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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당시의 시위 행렬.
 3·1운동 당시의 시위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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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올해부터 4월 11일로 변경됐다. 기존의 4월 13일은 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임시정부를 선포한 날이다.

헌법 전문에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했고 또 올해부터 임정 수립일이 수정됐으므로, 우리 사회는 이제 1919년 4월 11일을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으로 기억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1948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19년 4월 11일을 대한민국의 생일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이승만 세력이 주도해서 만든 1948년 헌법에서도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1919년으로 설정했다.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명시했다. 이 규정은 그 후 역대 헌법의 전문(서문)에 계승됐다. 1919년이 민주공화국 출발점이라는 사실이 역대 헌법에서 항상 인정됐던 것이다.

하지만 규범상으로만 그랬을 뿐, 1919년의 의미가 국민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아니다. 헌법 전문에 담긴 1919년의 의미는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널리 공감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19년 3·1운동에 대해 심리적 저항감을 가진 세력이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온 탓에, 1919년의 의미가 국민들 사이에 제대로 퍼져나가기 힘들었던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이 쭉 지배했으니 '민주공화국 수립' 인정 못한다?

1919년이 출발점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1919년 이후로도 여전히 이 땅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919년에 민주공화국을 세웠다'는 말과 '1919년 이후로도 일본이 계속 지배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양자가 상충하지 않는다는 점은 인류의 오랜 관행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미국인들은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하고 아메리카합중국의 출발점으로 기억하지만, 실제로 미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은 7년 뒤인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 때였다. 또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해 행정부를 구성한 것도 파리조약 6년 뒤인 1789년 4월 30일이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1776년을 자기들 나라의 출발점으로 인식한다. 여기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은 없다. 미국인들은 1776년부터 영국의 식민통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향한 투쟁을 본격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1776년을 미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하는 것이지, 1776년에 영국의 식민통치가 제거됐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식의 역사인식법은 아주 오래 전부터 수없이 많이 있었다. 일례로, 당나라의 존속 기간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을 예로 들 수 있다.

백과사전에서 당나라를 검색하면, 이 나라가 618~907년 기간에 존속했다고 쓰여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나라는 618년에 세워져 690년에 망했다가 705년에 부활해 907년 멸망했다. 690년부터 705년까지의 15년 동안 중국을 지배한 것은 무측천(측천무후)이 세운 주나라(무주)였다.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주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690~705년 기간에도 여전히 당나라가 지배했다'고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사례를 열거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1919년을 건국 시점으로 인정하는 현행 헌법 전문과 유사한 사례들은 역사 속에 참으로 무궁무진하다. 이런 인식법이 타당하냐 아니냐를 떠나서, 인류는 오랫동안 그렇게 주관적 가치관에 입각해 역사를 인식해왔다. 무엇에 정통성을 두느냐에 따라 과거 역사를 자기 시대 관점으로 정리하곤 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공동체의 관점에 입각해서 과거 역사를 평가하는 게 오랜 관행이었다.

역사서의 주된 독자층은 진보진영이 아니라 보수진영이다. 또 각계각층에서 지도자나 관리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역사서를 가장 많이 본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역사 인식법에 보다 더 친숙한 사람들은 보수파이거나 아니면 지도층일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보수파는 유독 '1919년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서만큼은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미국이 1776년에 건국됐다고 말하고 당나라가 618~907년 기간에 존속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으면서, 유독 그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보수진영이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공식화된 남북분단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1919년 3·1운동으로 세워진 임시정부가 이름에 걸맞은 실질적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무책임한 이승만을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임시정부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노정했다. 독립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좌우의 대립도 해소하지 못했다.

그런 한계가 있는데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정부의 수립이 갖는 고도의 역사적 의의 때문이다.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사건이 거족적인 3·1운동 정신을 총합해낸 것일 뿐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민중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 뒤에 그 정신을 실천하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3·1운동 시기에도 그 운동의 정신을 실천하는 노력이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크게 열망한 것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단순히 일본을 몰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유관순을 비롯한 민중들이 목숨 걸고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과거의 왕정체제를 복구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렇게까지 목숨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주공화국 형태로 독립하고 싶어하는 강렬한 정신이 1919년 당시의 한국인들을 거리로, 광장으로 내모는 힘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출발점, 1919년에 담긴 의미
 
 임시정부의 국회인 임시의정원 관계자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임시정부의 국회인 임시의정원 관계자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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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정신을 반영한 것이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임시정부 법령 제1호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다. 이 헌장을 선포할 때 함께 나온 '선서문'이 있다. 이 선서문을 읽어보면, 임시헌장을 만든 사람들이 3·1운동 시위대의 열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존경하고 경애하는 아(我, 우리) 2천만 동포 국민이여! 민국 원년 3월 1일 아(我) 대한민국이 독립선언함으로부터 남(男)과 여(女)와 노(老)와 소(少)와 모든 계급과 모든 종파를 물론(막론)하고 일치코 단결하야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 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히 인욕(忍辱, 참음)하게 아(我)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사(思)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한지라. 금(今)에 세계의 동정이 흡연(翕然, 일치단결하여)히 아(我) 집중하였도다. 차시(此時)를 당하여 본(本)정부 일전(一全)국민의 위임을 수(受)하여 조직되었나니 ······"
 
위 선언문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3·1운동에 뒀다. 3·1운동으로 표출된 전체 국민의 의사를 받들고 그 위임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왕이 지배하고 신분 차별이 존재하는 기존 정치체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평등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지향한다고 했다. 이런 인식에 따라 나온 것이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규정이다.

1800년대 조선에서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민란이 빈발했다. 홍경래의 난으로 시작해서, 봉건체제에 대항하는 약 100개의 민란이 이 시대를 특징지웠다. 한양 서민층이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은 임오군란도 있었고, 정부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던 동학전쟁도 있었다.

이런 민중항쟁들에서 표출된 열망을 한데 모은 것이 독립협회 활동이다. 만민공동회를 통해 민의를 수렴했던 독립협회가 자유·평등·참정권과 의회 설치 등을 주장한 것은 이 시대 민중의 염원이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1800년대 후반부터 이 땅 민중들이 민주공화정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3·1운동은 그런 열망을 외세를 상대로, 또 거족적으로 분출한 사건이었다. 그 전부터 축적돼온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이 3·1운동으로 표출됐기 때문에, 3·1운동 발생 1개월밖에 안 된 그해 4월 11일에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 체제를 임시헌장에 신속히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주공화정에 대한 거족적 열망이 1919년에 폭발했고 그 분위기가 1945년 해방과 1948년 미군정 종결로 이어졌으므로, 1919년을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1919년 이전에도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1919년만큼 거족적으로 분출된 적이 없었고, 1919년 이후로 민주공화정 건설을 위한 본격 투쟁이 진행됐으므로 1919년을 이 나라의 출발점으로 설정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1919년의 관점에서 1948년의 의미

사실, 1948년은 분단을 고착화시킨 해다.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세워져 분단을 법적으로 정착시킨 해다. 분단체제를 통해 이익을 향유해온 집단이 아니라면, 그런 의미밖에 없는 1948년에 굳이 집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돼 있던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란 잘못된 명제를 하루아침에 지워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1919년을 기점으로 우리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 앞으로 우리 머릿속에서 간단치 않게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1948년을 지우고 1919년을 기준으로 역사인식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인식을 기초로 나라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수확도 함께 얻을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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