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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두겁을 쓴 놈"이란 말을 예전 어른들은 자주 입에 올렸다. 이 말을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받아 물었다. "겉으로만 사람의 형상을 했다는 뜻인데, 행실이나 바탕이 사람답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란 걸 일러줬다.

1980년 대 중반에 읽었던 송기숙 소설가의 '녹두장군'에 이런 문장도 있다.
 
"구렁이처럼 능글능글 웃으며 알몸이라도 만지듯 험한 상소리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인두겁을 뒤집어썼다고 이런 작자도 사람일까 싶었다."
 
왜 인두겁이란 말을 하냐면, 이번 강원 산불을 두고 도무지 상식적이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하는 이들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현장, 그 시각 국회에서는
  
강원도산불 속초에 사는 친구의 다급한 전화와 생방송으로 만난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일성콘도 근처에서 발생한 산불이 속초시 동명동까지 확산됐음을 확인하고 달려갔다.
▲ 강원도산불 속초에 사는 친구의 다급한 전화와 생방송으로 만난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일성콘도 근처에서 발생한 산불이 속초시 동명동까지 확산됐음을 확인하고 달려갔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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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재보궐선거를 치르고 하루만인 지난 4일 오후, 강원도 인제군에서부터 산불이 나더니 저녁엔 강원도 고성군에서 산불이 발생했다. 때마침 이 지역은 강풍주의보가 내려져 있었는데, 불이 붙게 된 것에 바람의 영향이 컸다. 거기다 이 바람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불길이 넓게 번지는 데 일조했다.  

그날 오후 8시 40분 JTBC뉴스룸에서 현장 화면이 전국적으로 방송됐다. 40여 분이 지난 오후 9시 22분, 손석희 앵커는 뉴스 말미에 '속보'로 강원소방본부에서 지휘차량을 급파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서울에서도 소방차량 15대를 지원했다는 내용을 현장중계로 보도했다. 동시에 고성군 토성면 지역의 콘도와 펜션, 속초시까지 산불이 번져 대피령이 확산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시각, 국회운영위에 참석한 국가안보실장이 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생뚱맞은 소리라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필자는 발화 시작점과 바람의 방향, 세기 등 여러 조건을 감안해 산불이 쉽게 잡히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어 현장으로 달려갔다. 

속초시 동명항 수복탑 로터리부터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속초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 미시령 방향으로 좌회전을 해 이동하던 중 중앙시장오거리에서 정차했다. 속초 지리에 밝아, 대신 운전을 해주던 친구가 "미안하다, 여기서 차는 더 갈 수 없어"라며 진행하려던 방향을 가리켰다. 미시령 방향에서 들어오는 차량만 진행을 유도하고 반대차선은 전면 통제하는 모습이었다. "알았네, 고맙고 다시 연락 하자"고 말한 뒤 차에서 내렸다.

현장은 대피령에 놀라 달려 나온 이들과 골목 곳곳에서 차량을 통제하는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로 어지러웠다. 이미 오후 10시 반인데도 하늘은 저녁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 이따금 솟구치는 화염, 곳곳에서 들려오는 사이렌소리와 붉은 노을 같은 하늘... 사람이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몇 장의 현장 사진을 촬영하고 비교적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집의 옥상을 발견했다. 대피하기 위해 집을 나서던 주인에게 "옥상에 올라가도 되나요?"라고 묻고 승낙을 받았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불이 난 방향으로 급경사인지 몇 채 단독주택들이 있으나 먼 곳을 보기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미 불은 바닷가에서 가까운 속초도립의료원 근처와 영랑호를 넘어 장사동까지 번진 상태였다. 알려진 발화 지점에서 7km가 넘는 거리까지 3시간도 걸리지 않아 불이 확산됐다는 얘기다.

옥상 난간에 기대 수시로 불길을 확인하며 친구들이 소셜미디어 등에 올린 글을 확인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국가의 다양한 위기상황에 대응할 책임이 있는 국가위기관리 책임자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붙잡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운영위에서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정의용 안보실장의 이석에 반대하며 "저희도 정의용 안보실장을 빨리 보내드리고 싶다, 그럼 (질문) 순서를 조정하셨으면 된다, 여당 의원들 하지 말고 먼저 야당 의원들 하게 했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갔을 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운영위는 이어졌고, 오후 10시 30분 홍영표 위원장은 재차 "모니터를 한 번 켜시고 속보를 보시라"며 "지금 화재의 3단계까지 발령됐다, 전국적으로 번질 수도 있는 화재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위기상황에서 국민의 안전은 청와대와 정부만 책임을 지고 국회는 책임이 없는 것일까. 황당했다.
  
불타는 민가 채 3시간도 안 되어 속초시 동명동과 장사동은 물론이고 고성군의 토성면 일대로 확산된 산불은 산과 호수를 뛰어넘어 곳곳에서 맹렬한 기세로 많은 가옥과 방송사와 같은 건물까지 집어삼켰다.
▲ 불타는 민가 채 3시간도 안 되어 속초시 동명동과 장사동은 물론이고 고성군의 토성면 일대로 확산된 산불은 산과 호수를 뛰어넘어 곳곳에서 맹렬한 기세로 많은 가옥과 방송사와 같은 건물까지 집어삼켰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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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차단하는 속초문화회관 직원들 한 채라도 더 불로부터 보호하려고 속초문화회관 직원들이 소방호스를 연결해와 사력을 다해 불길을 차단하기 위해 뜨거운 화염 앞에 맞서고 있다.
▲ 불길 차단하는 속초문화회관 직원들 한 채라도 더 불로부터 보호하려고 속초문화회관 직원들이 소방호스를 연결해와 사력을 다해 불길을 차단하기 위해 뜨거운 화염 앞에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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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필자는 현장에서 불길에 속절없이 삼켜지는 민가와 어떻게든 한 집이라도 지키려는 이들의 간절함이 실린 현장을 봤다. 속초도립의료원을 지나, 이미 불길에 삼켜진 가옥 사이에서 안전지대를 찾아 숨을 고르며 속속 전해지는 여러 소식들을 확인했다.

화재 현장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샌 국민들의 여론은 들끓고 있었다. 정의용 안보실장 이석 반대 논란이 일자, 나경원 의원은 5일 아침 한국당 의원총회에서 "산불의 심각성으로 인해 안보실장이 이석하겠다고 요구한 바는 전혀 없다"라며 "9시 30분쯤 홍 원내대표가 갑자기 불이 났는데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라고 책임을 전가하기도 했다. 

산불 진화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정치인들의 현장 방문도 문제였다. 5일 오전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고성 산불 상황실이 마련된 고성군 토성면사무소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산불을 진화할 인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인력 동원을 책임지느라 바쁠 담당자들을 불러 피해 규모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민경욱 한국당 대변인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왜 이리 산불이 많이 나느냐"고 글을 올렸다가 논란이 불거진 뒤 게시물을 삭제했으며,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도 "'촛불 정부'인 줄 알았더니 '산불 정부'"라는 글을 게시해 입길에 올랐다.

팔 걷어붙인 자원봉사자들, 국회는 뭐하나
  
이재민 대피소 민간단체에서 지원한 천막이 쳐진 천진초등학교 체육관 안에선 실의에 찬 이재민들을 위해 현장에서 다양한 상담과 도움의 손길을 나누는 모습을 만났다.
▲ 이재민 대피소 민간단체에서 지원한 천막이 쳐진 천진초등학교 체육관 안에선 실의에 찬 이재민들을 위해 현장에서 다양한 상담과 도움의 손길을 나누는 모습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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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 겨우 몸만 빠져나온 이재민들은 지금 당장 돌아갈 집이 없다. 이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생필품을 직접 싣고 달려와 도움의 손길을 나눴다. 영월에서 왔다는 자원봉사자들이 파김치를 담그기 위해 손질하고 있다.
▲ 자원봉사 겨우 몸만 빠져나온 이재민들은 지금 당장 돌아갈 집이 없다. 이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생필품을 직접 싣고 달려와 도움의 손길을 나눴다. 영월에서 왔다는 자원봉사자들이 파김치를 담그기 위해 손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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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을 위한 세탁봉사 이재민들은 당장 세탁도 큰일이다. 이들을 위해 여러 곳으로 나누어진 대피소를 돌며 세탁물을 가져와 빨래를 해 말린 뒤 다시 주인에게 배달도 한다.
▲ 이재민을 위한 세탁봉사 이재민들은 당장 세탁도 큰일이다. 이들을 위해 여러 곳으로 나누어진 대피소를 돌며 세탁물을 가져와 빨래를 해 말린 뒤 다시 주인에게 배달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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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부축해 식사를 할 수 있게 안내하는 자원봉사자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 자원봉사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부축해 식사를 할 수 있게 안내하는 자원봉사자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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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 현장지원 ‘강원도 재난심리복지지원센터’는 산불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재민을 위한 현장 심리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김주연 센터담당자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임을 밝히고 몇 가지 궁금한 걸 묻자 역할을 소개하며 환하게 웃었다.
▲ 심리상담 현장지원 ‘강원도 재난심리복지지원센터’는 산불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재민을 위한 현장 심리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김주연 센터담당자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임을 밝히고 몇 가지 궁금한 걸 묻자 역할을 소개하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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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상황을 살피는 군수 이경일 고성군수
▲ 현장상황을 살피는 군수 이경일 고성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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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8일 토성면사무소 옆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를 찾았다. 이날도 소방헬기 두 대는 수시로 호수에서 물을 끌어 잔불이 되살아나는 현장에 쏟아 붓고 있었다. 소방차량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이렌 소리는 여전했다. 여전히 잔불이 어딘가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듯했다.

대피소가 마련된 천진초등학교에는 많은 민간단체들이 자원봉사를 나와 있었다. 그들은 이재민의 식사를 준비해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대피소로도 배달을 나갔다. 그리고 이재민들의 빨래를 걷어다 세탁을 하는 등,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일에 손을 보태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회는 산불 지원을 추경으로 하느냐 예비비로 하느냐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진정으로 국민을 향한 봉사정신을 갖춘 정치인은 없는 것일까. 한순간에 집을 잃고 재산을 잃은 국민들의 아픔을 감싸주지 못하고, 이를 정치적 기회로 이용하려는 모습은 "인두겁을 뒤집어 쓴 놈"이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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