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세월호 참사 후 언론과 공권력 피해자 홍가혜씨
 언론과 공권력 피해자 홍가혜씨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바리캉이 긴 머리카락 사이를 훑는다. 그동안 길러온 머리칼이 단 한 번의 손짓에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앞머리와 옆머리의 일부가 그렇게 사라졌다. 그는 한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허언증', '관종(관심병)', '사칭녀', '거짓말쟁이'...  5년 가까이 한 여성을 따라다녔던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이름 뒤로 '진실'이라는 검색어가 추가됐다. 뒤바뀐 세간의 반응. 세월호 참사 당시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던 홍가혜씨의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 이후 4년 6개월. 홍씨는 국가와 언론, 대중으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그간 홍씨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8일 홍씨를 직접 만났다.

머리를 자르다

오전 10시 반, 인터뷰하기 직전 그가 '오늘 머리를 자르려 했다'는 말을 꺼냈다. '자른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식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결국 인터뷰는 미용실에서 시작됐다. 미용실을 향하던 자동차 안에서 그녀에게 첫 질문을 건넸다.

"무죄판결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요?"라고 묻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온다. 지난해 11월 29일 대법원 판결에 대한 소감을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1심 무죄 판결 받았던 날의 기억을 꺼내 놨다. 그는 지난해 11월 29일 대법원에서의 판결을 끝으로 '세월호 관련 허위 인터뷰'라는 비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바 있다.

"대법원 판결은 마침표죠. 무죄판결이라고 하면 2015년 1월, 1심에서 처음으로 무죄가 입증된 날이 떠올라요. 지난 5년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어요. 죄가 없다는 게 밝혀지면 기뻐야 하는데, 어찌나 억울하고 화가 나든지. 대체 내가 왜 그런 비난을 들었어야 했는지 억울했어요. 결국 이렇게 무죄가 날 것을 (검찰과 경찰, 언론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2014년 4월 18일 참사 이틀째 되는 날, 홍씨는 MBN과 인터뷰에서 "해경이 민간 잠수부들의 구조작업을 막고 대충 시간이나 때우라고 했다", "다른 잠수사가 (배 안에서) 생존자를 확인하고 소리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12분이 채 안 되던 이날의 인터뷰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

"당시 수색이 지연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왔잖아요.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 자리였는데, 그 순간의 선택이 내 삶을 뒤바꿀 줄은 몰랐죠. 그날 이후, 매순간이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었어요. 정말 죽고 싶었죠. 그때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죽어라, 죽어라' 하는데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진작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죠."

교도소에서의 101일
 
 세월호 참사 후 언론과 공권력 피해자 홍가혜씨
 홍가혜씨는 왼쪽 손목에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노란 리본 20140416"을 문신으로 새겼다. 문신 옆으로 손목을 지나간 칼자국의 흔적도 보인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온라인에서는 그를 향한 마녀사냥이 쏟아졌다. 경찰은 해경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홍씨를 긴급 체포하고 구속했다. 8월 1일, 보석으로 석방되기까지 101일 동안 그는 목포교도소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교도소에선 철저하게 혼자였어요. 면회까지 차단당했거든요. 교도소에서 면회를 차단한다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 아닌가요? 죄가 확정된 상태도 아닌데 24시간 CCTV 감시도 받았어요. 당시엔 이게 인권 침해인 줄도 몰랐죠. 내 편 하나 없는 상태에서 교도소에 있는데... 그때 자기부정을 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당시에 귀신에 씌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정말 허언증 환자는 아닐까."

억울하지는 않았을까?

"당시에는 그냥 죄송하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경찰이나 검찰이 조사과정에서 유가족과 저를 이간질시켰거든요. 경찰이 '유가족들이 너의 처벌을 바란다', '너는 세월호 유가족들한테도 해경 가족들한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경찰의 말이 전부 사실인 줄 알았어요. 조사실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는데, 유가족 분들께 한없이 죄송했어요.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더 큰 상처만 줬다는 생각때문에요."

이간질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됐을까.

"2014년 석방(8월 1일 보석 석방)된 이후, 3개월 간 저를 보도한 모든 기사들을 모니터링했어요. 그때 유가족 분들이 '그 여자를 왜 잡아가냐, 석방시켜라'라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 찍힌 영상을 봤어요. 저는 한동안 그 사실을 몰랐거든요."

그는 출소 직후 한동안 유가족들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안함 때문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심정으로 그해 9월 미수습자 가족 식당에서 신분을 숨기고 자원봉사를 했다.

"물론 미안함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지금도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부르면 내 사정이 어떻든 달려가요."

돈, 가족, 일상... 모든 게 어그러졌다
 
 세월호 참사 후 언론과 공권력 피해자 홍가혜씨
 "그날 이후, 매순간이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었어요. 정말 죽고 싶었죠. 그때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죽어라, 죽어라" 하는데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2015년 1월 9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홍씨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홍씨 인터뷰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모두 허위로 단정하긴 어렵다"는 취지였다. 2016년 9월 1일 광주지법 제1형사부(재판장 이헌영 부장판사)도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은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어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에서도 홍씨의 무죄가 확정됐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암담했다. 홍씨의 가족들까지 비난을 받고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그를 갓난아이 시절부터 키워준 친할머니는 헛것이 보이는 섬망 상태에 놓였고, 외할머니도 쓰러졌다.

홍씨 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려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고백했다. 카메라 셔터음에 대한 트라우마도 생겼다.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갈 당시, 자신에게 쏟아지던 셔터 소리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의 셔터 소리를 마치 '총소리' 같았다고 기억한다. 한동안은 카메라 렌즈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했다.

"내 가족까지 처참히 망가진 모습을 보고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계속되는 언론의 오보와 악플러들의 발언에 손 놓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수많은 악플러와 약 20개의 언론사, 허위사실을 유포한 기자를 고소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나와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서 한 거였어요."

홍씨는 소송 비용 마련을 위해 있는 대로 돈을 긁어모았다.

"출소 직후에는 정말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하던 사업도 접어야 했고, 남은 건 빚밖에 없었거든요. 유가족분들이 오라고 연락을 주셔도 대구에서 안산까지 갈 차비조차 없었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돈을 긁어모았죠. 보험도 해약하고, 집에 있던 물건 다 갖다 팔고... 정말 간절했어요."

감옥에서 보석 출소한 뒤 홍씨가 싸워온 3년, 당시 그의 모습은 지난해 11월 3일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가혜>에 담겼다. 영화는 세월호 참사 이후, 공권력과 언론에 의해 삶의 궤적이 바뀐 홍씨의 모습을 담았다. 그는 시민으로, 때론 피해자로 끊임없이 싸우고, 소리 지르고, 때론 주저앉아 울부짖는다.

"그 3년 동안에도 사람들은 저보고 '관심종자'라고 했어요. 하지만 전 제 사건이 잊힐까봐 두려왔어요. 당시 제 사건은 여전히 진행중이었고, 해결된 게 없었으니까. 내가 사회에서 잊혀 판결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면 어쩌지. 이런 강박이 항상 따라다녔어요. 그래서 뭔가를 멈출 수 없던 거예요."

지금도 누군가는
 
 세월호 참사 후 언론과 공권력 피해자 홍가혜씨
 "사실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죠. 지금도 제2, 제3의 홍가혜가 분명 있을 거예요."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홍씨는 얼마 전,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지난 3월 5일, 그는 경찰·검찰·국가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가 제출한 소장에는 대한민국과 박◯◯, 손◯◯, 임◯◯ 검경 관계자 3인이 피고로 적시됐다. 박◯◯은 당시 홍씨를 수사·기소한 광주지검 목포지청 검사, 손◯◯·임◯◯은 당시 홍씨를 수사한 전남지방경찰청 소속 경찰관이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만들지 마라, 그게 우리나라가 주장하는 헌법 가치잖아요. 그런데 그게 과연 지켜지고 있나요? 그 피해자가 바로 저였어요. 사실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죠. 지금도 제2, 제3의 홍가혜가 분명 있을 거예요. 하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서 이들을 도와주려 하지 않죠. 그래서 제가 하려고 하는 거예요. 대법원 판결 후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이전까지는 나를 위한 싸움이었지만, 모두를 위한 싸움은 이제부터인 거죠."

아무런 힘도 없던 일반인 홍가혜는 어떻게 언론과 대중의 비난으로부터 견뎌올 수 있던 걸까. 그리고 어떻게 다시 싸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약 1분간의 무거운 정적. 홍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되게 강할 것 같고, 뭐라도 있을 것 같죠. 오히려 저같은 사람들이 더 약해요. 교도소에 있었을 때는 자살일기도 썼어요. 세상사람 모두가 내게 등지고 있구나, 감옥에서 나가더라도 더 큰 사회란 감옥에 갇히겠구나,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빠졌구나, 이런 생각들이 계속 드는데 정말 죽겠더라고요. 만날 죽고 싶다고 얘기하면서도 순간순간을 살아냈을 뿐이죠. 이게 제 진짜 민낯이에요."

덤덤하게 답하던 홍씨의 코끝이 빨개졌다. 문득 그의 왼쪽 손목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세월호 문신과, 손목을 지나간 칼자국의 흔적이다. 그녀의 모든 곳에 남아있는 5년의 시간들. 어쩌면 그는 이제 세월호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을까. 그에게 마지막으로 세월호와 관련해 잊고 싶은 부분은 없는지 물었다.

"잊는다면 세월호가 아닌, 저를 잊어야죠. 홍가혜와 관련된 가십들이요. 이제는 홍가혜라는 사람을 검증하지 말고, 제 사건의 본질에 주목해줬으면 좋겠어요. 한 국가 권력이 개인을 어떻게 망가뜨렸고, 그 사람은 왜 계속 싸우려 하는지에 대해서요. 세월호 참사 자체는 잊으면 안 되죠. 아직 세월호의 진실도 안 밝혀졌잖아요. 이제는 세월호와 관련된 가십들은 지우고, 본질이 떠올라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진상규명이니까요."

만일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상황이 다시 발생한다면 홍가혜씨는 어떤 선택을 할까.
  
"정부가 세월호 참사 때처럼 대응한다면 당연히 달려갈 거예요. 그때는 정말 최악이었으니까. 제 성격상 또다시 목격한 현장을 말하겠죠. 하지만 이런 가정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한다면 저 같은 사람이 나올 리 없잖아요. 개인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사회, 이게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사회의 모습이에요."
 
 세월호 참사 후 언론과 공권력 피해자 홍가혜씨
 얼마전, 홍가혜씨는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이제는 세월호와 관련된 가십들은 지우고, 본질이 떠올라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진상규명이니까요."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댓글2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