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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7일 오전 9시 46분]

남북한 사람이 만나면 말이 통한다. 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인'일 경우다. 남북한 농인이 만나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쓰는 '수어'와 북한에서 쓰는 '손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북정상은 통역 없이도 서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남북한 농인이 만나 의사소통을 하려면 한국의 수어통역사와 북한 손말통역사, 2명이 더 필요하다. 남북의 언어는 결코 같지 않다.

이들 사이에 놓인 장벽을 조금씩 치우는 프로젝트가 독일 베를린에서 진행되고 있다. 독일 단체 '투게더함흥(Together Hamhung e.V.)'과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 e.V.)'의 '손말수어 프로젝트'다. 투게더함흥은 북한의 농인을 돕는 단체로, 국제회의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남북의 수어가 다르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독일에 북한 손말을 아는 사람은 있는데, 한국 수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디자이너로 일하던 조혜미 활동가가 합류하게 된 이유다. 조혜미 디자이너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하며 '농'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우연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세계와 농 정체성은 지금 그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지난 2일, 독일 베를린에서 남한의 수어와 북한의 손말을 알리고 있는 조혜미 활동가를 만났다.

얼굴 맞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남북 수어, 영상을 만들다
 
독일 베를린에서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조혜미 활동가
 독일 베를린에서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조혜미 활동가
ⓒ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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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선천적 농인(청각장애인)이고, 조혜미입니다. 지난 2018년 6월부터 3개월간 독일 '투게더함흥'에서 일했습니다. 최근 비자 3년을 받아 다시 독일로 왔고, 투게더함흥에서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투게더함흥과 협업하는 코리아협의회에서도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 투게더함흥이라는 단체는 어떤 곳인가요?
"독일 베를린에 있는 투게더함흥은 북한 농인들을 돕는 단체입니다. 독일인 농인인 마르코 그룬드, 로버트 그룬드 형제가 주도적으로 일하고 있는데요, 로버트는 특히 2013년부터 4년간 세계농인연맹을 대표해 평양에 거주했던 유일한 외국 농인입니다. 북한 손말을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죠. 로버트는 북한에 있을 때 청각장애인센터, 유치원, 목공소 등 여러 곳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지금은 독일에서 투게더 함흥 활동을 하면서 '손말수어' 프로젝트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손말수어 프로젝트', 어떤 취지로 시작되었나요?
"이 프로젝트는 지난 2018년 6월 시작되었습니다. 로버트가 북한 농인들과 국제적인 활동을 하면서 북한과 한국의 수어가 음성언어와 달리 차이가 크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농인들의 국제회의에 가면 한국과 북한의 수어통역사가 각각 필요했거든요. 이 프로젝트는 남북 농인들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장기간 기획된 사업입니다.

지금은 북한 수어를 할 줄 아는 로버트와 한국 수어를 할 수 있는 제가 함께 남북의 언어를 비교하는 영상을 제작합니다. 또한 <조선-한국 작은손말수어사전>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남북의 젊은 농인들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손말수어 사전을 통해서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청년 농인들이 원활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투게더함흥의 손말수어 프로젝트 영상 캡쳐
 투게더함흥의 손말수어 프로젝트 영상 캡쳐
ⓒ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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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한 말의 경우 남쪽의 외래어 사용이 큰 어려움으로 꼽히는데, 남북한의 수어 교류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든가요?
"독일에서 북한 농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청인들과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인들은 남북한말 사전도 있고, 서로 들을 수 있으니 이해가 좀 더 빠를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수어는 얼굴을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만나지 않으면 남북한 공통 언어를 만들기가 어려운거죠. 처음에는 전혀 통하지 않아도 직접 얼굴을 보면 통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먼저 동영상을 통해 남북한의 수어를 교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남북한 수어 차이의 예를 든다면요?
"예를 들면 한국 수어로 '깨끗하다' 인데, 북한 손말로는 '새롭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수어는 같지만 의미가 다르죠. 그리고 한국 수어로 '감사합니다'는 북한 손말로 '김치'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웃음)."  
                           
손말수어 차이 예시
 손말수어 차이 예시
ⓒ 조혜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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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인연으로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나요?
"예전에 한국에서 외국 농인이 북한 농인들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북한 농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북한수어와 한국수어가 다른 것도 몰랐었거든요.  

그러다 2017년 덴마크에 있는 세계 농인 리더십 양성 기관인 프론트러너즈(Frontrunners)에서 공부하면서 우연히 독일에 북한 관련 농인 단체가 있다는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가 로버트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투게더함흥 및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2018년 5월 말에 프론트러너즈 수료가 끝나자마자 바로 독일로 와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한국에서는 국제수어를 가르쳤다고 들었어요. 한국의 범위를 넘어서 국제수어와 북한 손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는 그림을 좋아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어요. 농 정체성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우연히 농인영상제작집단인 '데프미디어'가 제작한 영상에서 국제수화를 처음 접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고 신선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농인은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웃음). 그 후 견문을 넓히기 위해 국제수화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26살이었던 당시 저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열심히 세미나, 강연을 찾아다녔습니다.   

덴마크에 있는 프론트러너즈는 전세계의 농청년들이 모인 교육기관입니다. 국제수화, 이중언어, 농문화, 정체성, 리더십, 방향성, 미디어 등등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덴마크에서 다시 투게더함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피어났죠. 이 흥미로운 단체를 확실히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면돌파해서 도전했습니다. 물론 많이 힘들었지만 로버트씨가 북한에 대해 이야기해줄 때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들과 많이 달랐고, 더욱 많이 알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복잡한 언어를 통일하는 움직임, "독일에서만 가능한 일"
 
독일 베를린에서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조혜미 활동가
 독일 베를린에서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진행중인 조혜미 활동가
ⓒ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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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젝트 팀들끼리는 어느 나라 말, 혹은 수어로 대화하는 거죠?
"다같이 회의를 할 때는 독일수어 통역사가 있고, 그룹채팅방을 열어 문자 통역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독일수어를 하지 못해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독일수어도 열심히 배우고 있답니다. 평소에는 국제수화, 한국수어, 북한손말, 독일수어 등등 여러가지 섞어서 다양한 언어로 소통합니다. 좀 복잡하죠?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주 다양해요."

-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손말 수어 문제를 처음 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담론이 얼마나 진행되고 있나요?
"2016년 8월 4일 '한국수화언어법'이 개정되어 '남북한 한국수어의 교류 및 연구에 관한 사항'을 기본계획으로 수립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고, 현재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법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실제로 함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투쟁이 절실합니다."

- 남북한의 손말수어 프로젝트, '독일'에서 해야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제가 알기로는 현재 남북한 수어 문제를 다루는 건 투게더함흥과 이 프로젝트가 유일합니다. 또한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위해서 북한과 남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넘치는 로버트가 독일에 머물고 있고요, 제3의 나라에서 북한 농인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독일에서만 가능한 일이죠."
 
투게더함흥과 코리아협의회의 '손말수어' 프로젝트

투게더함흥의 로버트 그룬트와 조혜미 활동가는 남북교류와 수어 소통을 위해 미리 알아두면 좋을 손말과 수어 표현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비디오를 제작한다. 이 '손말수어' 영상은 총 20회에 걸쳐 시리즈로 공개될 예정이며, 현재 4편이 공개되어 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8QJk7kAhh7-tql1dcEdXAA)

 
투게더함흥의 손말수어 프로젝트 영상 캡쳐
 투게더함흥의 손말수어 프로젝트 영상 캡쳐
ⓒ 투게더함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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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오른쪽에 보이는 사람이 로버트 그룬드(Robert Grund)씨다. 지난 15년간 북한의 농맹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돕는 사업들을 펼쳐왔다. 그는 통일 이전 동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남북한의 통일을 염원하는 중이라고 한다.

투게더함흥은 15일 베를린 기반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와 MOU를 맺고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한다. 남북 수어 손말과 독일 및 국제 수어, 그 이외에도 청인들을 위한 한국어, 독일어 사용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리아협의회는 또한 독일 사회 내에 '손말수어' 프로젝트를 널리 알리고, 북한 농맹인들의 독일 방문 등 다양한 행사를 함께 추진할 예정이다.

북한,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에서도 다른 농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특히 북한에 농인과 맹인을 대표하는 단체를 만들고 세계 기구에 가입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올해 북한이 세계농인협회에 136번째로 가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손말수어 프로젝트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위해 독일 최대의 기부 플랫폼인 'Betterplace'를 통해 후원을 받고 있다. (https://www.betterplace.org/de/projects/66743?fbclid=IwAR3-eNWypSlqVcTBXThvkNgmeS6bwHWY4auNYVRqi47lieUmM4IA87wLBxM)

 

태그:#투게더함흥, #손말수어, #남북한 수어, #조혜미,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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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베를린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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