주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면서 4.19가 5.19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부정했다. 4.19가 일본에서 보도되기는 했지만, 일본인들의 정치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한편,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는 <사이(間)> 제12호에 실린 '전후 일본 대중과 시민의 교차와 길항-1960년 안보투쟁을 둘러싼 서사를 중심으로'에서 "적어도 (일본) 신문지상에서는 4월 혁명과 안보투쟁에 관한 기사가 서로 공명하고 있었고, 한국의 경험이 일본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일본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단편적인 발언에서도 동시대 한국의 경험이 자신들의 위기적 상황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가까운 참조항이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5.19가 4.19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3.1이 중국의 5.4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에 비해 4.19가 5.19에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다.

1960년 이전부터 두 나라 민중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투쟁하면서 미국의 대리인 정권에 저항하거나 미국의 지배에 항의하는 운동을 똑같은 시기에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세계 패권이 약해지는 속에서, 양쪽 민중이 1960년에 4.19와 5.19라는 거대한 금자탑을 쌓게 됐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수호와 더불어 외부세력의 부당한 지배에 대한 저항만큼은 한일 두 민중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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