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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가 아니라 '한남'이 맞다>는 지난번 기사를 두고 인터넷상에서 제법 격론이 있었다. 특히 남성 네티즌들의 격렬한 댓글이 많아 보였는데, 아마도 기사가 못마땅하다는 의견이 주종이었지 싶다. 건설적인 의견이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어쨌든 이 주제에 관심을 두고 의견을 표명하고 필자에게까지 다양한 제안 보내준 것이 크게 보아 변화를 위한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전체 댓글을 읽지 못해서 댓글 여론의 향배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으나 인기 댓글 중심으로는 부정적인 의견이 다수였다. 별로 용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데 내 주변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별로 없었다. 내 주변의 의견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한남이 맞느냐 틀리냐'보다는, 한남이 혐오 표현이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할 때 과연 현시점에서 남성 혐오 자체가 성립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다. 요약하면 여성 혐오의 존재 여부는 논의할 필요가 없지만 말할 때마다 남성 혐오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냐이다.

여성 혐오만 있고 남성 혐오는 없다는 견해에, '한남' 표현이 정당하다는 태도에 대해서 만큼이나 황당하다는 반응을 표명할 사람이 적지 않겠다. 당장 남성 혐오가 확고하게 존재한다는 반론이 가능해 보인다. '한남'이 남성 혐오 표현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한남'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 정당한 분노 표현이라는 필자의 주장에 설복되지 않고 반문할 사람이 많으리라. 또는 만일 남성에 대한 분노만 있고 남성 혐오가 없다고 한다면 여성 혐오도 없는 것 아니냐고 되치기할 가능성이 있다.

여성혐오부터 살펴보자면 그것을 없다고 말하는 건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에 가깝다. 물론 법과 제도상에서 존재하는 성차별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그러나 여성해방과 관련한 현재 국면은 그러한 가시적 개선에 힘입어 여성혐오라는 거대한 뿌리에 이제 막 손을 대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올바른 판단이다.

말 그대로 손을 댄 수준에 불과하다. 명시적이지 않은 여전한 많은 차별과 여성에 대한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혐오는 엄존한다. 예컨대 버닝썬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오고 있는 관음증적 보도에서 일상적으로 여성혐오가 확인된다.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식의 의무론적 윤리관을 떠올려 보자. 사실 그 정도로 엄격한 윤리는 현실에서 관철되기 어렵다. 문제는 일관되게 인간을 수단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많이 하는 말로 인간의 물화(物化)이다. 그런 태도가 DNA에 탑재되었다면 그때를 혐오라고 판단하게 된다.

일베를 비롯한 혐오집단들은 그들이 적대시하는 세력을 공격하며 물화한 언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짚고 넘어갈 것은 혐오가 분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인간을 상시적으로 수단화(물화·소외)하는 상황을 가정하면, 수단화하는 것을 혐오라고 하고 수단화되는 사람이 대응하는 것을 분노라고 한다. 또한 그러한 분노에 지지를 표하고 동참하는 것을 시민적 양심이자 인간적 공감이라고 하고, 수단화에 편승해 정치·사회·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을 모리배 기질, 쉬운 말로 양아치다움이라고 한다.

일베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홍어 운운하며 음식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한 것은 명백한 혐오이다. 한데 남성들의 성(性)담론에서 여성은 쉽사리 음식화한다. 여성혐오는 대다수 남성과 또 적지 않은 여성의 의식과 무의식에 침투하여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혐오자가 스스로 또 서로, 혐오자임을 자각하고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지난번 글에서 가부장제와 일제 식민지배를 비교해서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인데, 이번에 일베와 비교해서 어떨는지 모르겠다.)

두 사례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에 대한 음식 비유가 동원되는 맥락과 상호성에 따라서 혐오 혐의를 벗을 수도 있다고 보지만 사회에서 유통되는 광범위하고 방대한 양의 성담론이 여성혐오에 해당하기에 소소한 예외가 큰 의미는 없지 싶다. 여성혐오는 성담론에서만 발견되는 건 아니다. 범위면에서 성에 국한되지 않고 형태 면에서도 다양하다. 여성혐오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담론·인식·행태·관행에 깊이 뿌리내려 여전히 보편적으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남성혐오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저절로 밝혀진다. 남성혐오와 모권제 이데올로기가 담론·인식·행태·관행에 깊이 뿌리내려 보편적으로 작동하며 남성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여성혐오를 여성혐오라고 말하고, 여성혐오에 분노하는 것에 불편해하고 화를 내면서 그것을 남성혐오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남성혐오'가 여성혐오의 안티테제라고 하기도 힘들다. 전환을 위한 유의미한 단계에 돌입했다기보다는 여전히 여성은 여성혐오에 대해서만 분노하고 있을 따름이다. 고작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설명을 위한 '남성혐오'는 불가피하게 사용된다. 고작 '한남'이지만 '고작'이란 것은 맥락을 통해서만 파악되고 '한남' 자체는 '한남충'의 줄임말로 보아야 하기에 '한남'이 혐오표현의 하나라는 사실이 부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남성혐오의 실재를 입증하지는 않는다. '한남'은 있고, 남성혐오는 없다. '한남'은 수 천 년, 아니 그 이상 이어진 여성혐오와 가부장제의 계승자이자 주체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문제는 여성혐오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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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