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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눠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조형물 1993년에 조성된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앞부분에 2년 후 설치된 조형물이다. <民族正氣>라는 휘호는 당시 대통령 김영삼이 직접 썼다. 양 옆에 태극기를 들고 있는 인물상에도 눈이 간다.
▲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조형물 1993년에 조성된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앞부분에 2년 후 설치된 조형물이다. <民族正氣>라는 휘호는 당시 대통령 김영삼이 직접 썼다. 양 옆에 태극기를 들고 있는 인물상에도 눈이 간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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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일이다. 마침 서울시가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을 정비해 그 일대를 2024년까지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재탄생시킬 계획도 내놨다. 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을 걷기 시작한 기자로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국립 서울현충원에는 애국지사 묘역과 무후선열제단, 임시정부요인 묘역,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가 묘역이 별도로 조성돼 있다. 이 가운데 1965년에 처음 조성된 애국지사 묘역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순서임에도 4월 11일이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라는 점을 고려해 애국지사 묘역 위쪽에 있는 임시정부요인 묘역을 먼저 소개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 헌법과 현실의 불일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 현행 헌법(10호 헌법)의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시작하는 1948년 7월 17일 선포된 제헌헌법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자,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과 이를 계승한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동안 사라졌던 제헌헌법 정신의 부활을 의미한다.

'우리들 대한국민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될 당시에도 대한민국의 건립시기를 1919년으로 보고 있었고, 이를 1948년에 '재건'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중간에 한동안 혼란이 있었음에도, 제헌헌법과 현행 헌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헌법이 아닌 현충시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헌법 정신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대한민국이 진정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였다면 대한민국은 현충시설을 마련함에 있어 마땅히 독립운동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들(순국선열)을 모시는 일을 제일 먼저 했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제국 시기에 있었던 현충시설인 장충사를 재건해 38선을 사이에 둔 남과 북의 크고 작은 충돌 과정에서 돌아가신 7000~8000의 영령을 모시는 작업은 했지만, 독립운동가를 모시는 현충시설을 만드는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독립운동가를 모시는 무덤에 관심을 보인 이는 백범 김구였다. 백범 김구는 해방과 함께 귀국하자마자 지금의 효창공원에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를 모시기 위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한다. 그 결과 일본으로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수습해 3의사 묘를 세우고, 안중근 의사를 모시기 위한 묘는 주인을 기다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 사망한 임시정부요인 이동녕 선생과 차리석 선생의 유해를 봉안해 1948년 효창공원에 모신 분도 백범 김구였고, 1948년에 돌아가신 임정요인 조성환 선생을 효창공원에 모신 분도 백범 김구였다.

이승만은 왜 독립유공자를 모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

물론 이승만 정권이 독립유공자를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은 정부수립 1주년인 1949년 8.15기념식을 앞두고 건국공로훈장 수여라는 이름으로 독립유공자 표창을 추진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8.15를 불과 2~3일 남겨놓은 상황에서 "현재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군경을 먼저 표창해야" "나보다 10용사를 먼저 표창해야" 한다면서 독립유공자 선정 작업을 갑자기 중단시킨다. 결국 8.15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에 이어 진행된 건국공로자 표창식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만이 건국공로훈장을 받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진다.

사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를 표창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독립운동 당시에도 '외교를 통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는 대표적인 '외교론자'였다. 1949년의 건국공로훈장 수여 추진도 "우리는 외국 친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라면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광복에 기여한 미군과 미국인을 표창하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승만이 갑자기 독립유공자 선정 작업을 중단하라고 지시한 진짜 이유도, 미국법에 따르면 미국 의회의 사전 동의 없이는 미국 관공리에 훈장을 수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마침 38선을 둘러싼 남과 북의 갈등은 좋은 핑곗거리였을 뿐이다(1949. 9. 3. <경향신문>의 이승만 인터뷰 기사, '먼저 10용사를 표창' 참조).
  
<먼저 10용사를 표창>(1949. 09.03, <경향신문>)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수립 1주년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선정작업을 진행하다 돌연 중단했다. 1주년 기념식장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만이 독립유공자로 표창을 받았다.
▲ <먼저 10용사를 표창>(1949. 09.03, <경향신문>)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수립 1주년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선정작업을 진행하다 돌연 중단했다. 1주년 기념식장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만이 독립유공자로 표창을 받았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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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주도한 인사들 중 상당수가 친일파였다는 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찰과 군대는 물론 이승만 정부의 요직에 포진한 그들 친일파는 독립유공자를 표창하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현충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이유가 없었다.

헌법정신과 현실의 불일치. 서울현충원은 독립유공자를 모시는 국립묘지로 시작하지 못하고 곧바로 이어진 6.25 한국전쟁으로 많은 군인이 사망하면서 이들 군인을 모시는 국군묘지로 출발하게 됐다.

1965년, 애국지사 묘역이 조성되다

1955년 국군묘지로 시작한 서울 현충원이 국립묘지로 승격한 것은 1965년이다. 이때 애국지사 묘역이 조성되면서 비로소 독립운동가도 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게 됐다(첫 안장자 김재근 선생의 유해는 1964년 애국지사 묘역 조성 중에 먼저 모셔졌다).

국가가 독립유공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해프닝은 비단 1949년 이승만 정부 시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의 4.19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민주당의 장면 정권에서도 해프닝은 반복됐다.

장면 정권은 독립유공자 11명을 선정해 10월 1일 '신정부수립 경축식'에서 기념품을 증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장면 정권의 각의에서 9월 29일 당시 결의한 11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김창숙(유도회 회장), 이강·신숙·김중화(이상 광복동지회), 유림·김성숙·장건상·조경한(이상 임정국무위원), 김학규·오광선(이상 광복군), 유석현(항일 의거자)(<동아일보> 1960. 9. 30.)

하지만 곧바로 반발에 부딪힌다. 유림을 대표하는 심산 김창숙은 참석 거부 의사를 바로 밝혔다. 김창숙은 "표창 수상 대상자 선정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의열단 출신의 유석현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경향신문>(1960. 10. 7.)과의 인터뷰에서 "그저 갈 생각이 없었죠, 저 같은 게 뭐 애국자 축에 드나요?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그리고 도대체 독립유공자 선정의 기준을 어디다가 두었는지는 모르나 진짜 애국자와 진짜 투쟁경력을 가진 어른들이 많이 빠졌더군요, 그렇잖아요?"라면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석현은 심지어 "한민당 시절에 이 박사를 도운다면서 나라를 이꼴로 만든 그네들인데 무슨 큰 기대를 걸겠소?"라는 말까지 남긴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듬해 3.1절을 앞두고 이전과 달리 비교적 대규모인 205명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해 표창한다. 4.19혁명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현실과 정통성이 취약한 쿠데타 세력의 현실이 결합된 결과였다.

물론 이때도 논란은 계속 이어졌다. 결국 3명이 3.1절 기념식 직전 명단에서 빠지는가 하면,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신규식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딸 신명호는 "고인의 생전 신조가 '허영과 공명을 탐하지 말라'는 것이었음에 비추어 상을 받지 않겠다"라면서 수상을 거부하기도 한다. 신명호의 남편이자 임정요인 중 한 명이었던 민필호는 "(이번 포상은) 아량이 적은 옹졸한 일이었으며, 특히 수상자에 등급을 매긴 것은 부당하다"라고도 평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 현 서울현충원에도 애국지사 묘역이 들어서게 됐다. 하지만,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조성은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박정희는 심지어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라는 헌법정신을 계속 견지하는 한 그 기간 일본군 장교였던 자신이 설 땅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헌법 전문을 전면 개정하면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라고 바꿔 버린다.

이로써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만 계승하면 될 뿐 대한민국의 구체적인 기원을 알 필요도 없게 됐다.

임시정부요인 묘역, 해방된 지 45년 만에 조성되다
 
임시정부요인 묘역 장군제2묘역에서 본 임시정부요인 묘역
▲ 임시정부요인 묘역 장군제2묘역에서 본 임시정부요인 묘역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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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에 임시정부요인 묘역이 들어서는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의 일이다.

이는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된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의 여파이기도 했다. 6월 민주항쟁은 비록 전두환 군사정권의 지배를 곧바로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만연돼 있던 군사문화를 청산하고 왜곡돼 있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성숙한 민주역량을 길러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명시한 후, 유사 군사정권인 노태우 정권을 거쳐 문민정부라는 자부심 속에 등장한 김영삼 정부에 이르러 서울현충원에 임시정부요인 묘역도 조성할 수 있었다.

광복 48주년 기념일을 눈앞에 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을 비롯해 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등 독립운동가 다섯 분의 유해를 중국 상하이의 만국공묘에서 현충원으로 모셔오면서 조성된 임시정부요인 묘역은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라는 헌법 정신이 45년만에야 비로소 현충시설에 공식 반영됐음을 의미한다.

김영삼 정부는 4.19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시키고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 마산 3.15민주묘지의 성역화 사업 등도 추진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있는 무덤과 없는 무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제2대 임시대통령 박은식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뀐 후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홍진·양기탁 등 네 분의 묘를 비롯해 총 열여덟 분의 묘가 조성돼 있다.
 
2대 임시 대통령 박은식의 묘 <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 등으로 유명한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 대통령중심제를 국무령제로 개혁하고 스스로 퇴임하였다.
▲ 2대 임시 대통령 박은식의 묘 <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 등으로 유명한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임시 대통령에 취임하여 대통령중심제를 국무령제로 개혁하고 스스로 퇴임하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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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임시정부는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경성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를 비롯, 총 7개가 있었다고 알려졌다. 이들의 통합은 1919년 9월 상해 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가 하나로 되면서 최종적으로 이뤄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묘는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없고, 서울현충원 대통령 묘역에 따로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런데 임시 대통령의 직위는 임시의정원에 의해, 정식 대통령의 직위는 국민에 의해 그 자리에서 내려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이력이다. 

사실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제가 아니라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해 정부를 구성하고 임시의정원(초대 임시의정원장 이동녕)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의회중심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무총리로 선출된 이승만이 미국에서 대통령 행세를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상해에서 총리 권한 대행을 맡고 있던 안창호가 편지를 보내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에서 자신을 집정관 총재로 지명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를 거절한다. 결국 임시정부는 이승만 한 사람을 위해 대통령중심제로 제도를 바꾸고 이승만을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합 정부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불과 6개월만 상해에 와서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대통령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재미동포로부터 거둔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용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 결국 탄핵당하고 만다.

2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은식은 이승만에게서 대통령중심제의 폐해를 경험하면서 이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첫 국무령으로 이상룡을 선출한 후, 자신은 곧바로 임시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임정의 상징적인 존재 백범 김구 주석의 묘도 없다. 백범 김구의 묘는 임시정부가 1927년 주석제를 채택한 이후 초대 주석으로 취임했던 이동녕과 함께 효창공원에 있다. 이번에 발표된 서울시의 독립공원기념공원 조성 방침을 볼 때, 백범 김구의 묘는 앞으로도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이장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임정 부주석 김규식,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조소앙, 백범 김구의 오른팔격이었던 엄항섭 등의 묘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6.25 한국전쟁이후 납북돼 그 무덤이 북의 애국열사릉 또는 재북인사묘 등에 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 아래에 있는 애국지사 묘역의 무후선열제단 제일 왼편에 위패로만 모셔져 있다.

무후선열제단에는 이들 세 분 외에도 전쟁 중 납북된 유동열·오화영·조완구·윤기섭·김붕준·명제세·최동오·정광호 등 임정요인 여덟 분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그나마 이들은 나은 편이다.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해 군무부장을 맡았던 의열단의 김원봉은 남과 북 어디에든 무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위패도 없다.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우리의 아픈 현대사가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우리의 기억에서 지우려 하고 있지만, 김원봉은 이미 영화 <암살>과 <밀정>을 통해 우리 국민의 가슴 속에서 복권됐다.

비록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돼 있지만, "내가 죽거든 친일파들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라고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1900~1993)의 유언은 여전히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조경한의 서거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재심사 과정을 통해 애국지사 묘역의 친일파들은 정리됐다. 하지만, 장군묘역과 국가유공자묘역 등에 있는 친일파들은 지금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이 안고 있는 이 치명적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다.
  
임정의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의 묘 독립운동가 조경한은 1993년 돌아가시기 전 "내가 죽거든 친일파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 임정의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의 묘 독립운동가 조경한은 1993년 돌아가시기 전 "내가 죽거든 친일파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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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18명의 독립운동가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들어서면 제단 형식의 조형물이 있다.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휘호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 직접 썼다고 한다. 다만, 양 옆에 태극기를 들고 있는 사람상을 자세히 보면 '국적불명', 심지어 '어느 별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우리 미술계의 당시 수준을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은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제일 먼저 만나는 칸에는 초대 부의장과 2대 의장을 지낸 손정도를 비롯해 윤세용(의정원 의원), 이강(13대 의정원 의장), 김성숙(국무위원) 등의 묘가 나란히 서 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이번에는 임정의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과 노백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비롯해 황학수(생계부장)·이유필(내무총장)·박찬익(법무부장)·김인전(의정원장)·김동삼(통의부총장)·조경한(비서장)·오영선(법무총장)의 묘가 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정상부에는 앞에서 말한 2대 임시 대통령 박은식과 좌우로 이상룡·홍진·양기탁 등 국무령의 묘가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으며,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와 <동작민주올레>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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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